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란 어느 인물의 행적을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에 비문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이는 비의 머릿돌을 갖고 있고, 비 머리에는 제목을 적어 넣는 네모난 부분을 마련했으면서도 정작 비에는  단 한 자의 비문이 없는 비. 이러한 비를 '백비'라 부르는데, 이 비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 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조각기법이나 그 솜씨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거북이의 몸으로 되어있으나, 귀두가 깨어져 나간 것인지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비를 받치는 귀부는, 대개 몸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를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연곡리의 귀부는 말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연곡리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과 비의 받침인 귀부

말머리에 백비, 누구의 비인가?

보물 제404호로 지정이 된 연곡리 석비는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와 몸돌인 비, 그리고 아홉마리의 용을 조각한 머릿돌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받침돌인 귀부는 등의 무늬는 거북 등의 무늬와 같이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 상당히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거북이의 앞발은 파손이 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는 마치 말머리와 같은 모습이다. 이 귀두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닌 듯하다. 앞부분이 절단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귀두를 보면 머리의 옆에 지느러미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보이는 귀두인 용머리인 것으로 처음에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귀두는 앞부분이 어떻게 이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일까? 그 외에 귀두부분은 용머리 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해서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받침돌의 거북은 그 문양들을 볼때 상당히 기능이 뛰어난 장인에 의해서 섬세하게 조각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귀두라면, 당연히 중간에 누구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비문이 없는 백비, 누구의 비일까?


비에는 전, 후면을 비롯해 측면에도 글자 한 자가 없다. 

찬찬히 돌아보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는 했어도, 전체적인 비의 모습은 뛰어나다. 등 무늬인 귀갑문은 정교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몸을 받치고 있는 받침부분은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잎은 작고 양감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귀부로 꾸며진 받침돌과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 형채 등은 고려 초기의 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비의 위에 얹은 머릿돌에는 모두 9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용들은 서로 몸을 꼬아 뒤틀고 있는데, 정교한 그 조각은 가히 뛰어난 작품이다.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기 위해 다투는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뛰어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곡리 석비. 도대체 그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단 한 자의 기록도 없는 비만을 갖고는 그 주인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말머리에 비문이 없는 백비. 그리고 전체적인 조각기법이 뛰어난 이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일부러 비문을 적지 않았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헤 훼손이 되어 비문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혹 이 비에 어느 인물의 일대기를 적으려고 마련을 했다가, 갑자기 폐사가 되는 바람에 적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백비로 남아있는 뛰어난 연곡리의 석비는 그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아산시 읍내동 159번지에 소재한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의 뒤로는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문은 동헌의 문을 말하며, 현판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명칭을 붙인 것은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이 군의 명칭을 온주라 붙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온주아문의 문루는 이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문은 모두 장대석으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정도의 주형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중건한 아문은 모두 세 칸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누대 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놓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 곳 누대로 오르는 계단 위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존을 위함이지만, 차라리 관리자를 두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에 걸린 현판. 이곳이 신라때 온주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 잠긴 문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통으로 잠겨있다.

 

원형 복원을 마친 동헌

 

동헌은 아문을 들어서면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이 문화재 지역 안에는 동헌건물과 아문 두 동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동헌의 건물은 조선조에는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일제 때인 1928년부터는 일제의 주재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 후에는 20년 간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이용을 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동헌은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동헌을 바라보면 좌측 한 칸은 돌출된 방을 놓았고, 다음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한 칸의 방을 두었다. 좌측의 한 칸의 방을 빼면 대청 앞으로 낸 툇마루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동안 동헌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93년 4월 예산을 들여 1995년 5월에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 보면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어, 온주 동헌의 옛 모습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동헌 원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문과 동헌 두 동만이 남아있다

 
▲ 경고문 동헌의 방문 등에 하얀쪽지가 경고문구다. 여기저기 많이도 보인다.

 
▲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란 문구를 글자를 지워놓아 '들어가십시오'가 되었다.

 

문화재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면, 관리 소홀은?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기저기 보수를 해야 할 곳들이 보인다.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는지 동헌 뒤편 배수로의 축대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문을 바른 창호지는 누군가 일부러 찢었는지 모두 너덜거린다. 마루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리고 쓴 푯말은 '지'와 '마'를 지워놓아 '들어가 십시오'란 푯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훼손이 된 창호의 밑에 무엇인가가 안팎으로 붙어 있다. 글씨를 보니 건조물 파괴, 창살문, 창호지 훼손 등 문화재를 파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 2년 이상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리소홀인 담당자는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물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양식 없이 하는 행동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경고성 문구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관리 소홀도 그와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무너진 배수로 배수로의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겨우내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 창호 심하게 찢어져 걸레가 된 창호

▲ 경고 관람객들에게만 경고를 할 것이 아니라, 관리소홀을 한 사람들이 먼저 경고를 받아야 할 판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온전히 관리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문구나 무조건적인 잠그기보다는, 온전히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인원배치가 우선이다. 매번 들어가는 보수비용만 갖고도, 그런 지킴이 한 명 정도의 인원을 쓸 수 있는 예산은 충분하단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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