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정말 한국인이십니까?

2011년 10월 12일 오후 9시 현제 뷰 블로거는 309,169명입니다. 모두 한국인이십니까? 사람들은 외형만 보고 한국인이라고 판단을 하나요? 아님 한국어를 쓰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하나요? 그도 아니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요?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헛소리라도 좋고, 미친사람이라고 욕을 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나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음 뷰에 글을 송고를 하고. 추천을 누르고 댓글을 달고, 그리고는 출근을 해 일을 합니다. 하루에 어떤 글이 되었든 간에 하나씩은 송고를 합니다. 제가 하는 분야는 주로 우리 문화재를 현장에 가서 찾아보고, 그 느낌을 글로 적는 것입니다.

문화재 계단에 한 낙서입니다. 어디나 낙서나 보입니다.

문화재를 구경한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질문 참 황당하죠?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럼 한국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고.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한국인처럼 생긴 사람이, 한국인이 아닌 짓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정말 의심이 들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까요.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죠.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구저 구경하는 사람, 마지못해 따라가 보는 사람,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 그리고 부모님을 따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나선 아이들. 거기다가 연인과 함께 여행을 왔다가 구경을 하는 사람.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문화재가 있는 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 문화재를 찬찬히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눈에 뜨이지가 않습니다. 그저 지나치면서 주욱 훑고 지나쳐 버립니다.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 아깝게 무엇 하러 구경을 할까요? 그 시간에 더 즐거운 일도 많을 텐데 말입니다.

문화재 곁에 쌓여있는 술병입니다. 정말로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한국인이라면, 이런 것을 말려주세요

답사를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화재들. 그 문화재들은 그 시대의 역사와 우리의 정서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하기에 문화재 하나마다 정성과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그 안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 손으로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죠.

국보의 벽에 이렇게 낙서를 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아니면 나하고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또는 성의 없는 관리에 의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문화재들이 아픔을 당합니다. 낙서하고, 쇠붙이로 쪼아대고, 목을 자르고, 심지어는 불에 태우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입니다. 아이가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을 방치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한국인일까요? 껍질만 한국인이라고 다 한국인이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문화재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뻔뻔하게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진정한 이 나라의 문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그리고 마음속에 조그마한 양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이런 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남의 나라에 가서 문화재를 훼손하다가 들키면 그 나라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도 무식한 나라 사람들이라고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문화재는 그렇게 훼손을 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관리가 안된 문화재입니다. 잡풀이 마당에 그득합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내가 댁의 문짝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잘 심어놓은 꽃밭에 들어가 꽃을 꺾는다면 어쩌시렵니까? 그레도 방관하고 계실건가요? 아마 생난리를 칠 것입니다. 바로 우리 문화재를 지키지 않는 일은 내 집을 간수하지 못하는 일과 같습니다. 뷰 블로거 여러분. 어디든지 좋습니다. 여행을 하시다가 이런 문화재를 훼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단호하게 혼을 내 주시기 바립니다. 그저 나하고 상관없다고 수수방관 하지 마시고요.

부탁드립니다. 31만 명의 뷰 블로거들이 모두 문화재의 감시원이 된다면, 아마도 이 땅에 다시는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블로거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뷰 블로거님들에게 묻습니다. 한국인이십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이후로 우리 문화재 지킴이가 되어주세요. 난 그 힘을 믿습니다.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38에 소재한 내원사. 지리산 내원사라고 부르는 이 절은 양편으로 물이 흐르는 계곡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름철 계곡에 물이라도 불어나면, 암반으로 된 계곡 바닥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한 곳이다. 가끔은 천둥이 치듯 굴러 떨어지는 물소리에 막힌 가슴이 확 트이기도 하고.

지난 8월 13일 찾아간 내원사. 내원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붕괴되어 있고, 아름답던 계곡은 여기저기 파여 나갔다. 내원사로 들어가는 마을의 길도 한편이 뭉툭 잘려나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번 집중호우 때 지리산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하더니, 그 때 수마가 할퀴고 간 자국을 남겼는가 보다.



빗속에 찾아간 내원사, 삼층석탑을 보다

내원사에 도착 했을 때는 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하는 비 때문에 제대로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시원한 마당과 산 밑으로 나란히 선 전각들이 보인다. 내원사의 대웅전을 바라보면, 대웅전 앞에 역간 비켜 서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이다.

내원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과 3층의 탑신, 그리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며 높이는 4.8m이다. 이 석탑의 북쪽에는 옛 법당지가 있고, 주변에 석등부재와 석탑의 상륜부재, 각종 조각석의 파편 등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남향한 1탑 가람으로 현재 탑의 위치는 예전 그대로의 원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손상이 된 삼층석탑,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 않아

내원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러나 이 탑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조금은 의아해 할 것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을까 하고.

그러나 문화재를 지정할 때 조성 시기나 그 형태 등을 보아, 연대가 정확한 것은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한다. 이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그 후 부수어진 탑을 1961년에 내원사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한 것이다.



석탑은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개의 우주와 두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씩이다.

옥개석 상면에는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몸돌을 받고 있는 점과, 특히 기단부의 구성 및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깨지고 많은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내원사 삼층석탑. 석탑을 돌아보고 있노라니 비가 더욱 거세게 쏟아진다. 그 빗속에 견디기가 어려웠는지, 작은 동자상 하나가 엎드려 있다. 비를 맞으며 돌아 본 내원사 삼층석탑. 그 당당한 모습에서 신라인의 자태를 떠올려본다. 그 안에 삼국을 통일한 기개가 서려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수월정(水月亭)’, 이름대로라면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일 듯하다. 산청군을 답사하는 13일, 수월정을 찾아 나섰다. 이번 답사에 유일하게 찾아보고자 했던 정자이다. 내비를 이용해 주소를 입력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444번지. 수월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5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수월정의 지번 앞에 도착하자, 내비가 찾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내판을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수월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곳을 지나 수월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던 수월정.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수월정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길가 쉼터에서 쉬고 계시던 어르신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길에서 보인다는 정자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444번지 앞에서 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까지 가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보자고 아우를 졸랐다. 더 가파르다. 위로 올라가니 우측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수월정이 거기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문화재를 길거리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왜 수월정의 안내판은 없었던 것일까? 근 1시간 이상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수월하게 찾을 줄 알았던 수월정은 그렇게 애를 쓴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수월정의 측면과 나뭇가지로 막혀버린 입구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 수월정

수월정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방 두 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가운데 방을 둔 좌측에는, 뒤편으로 밀어 한 칸의 방을 두고 우측으로는 누마루를 깔았다. 마루 앞에는 양편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기둥은 외진주는 원형이며, 내진주는 사각형이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정자. 앞으로는 나무가 들어차 정면에서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사진에 담아냈다. 수월정은 1915년에 석초 권두희가 김재 권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대개 마루를 중심으로 구성을 하지만, 이 정자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산청지방에서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온돌방을 중심으로 구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천정에 달린 말벌집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기둥 아랫부분. 그리고 떨어져 나가버린 판문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다

산청군은 비교적 문화재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월정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생각이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주추위에 세운 기둥에 시멘으로 발라 놓았다. 아마도 기둥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다니. 아마 시멘트가 마르면, 이것을 주추처럼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 본다. 누마루 끝에 판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천정에는 커다란 말벌 집이 달려있다. 벽은 무너져 마루에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를 했다니.


벽과 찬정에서 떨어져 내린 흙더미

이 수월정을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고, 부수어져 가고 있는 수월정.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아마도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을 정자인데 말이다.

참 어이가 없다. 부모 마음이라는 것이 다 같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자기자식은 소중한 법이니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하다’고 했던가?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할까? 꼭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아마 아는 사람의 자식이 혼이 나고 있다면 다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궁금해 할 것이다. 어제 일이다. 절 안에는 문화재가 많다. 그것이 국보나 보물은 아니라고 해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보존할 가치가 있어 지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당신 아이를 내가 혼내면 좋겠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일까?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휴가철 여행에서 생긴 사건 하나

지금은 한창 휴가철이다. 휴가철에는 사람들이 정해 놓은 곳을 오가는 길에, 절집을 들리고는 한다. 아무래도 절집에는 희한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절을 다녀 본 아이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처음으로 절을 찾는 아이들의 눈에는 이런 저런 것들이 모두 신기할 것이다.

그런 여행길에 들린 절집에서 일이 생겼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으로 황당하다. 그리고 적반하장 격으로 아이를 나무란 사람을, 오히려 아이들의 부모가 혼은 내고 있는 중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한 아이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문화재를 나무로 득득 긁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청년이 당연히 그러지 말라고 했단다. 그래도 들은 척도 않고 계속해서 문화재를 긁고 있더라는 것. 무엇인가 보았더니 탑 틈에 무엇이 끼어있는데, 그것을 파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이가 듣지를 않자, 언성을 좀 높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가까이에서 보고 있던 부모님들이 쫓아왔고.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부모님들을 본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아이의 부모님들은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 그러더니 다짜고짜 청년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하는 말이

“당신 아이를 내가 혼내면 좋겠어?”

라고 했단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말이다. 그 자리에 없었던 차라,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청년은 말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무척 당황했었나보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민다. 남의 일에 가급적이면 참견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문화재를 나무로 긁어 말렸을 뿐이라는데 너무한 것 아닌가.


무조건 내 아이 편들기, 올바른 것일까?

주변 사람들은 보고도 아무도 청년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거들고 나섰다. 눈을 아래위로 부릅뜨고 곧 나에게 덤벼들 기세이다. 하지만 내가 만만하지가 않았나보다. 우선은 인상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간다. 거기다가 문화재를 건드려 놓았으니, 이미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고 한다.

그것이 더 열을 돋우고 말았다. 결국 절집 어른이 나오셔서, 어른에게 사과를 하는 것으로 그치기는 했지만 영 기분은 말이 아니다.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이 아이를 잘 못 가르친 것을 사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고 무조건 내 아이라고 역성을 드는 부모님들. 과연 올바른 교육일까?

청년에게 물었다. 아이는 있느냐고?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단다. 그러면 아이 없다고 약이나 올리지 그랬느냐고 웃으면서 농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씁쓰레한 마음은 영 가시지를 않는다.


함안군은 군청이 소재한 읍명이 ‘가야읍’이다. 그리고 함안면이란 곳이 따로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군명을, 행정의 중심인 곳을 읍명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함안군뿐인 듯하다.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는 ‘큰절마을[大寺谷]’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고목 곁에 석불이 서 있다.

보물 제71호인 함안 대산리 석불. 양편에는 온전하게 보존이 된 협시불 입상 2기가 서 있고, 조금 뒤편으로 물러 선 중앙에는 목도 잘리고 깨어져, 훼손이 심한 석조 좌불이 한기가 있다. 이 양편에 선 입상이 협시불이고, 좌불이 본존불인 듯하다. 이 3구의 석불을 합해 보물로 지정을 하였다.


생김새가 같은 협시불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은 손 모양만 다르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관이 아닌, 마치 두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다. 조금 길쭉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평면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눈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일반적으로 석불에서 나타나는 법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치 우리 고유의 한복을 보는 듯하다. 왼쪽 어깨에는 매듭으로 묶은 것처럼 자세히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 밑으로는 매듭을 지었다. 치마는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타원형의 주름이 양편으로 드리워져 있다. 법의의 표현이 조금은 무겁게 보인다.




두기의 협시보살은 손의 형태가 다르다. 석불입상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우측의 보살의 좌측 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손에 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약사여래불인 듯하다. 이 협시보살은 어깨의 매듭과 무릎 아래로 늘어진 타원형의 옷 주름이 특징적이다.

발은 대좌에 새겨져 있어

이 두기의 협시불은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발이 석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대좌에 조각을 해 연결을 하였다. 대좌는 연꽃을 두텁게 새긴 상대와, 8각의 면에 앙련을 새기고 안상을 새겨 넣은 하대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윗면에는 석불입상의 발을 새겨 넣어, 석불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초기 석불의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는 이 두 기의 협시불은, 지방의 특성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경남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가 이렇게 흡사한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힘든 본존불

뒤편에 앉아있는 석조불상은 목이 없다. 광배가 남아있는 이 좌불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다. 남은 부분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광배의 형태나 석질로 보아, 고려 때의 석불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한 옆에도 목이 없는 석불과 석조물들이 몇 점 보인다. 이 대산리 석불은 마을에서 섬기고 있다고 한다.




2월 20일 찾아간 대산리. 마을 안쪽 동구나무 곁에 서 있는 이 석불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형태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을 이름도 ‘큰절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일대에 상당히 큰 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절 경내에 있었을 석불들. 그저 지금의 형태로나마 남아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나마 양편의 협시불이라도 온전한 모습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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