“다산, 한강[冽水]가의 삶과 꿈” - 남양주 실학박물관 특별전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 혹은 ․‘두물머리’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쳐 큰물로 아우러지는 이곳은, 향후 실학의 회합이라는 그의 운명과 이어지고 있었다.

 

다산은 30여년 넘는 서울과 강진 등의 타지 생활에서도, 다산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남아 있었다. 순조 1년인 1801년 강진으로의 유배생활, 기약 없는 해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18년 세월. 다산은 그곳에서 연구와 저술에 열정을 태우면서도, 그는 아득하게 먼 한강만을 그리워했다. 그곳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그리고 님이 계신 곳이었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로 불렀다. 1818년 강진에서 돌아온 그는,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자처했다. 그리고 18년을 고향에서 살다가 한강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늘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한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또다시 다산 정약용을 떠올려본다. 한강에서 품었던 다산의 삶과 꿈을.

 

소내[苕川]에서의 생활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의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광주부(1872년 지방지도)(위) 와 소내(정선의 《경교명승첩》중에서)(아래)

 

다산은 평소 “나의 정신이나 외모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 한대로 외탁을 한 그 모습은 외증조부인 윤두서(1668∼1715)에서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으로 떠나 홀로 생활을 한지 6년, 결혼 30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 다산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를 자식들에게 전한다. 그것이 바로 ‘하피첩(霞帔帖)’이다.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했으며,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냈다.

 

1786년(정조 10) 다산이 고향 소내의 풍경에 대해 읊은 12수의 시이다. 이른바 “소천 12경”이다. 25세 때였다. 이후 그는 유배지 강진에서 이 시들을 이성화에게 써 주었다. 고향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성화를 통해 고향까지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일까?

 

 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 자화상(좌) 와 다산 정약용(1935년 동아일보 삽화)(우)

 

한강에 돌아와, 후세의 기약

 

18년의 세월, 그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강진에서 다산의 저술은 경세학의 체계화라는데 특징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변법적 개혁론의 전개였다. 그중에서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기꺼이 조선의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또 조선은 중화문화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체득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바탕이었다.

 

다산이 그린 매화 그림, 매화병제도(좌) 와  매조도(우)

근대의 길에 대한 모색, 조선학의 발전

 

18년 강진에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후 자연 다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다산의 방대한 저작 과정은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쳤다. 이를 ‘다산학茶山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

 

다산의 거대한 담론은 한강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완성되었다. 평생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俟菴’이라 불렀듯이 그는 후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상서지원록》과 《매씨서평》의 마무리, 다산의 고민

그가 서거한 지 100년 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질곡의 역사를 겪고 있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또 80여년이 흘러 탄신 250년을 맞았다. 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었듯 다산의 거대한 사유를 마음에 담아내야할 때이다.

 

 

매달마다 농가의 모습을 읊은 농가월령가와(위) 수종사 가는 길(아래)

다산의 생

본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

1762년(영조38) 광주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윤씨의 3남으로 출생

1765년(4세) 천자문을 배움. 2세 때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갈라져 흔적이 남게 되어 삼미자三眉子로 불림.

1776년(15세)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음.

호조좌랑 홍화보의 딸 혜완惠婉과 혼인. 서울 남촌으로 이사.

1777년(정조1) 이가환李家煥과 매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사숙.

1779년 형 약전과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1783년(22세) 초시와 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를 처음 만남

1784년 두물머리의 배에서 이벽에게 서교西敎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

1789년(정조13) 주교사舟橋司에 배속되어 주교 설치 공사의 규제를 만듬.

1791년 호남에서 천주교도 박해로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와 절교.

1792년(31세)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냥 절약.

1794년(정조18)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 등을 감찰

1800년(39세) 정조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에서 강학,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음.

1801년(순조1)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1805년(44세)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이사.

1806년 강진 읍내 이학래李學來 집으로 이사.

1808년(47세) 만덕사 서쪽의 다산茶山으로 이사.

1809년 초의선사와 교유

1818년(순조18)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귀향. 호를 ‘열수洌水’라고 함.

1822년(61세)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지음.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함.

1836년(순조36) 부인 홍씨와 회혼일에 고향 마현에서 별세

“이 불이 천상을 움직이는 것이죠"

 

“‘세발낙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세발심지’라는 처음 듣는데요.”

 

우스갯소리로 사무실 사람들에게 세발심지가 무엇인지 아는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하기야 일반인들이 세발심지를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굿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4월 11일 의정부에 자리한 한 굿당. 내림굿을 준비하고 있는 자리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이 날 내림굿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 거주하는 정아무개(남, 42세)가 신내림을 하는 자리였다. 정아무개는 이미 신병이 깊어져, 사람들에게 아는 소리를 할 정도로 깊은 무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내림굿판에 음악을 맡아 자리에 동석한 박노갑은, 흔히 ‘어정’이라고 하는 굿판에서 피리와 호적을 담당하는 악사이다.

 

세발심지는 인간의 정성을 하늘로 올리는 것

 

한지를 가늘게 꼬아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박노갑(남, 49세. 수원시 연무동 거주) 흔히 굿판에서는 이 세발심지와 불사전, 그리고 제석고깔을 한지로 만든다. 그런 것들을 한지로 만들고 있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수양아버지(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께서 굿판에 다니는 악사가 되려면 이런 것들부터 굿판의 내력을 다 알아야한다고 늘 말씀을 하셨죠. 가위 하나로 다 만들 수 있는 굿판의 이런 기물들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신령님들을 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죠.”

 

굿판에서 세발심지는 모두 16개를 사용한다. 안당제석상에 1개, 본향상에 3개,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를 놓는다. 본향상에 3개를 놓는 이유는 부모님의 본향과 자신의 본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는 굿에서 흔히 나타나는 12신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지로 만드는 사소한 것 같은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죠. 아마 그냥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만드는 방법만 알았다고 하면, 마음속에 정성을 없을 것입니다. 수양아버지께서 그런 의미 하나하나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 작은 세발심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죠.”

 

 

 

박노갑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세발심지에 불을 붙여, 그 불이 하늘로 열기를 전해 신령들이 감응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한지로 만든 이 세발심지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3이라는 숫자는 우리민족의 숫자

 

왜 굿판에서 세발심지를 사용할까?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를 만들어 온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회장의 말이다.

 

“세발심지라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깊습니다. 두발도 서고, 네발로 만들어도 섭니다. 그러나 세발심지는 우리의 전통적인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삼족오, 삼정승, 삼불제석 등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화합입니다. 예전에 화로를 보아도 다리가 셋이 달려있습니다. 삼족형 화로는 그 다리가 하나만 없어져도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다리가 하나의 목적, 즉 서 있어야 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죠. 세발심지는 바로 그런 3이라는 숫자의 결정판입니다.”

 

결국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의 의미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또한 이 세발심지를 태움으로써 굿판에 모든 잡귀를 물리치기도 한다는 것.

 

“세발심지를 만들어 굿을 하다가 보면, 무엇인가 불을 타는 것만 보아도 이루어질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재주를 배웠다는 것이 행복하죠. 남들은 이런 사소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전통 하나를 익혀 지켜간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죠.”

 

세발심지를 만드는 남자 박노갑. 스스로 세발심지를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그 심지에 태워 신령에게 올린다고. 그것이 자신이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태평소 소리가 골목 안을 찢어놓게 울린다. 징과 바라가 그 소리에 더해진다. 빠른 박자로 두드려대는 소리에,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모여들었다. 대문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무슨 일인가하여 집안을 들여다본다. 4월 8일(일)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74-36호, 이정숙의 봄맞이 굿이 열리고 있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는 기자(祈子 : 흔히 무속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과 수양부리(자신의 신자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씩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이라고 부르는 이 맞이굿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큰 굿이기도 하다.

 

 

굿은 마을의 축제였다.

 

부천 원미구 도당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강남시장 뒤편의 주택가 골목이다. 이층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 건 오색의 천이 바람이 흔들린다. 마당에는 상이 차려져 있다. ‘천궁맞이’가 시작되었다. 천궁맞이란 하늘에 굿을 하는 것을 알리고, 모든 신령들이 굿청으로 좌정을 하라는 ‘신맞이 의식’이다.

 

이 날의 당주 이정숙이 불사제석의 신복을 걸치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거성을 한다. 좁은 집안을 감안해 골목길에도 마을 주민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과거 우리네 풍습에 어느 집에서 굿이 있다고 하면, 그 날은 온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누구나 굿을 하는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나누고, 굿판에 함께 동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도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던 것이다.

 

 

인간의 서열보다 진한 신의 서열

 

굿판에서 사람들은 굿을 하는 무녀들의 신탁이라는 ‘공수’에 울고 웃고를 반복한다. 조상거리라도 할 냥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다 알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날 이정숙의 맞이굿에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기자들은 내림굿을 해준 사람들을 ‘신의 부모’리고 하고, 내림을 받은 사람들을 ‘신의 자식’이라고 한다.

 

이 신의 부모나 신의 자식은 인간세상의 부모자식과는 또 다른, 신으로 인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와 자식이 이루어진다. 이정숙은 수원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의 ‘신딸’이다. 이날 이정숙은 자신의 맞이굿을 하면서 고성주에게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함께 거행했다.

 

무당들은 작두를 탄다. 그러나 아무나 작두를 타는 것은 아니다. 작두별상 등 작두신령이 모셔져야 작두를 탄다. 이런 작두를 타는 형태는 내림을 주관한 신의 부모가 작두를 탈 경우 ‘작두물림’이라는 절차를 통해 ‘신의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 작두물림을 하는 의식은 상당히 성스러운 행위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대물림을 해야 하는 작두신명

 

“저는 신어머니인 최씨어머니에게서 작두물림을 받았습니다. 제 신어머니는 신딸 5명에 신아들 저 하나가 있었는데, 누나들은 아무도 작두물림을 받지 못했죠. 저 하나만 작두물림을 받았어요. 제가 내림을 받고 난 뒤 한 2년 정도 있다가 작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받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는 마을에서 작두를 타는 만신이 왔다고 하면, 인근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고는 했다. 그만큼 작두를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것도 작두물림을 한 작두만신이라야, 무당으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요즈음처럼 작두를 그냥 내림을 받았다고 타는 것이 아닙니다. 작두는 꼭 신의 부모에게서 작두내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올바른 신명이 신의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죠. 우리 신딸들도 작두를 모셔놓고 있고, 그동안 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작두물림을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한 신명 줄을 가진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죠.”

 

우리네들이야 이런 영적인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찬찬히 설명을 듣다가 보니,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옛 말에는 ‘영험은 신령이 주나, 재주는 배워야 한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으면 영험은 신령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굿을 하고 굿거리 재차를 익히고, 음식을 만들고 하는 등, 이런 모든 굿에 관한 것은 신의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저는(이정숙) 아버님(고성주)에게서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나면서 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의 신의 자식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작두물림을 받으므로 해서, 이제야 비로소 이버님의 신딸이 되었다는 것을요.”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잘못하면 눈물이 날 장도로 꾸지람을 하고, 그런가하면 포용을 하는 마음이 너무 커, 오히려 누가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고성주의 신딸들은 작두물림을 받던 날 당의를 입었다. 그것은 고성주가 모시고 있는 작두별상이 남별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먼저 고성주가 작두를 갖고 논다. 그리고 작두를 신딸인 이정숙에게 넘겨주자, 작두를 갖고 마당에 마련한 작두를 탈 곳으로 나갔다.

 

작두를 잘 못 타다가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부정이 타 발을 잘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작두 위에 오를 수 있어야, 영험한 만신으로 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두공수’가 제일이라고 한다. 즉 신탁인 공수 중에는, 작두위에서 주는 공수가 제일 영험하다는 것이다.

 

작두 위에 오른 이정숙이 오방신장기를 받아들고 단골들에게 공수를 준다. 그리고 작두공수를 마친 후 작두위에서 내려섰다. 다음 날인 9일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이곳에서는 역시 고성주의 신딸인 박현주에게 ‘작두물림’이 있었다. 올 봄 맞이굿에서 두 명의 신딸에게 고성주가 작두물림 의식을 행한 것이다.

 

“이제는 이 아이들이 제 신명을 따라 작두를 탈 때가 되었죠. 대개 작두물림은 맞이굿에서 전해지는 것이 정상적인 물림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명의 신딸들이 비로소 제 신명을 이어받은 것이죠. 이런 의식은 저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박현주가 작두 위에 올라섰다. 순간 일갈을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그리고 오열을 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 작두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신도들은 눈물을 흘린다. 작두는 왜 눈물을 흘리게 만들까? 누가 그 서슬이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기를 좋아할까? 어찌 보면 신령의 사람들이라는 징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듯도 하다. 그런 작두물림을 받았으니 어찌 슬픔이 밀려오지 않을까. 이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령의 여인이 된 것이다.

“아버님의 손을 잡는 순간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저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 나는 이제 신령님에게 시집을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바람이 불지를 않았으면 작두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부천 도당동에 거주하는 고성주의 큰 신딸인 이정숙의 말이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거주하는 작은 신딸이라는 박현주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작두를 어떻게 타지’ 하면서 걱정을 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작두를 넘겨준 후에는 그런 걱정이 싹 달아났어요. 얼른 작두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틀 동안 두 명의 신딸들에게 작두물림을 해준 고성주는 이렇게 말한다.

 

“작무물림을 핼 때는 제 속은 숯검뎅이가 다 됩니다. 작두 위에 제대로 오르기는 할까라는 걱정부터, 과연 잘 불리는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죠. 작두날을 밟고 서는 것만 보아도 잘 불릴 것인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이 작두신령의 아내가 되었다. 그 작두신령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같은 신명을 가진 무한한 힘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신의 부모와 신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큰절을 하는 신딸들. 아마도 고성주의 마음은 시집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같지 않았을까?

참 오랫동안 춤을 추어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춤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세상살이를 하는데도 기본이 되었다. 항상 춤 속에서 생활을 하다가보면, 세상 모든 것이 춤과 연결이 되어 진단다. 춤꾼 김진옥은 그렇게 50년 이상을 춤 속에서 살아왔다.

 

4월 2일 용인시 기흥 민속촌 인근에 있는 경기도 국악당의 제1강습실. 장구를 둘러멘 사람들이 열심히 장단을 치면서 춤을 배우고 있다.

 

“손을 이렇게 끌고 오다가 아름답게 넘겨야지. 그래야 태가 아름답게 되지. 그냥 위로 올리면 그건 춤이 아냐”

 

 

어린 나이부터 춤을 시작해

 

춤을 추는 춤꾼들은 거의가 어릴 적부터 춤에 입문을 한다. 춤을 배우게 되는 계기 역시 흡사하다. 어머니들이 춤을 좋아해, 어머니들의 손에 이끌려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12명의 강습생들에게 ‘정민류 교방장고촘’을 가르치고 있는 김진옥(여, 64세) 역시 어린 나이에 종로 5가에 있는 정민무용학원을 찾아간 것이,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을 춤과 함께 살아오게 된 계기이다.

 

“참 그동안 정말 열심히 춤을 추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저는 제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를 해요. 앞으로도 저는 제 춤 길을 갈 것이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제자들을 가르쳐야죠.”

 

 

 

그래서인가 강습생들에게도 길을 유난히 강조를 한다. 아마도 그런 자신이 평생을 쌓아올린 춤에 대한 열정이 그 말 한 마디로 함축되는 듯하다.

 

“아무리 바빠도 춤은 춤길이 있다. 그 춤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

 

춤이 곧 인생일 수밖에 없어

 

다음 카페 ‘정민류교방춤보존회’에 소개된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끝이 없다. 그만큼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경기도 국악당에서 강습생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대학 강의 등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일정을 소화를 해내는 것을 보면, 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무용과 객원교수, 국립한경대학교 사회교육원 전임강사, 정민류 교방춤 보존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용인시지부 고문,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서울시연합회 안무장, 경기 토속민요 연구회 이사, 한.얼무용단 수원지부, 용인지부, 과천지부 예술총감독, 한맥예술단 예술감독, 서초 체육쎈타(YMCA) 한국무용 강사, 창무회 화랑 회원

 

카페에 소개된 이력의 앞부분이다. 그 밑으로는 한참을 내려가야 할 만큼 일 년에도 많은 공연무대에 섰다. 많게는 일 년에 10여 차례의 공연을 가질 만큼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대 위에 올랐다.

 

“원래 정민선생님은 김해랑 선생님의 제자예요. 김해랑 선생님은 1953년도에 서울에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를 설립하시어 초대 이사장직과 마산 경남무용협회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셨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을 신무용으로 발전시키신 분입니다. 정민 선생님과 최현 선생님의 최초의 스승이기도 하시고요. 안타깝게 55세의 나이로 타계를 하셨죠.”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

 

그런 김해랑 선생에게 사사를 한 고 정민 선생은 대구에 머물 때 밤마다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을 배웠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이 폐청되고 난 후,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대구에서 교방춤을 배운 정민선생은, 북가락과 장고춤 등 나름 교방춤으로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정민 선생님은 1928년 11월 4일 일본에서 태어나 2006년 1월 5일 79세 일기로 타계하셨어요.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선생은 광복이전부터 연극과 노래를 하면서 예능계에 데뷔하며 일본예술단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 승무로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1955년부터 각 대학과 고등학교의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 우리 춤의 보급에 앞장을 섰던 분이시죠“

 

 

그런 정민 선생에게 교방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춤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고 한다. 이미 한영숙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임인 벽사춤 아카데미의 이사이기도 했던 김진옥 선생은, 벽사춤과 함께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민선생님의 교방춤은 정말 우리 민속춤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생님은 대구에서부터 나중에 일본에 가신 후에도, 교방의 기생들에게 춤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수십 가지가 넘는 교방춤을 그렇게 전수를 해주셨죠.”

 

정민류교방춤의 제1호 이수자이기도 한 김진옥 선생은 교방춤을 보급하고 알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는 서울본부를 비롯해, 부산광역시지부, 경기도지부, 인천남동지부, 경남지부, 전북지부, 김해지부 등이 있다.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보존회 회원들은 일본 오사카본부를 비롯해 동경지부와 교토지부가 있으며, 미국 LA에도 본부가 있다.

 

“지난 해 추석 때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가졌었습니다. LA에서 공연은 정말 감명 깊었죠. 1,300석을 꽉 메운 관중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보존회의 이름으로 정민선생님을 기리는 공연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그대로 춤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그래서 춤꾼들은 사는 일상이 춤이라고 하는가보다. 평생을 춤으로 살아온 김진옥 선생. 교방춤의 멋을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느 종교가 그럴 수 있을까? 요즈음은 그저 종교란 것들이 어째 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다가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면 사람들은 곧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는 한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고려암. 집 대문 앞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란 간판이 걸려있다. 벌써 이 집터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온 지가 40년 가까이 되었다는 고성주(남, 56세). 크지 않은 몸짓에 천생 여인네 같은 모습이다.

말을 하는 것이나, 집안에 먼지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도대체 이 넓은 집을 언제 다 쓸고 닦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18세에 신내림을 받고 지금까지 한 결 같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저 묵묵히 하고 있다. “무녀가 할 일이 무엇이겠어요. 수양부리들 잘 건사하고, 늘 마음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비는 일 빼고는” 그래서인가 이 집의 단골들은 대개가 대물림 단골네들이다.


“아버님, 저희 아이가 잘될까요?”

나이가 동년배 인듯한 여인이 고정주에게 하는 말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곧잘 귀를 의심하게 된다. 비슷한 나이에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쓰다니. “어멈아, 걱정하지마. 올 해는 잘 될 거야. 3~4월까지는 조금 힘들겠지만, 그 달 지나면 다 풀릴 테니.” 아버님이란 호칭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이 그저 불편함이 없이 들린다. 그 또한 이 집의 내력인 듯하다.

“예전에 신부모님들이 그렇게 수양부리들을 불렀어요. 저도 그렇게 듣고 배운 것이죠. 우리 집은 대개 대물림 단골네들이라 오히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단골네들이 불편하다고 해요”

그저 곁에서 듣고 있노라면 그 나긋한 목소리 안에 대단한 카리스마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춤 잘 추고, 소리 잘하고, 굿 잘하고. 도대체 빠질 것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고성주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신내림을 받은 것일까?


맞이굿에서 신나게 창부를 놀고 있는 고성주(위) 신령을 모신 전안(아래) 전안은 밝고 먼지 하나가 바닥에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신령을 모신 전안은 어둡고 더럽다면 그 곳에 무슨 좋은 신령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병을 앓았어요. 그런 일로 인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보아야죠.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만신이셨고, 고모 또한 만신이었죠. 고모는 박씨네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모가 데려다 키우는 바람에, 남의 성을 갖고 살기도 했어요.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파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를 못했어요. 한 달이면 고작 일주일이나 학교를 갈 수 있었으니, 무슨 공부인들 제대로 했겠어요.”

그런 그가 그 많은 굿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외우고 있는 것을 보면, 타고난 무당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타고난 끼도 다 그런 길을 가기위해 준비를 한 듯하다. 수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낸 적이 없다. 하다못해 바쁘게 준비한 음식 하나라도 대접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한다.


18세에 받은 신내림,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속속들이 본 사람들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처음 내림을 하고 난 후 신령님들의 화분을 이천에 가서 모셔왔어요. 그런데 한 겨울인데도 뱀들이 득실거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들어가니까 어디로 슬그머니 사라지데요.”

함께 동행을 했던 사람들이 정말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하기야 고성주의 기이한 행적으로 본다면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수양부리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책으로 몇 권을 엮어도 모자랄 판이다. 하기야 40년 가까운 세월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명과 복을 주었으니,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필설로 어찌 다하랴.


운 맞이 굿에서 수양부리에게 운시루를 건네주는 고성주(위) 굿판에는 악사와 무녀들이 함께 동참을 한다.


“그동안 정말 많은 수양자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는 했죠. 매일 보다시피 했던 사람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지노귀굿을 하면서 속으로 울기도 많이 했죠. 그럴 때마다 제가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슬퍼했죠.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축원을 해주면서, 자식들이 모두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아마 전 다음 세상에도 우리 수양자식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남의 본이 되는 것이 만신의 길이라고 하는 고성주

지노귀굿을 할 때면 유난히 공을 들이는 만신 고성주. 그가 가진 품성은 평소 하는 행동을 보면 그대로 보인다. 벌써 30년 가까이 자비를 들여 경노잔치를 열었다. 고기를 삶고, 음식을 하고 술과 음료를 대접한다. 거기다가 자신이 가르친 춤꾼들이 모여 춤을 추기도 한다. 구경을 하는 어르신들도 절로 흥이 난다. 한 해도 거르고 넘어간 일이 없다.

함께 굿을 하고 있는 신딸인 이정숙. 이들은 영적인 부녀관계이다.


“아버님 여기 있던 밥 통 어디갔어요?”
“고장 나서 내다 버렸는데”
“멀쩡한 것이 왜 고장이 나요?”
“위에서 떨어졌어”
“아니 그 무거운 것이 떨어졌으면 장판이 흠집이라도 났어야죠.”

이쯤 되면 그 밥통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남을 준 것이다. 문제는 그 밥통이 고가의 밥통이라는 것이다. 뒤에서 이야기를 한다.

“그럼 어떻게 해. 어멈이 나이가 먹어서 밥을 하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있는 것 주어야지”

그렇게 집에 있는 물건들을 남을 주기를 좋아한다. 물건을 하나 사겠다고 하면, 수양자들이 먼저 알고 있다. ‘얼마나 갖고 계시겠느냐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집안을 깨끗이 하고, 남을 도우면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만신의 할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누누이 강조를 한다.


3월 23일 금요일.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의 집 전안(신령들을 모셔 놓은 곳)에서는 ‘운맞이 굿’이 열렸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일이 잘 풀리지를 않아 운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맞이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운이 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 집을 드나들다가 보면 이상한 일을 보게 된다. 수양자들이 굿 날짜를 안 잡아준다고 삐치기도 한다. 딴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3대를 대물림을 하는 신도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고성주에 대해서 잘 안다.

“평생 혼자 사시는 분이잖아요. 신령님과 결혼을 했다고 늘 말씀을 하시니까요. 아버님은 평생을 아마 자식들 걱정하다가 저렇게 늙으실 겁니다. 굿을 하나 가르치셔도 적당이가 없어요. 굿을 해도 나쁜 소리를 못하게 하시죠. 만신이 악담을 하면 그렇게 된다고요. 무조건 좋은 소리만 하라고 하시죠.”

함께 굿판에서 굿을 하던 신딸(내림을 받은 사람을 신딸 혹은 신아들이라고 부른다. 영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다)인 이정숙의 말이다. 비슷한 나이면서도 정말 친 부모를 모시듯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만신 고성주의 삶의 모습이다.

“내 잘되게 도와줄게. 다 힘들다 오 해후 년에는. 그래도 너의 대주 하는 일 잘 되게 해주마. 내가 불려주시마.”

지노귀굿(천도굿)을 할 때는 더 많은 신경을 쓴다는 고성주


듣기만 해도 힘이 솟아날 듯하다. 7시간 정도를 지나 굿은 끝이 났다. 제단에 차려졌던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가는 수양부리의 얼굴에는, 집안에 들어설 때 얼굴에 가득했던 그늘이 보이지를 않는다. 굿을 하기 위해 차렸던 음식들을 말끔히 치우고 나서, 한 마디 한다.

“만신은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모든 시름을 다 받아야 해요. 그리고 그것을 다 풀어주어야죠. 만신이 먼저 제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떤 신령이 도와주나요? 요즈음 종교가 도대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아파요. 아마도 신령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두려울 텐데 말이죠. 건성으로 신령 탓만 하는 것 같아요”

3월 28일. 자신의 수양부리들이 신령님들께 올리는 진적굿을 앞두고 온갖 집안치장에 한창이다. 도배를 새로 하고, 부엌에 기물도 정비했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신령을 섬기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런 마음가짐이 오늘까지 대물림 자식이라는 수양부리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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