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논산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 부적면 덕평리 방향으로 가는 691번 도로가 연결이 된다. 이곳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마을 안을 지나면 산 밑에 넓은 사지가 있다. 그 입구에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소재지는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산 4번지로 되어있으나, 서 있는 곳은 평지와 다름이 없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으로 추정되는 이 여래상은 운제사(雲際寺)’의 옛 절터에 있던 석불입상이다. 이 불상을 사람들은 관촉사 은진미륵의 작은어머니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석조여래입상의 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은진미륵불과 마주한 형태로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복스럽고 자애로운 얼굴

 

오후에 찾아간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몇 년 전인가 이곳에 들려 보았을 때는, 그저 바쁜 걸음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번 답사 때는 주변부터 찬찬히 훑으면서 자세히 석조여래불을 들여다본다. 많이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풍만한 상이다. 고려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불신의 높이가 1.95m나 된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눈과 코, , 턱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얼굴의 상이 두툼하고 둥그런 형태에서 후덕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볼 부분이 떨어져 나가 귀의 모습을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머리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것이 복스럽고 인자한 모습이다.

 

 

 

떨어져 나간 팔이 보기 흉해

 

가슴부분을 들어낸 통견으로 조성이 된 법의는 두텁고 무겁게 느껴진다. 옷 주름은 양 어깨에 걸쳐 가슴 아래서부터 U자 형으로 흘러내린다. 다리 윗부분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양 발에 큰 타원을 만들고, 옆으로는 주름치마로 표현하였다. 이런 형태는 경상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의 법의에서도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그 형태가 것으로 보이는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현재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55호이다. 현재는 법의 끝자락 까지만 나타나 있어, 그 밑에 어떤 모양의 대좌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석조여래입상의 왼손은 팔꿈치 이하 부분이 절단되어 있다. 오른손도 온전하지는 않다. 왼손의 위치와 함께 가슴 안쪽으로 들어 올려 여원인을 짓고 있는 오른손의 모양으로 보아,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으로 생각된다. 우수한 형태의 고려석불로 추정되는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배례석과 팔각기둥이 옛 모습을 말해주고

 

석불의 앞에는 방형판석 2매와 장방형의 연화문 배례석 1매가 놓여 있다. 그 옆 철책 안으로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팔각 돌기둥 1개가 있는데 높이는 1.08m이고, 상부에는 4각의 촉이 있다. 이 돌기둥은 아래쪽은 팔각이고 위쪽은 사각형인 특이한 형태이다. 이런 석조여래입상과 판석, 돌기둥 등으로 보아, 이곳에 제법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일까?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아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같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래불은 현재의 부처님이고 미륵불은 후세의 부처님이라는 점에서,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 어머니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비록 많이 훼손이 된 형태에서 그 온전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상으로 조성이 된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점점 힘들어지고만 있는 세상살이에서, 그 미소만큼이나 편한 마음 한번 가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36번지에 가면 성문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전북유형문화재 제 87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상은, 발견 당시에는 성문안마을 밭 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고, 대좌와 광배가 각각 떨어져 있었단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에는 전설이

 

2002년에 석불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높이 245㎝, 너비 98.8㎝, 두께 35.4㎝의 석불입상으로 밝혀졌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넙적하고 크다. 귀는 볼 아래까지 내려와 있어 풍만하다. 얼굴의 전면과 길고 큰 귀에 비해, 가는 눈과 작은 입은 어딘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 석불입상의 목에는 희게 붙여 놓은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다. 머리 부분이 6ㆍ25때 떨어졌던 것을 다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코는 떨어져 나가 부자연스러운데, 그 이유를 마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소가 달아났다는 것이다. 화가 난 농부가 소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하필 석불의 코를 맞혀 석불의 코 한쪽이 떨어져 나갔단다. 그런 연유에서인가 그 농부는 그날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 길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의 죽음이 석불에게 해를 입힌 벌이라고 하여, 석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부처인데, 그런 일로 인해 농부를 죽였을 리가 없겠지만, 그런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이 석불입상이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는 갓이다. 전설이야 늘 그렇듯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나면, 더해지면서 전해지는 것이니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다가 과장이 된 듯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 광배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쳐

 

현재 성문사 대웅보존에 모셔진 학정리 석불입상은 모습이 특이하다. 목에는 이어 붙인 밑으로 삼도가 보인다. 그리고 법의는 통견으로 했으며, 가슴부분에 U 자형의 주름이 잡혀있다. 두 손은 풍성한 법의 안에서 두 팔을 마주했다. 발밑까지 흘러내린 법의는 발목 부분에서 다시 U자형의 줄이 있고, 그 아래는 주름을 잡은 형태이다. 발은 법의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데, 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법상으로 가려져 있어 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이 학정리 석불입상의 광배는 새로이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뒤에 하얀색으로 마련한 광배가 어딘가 어색하다. 발견 당시 대좌와 광배가 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광배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조성한 광배가 영 딴판이다. 물론 석불입상의 격에 맞는 광배를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보기에도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목이 떨어진 석불좌상에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머리가 영 딴판이라든가, 석불입상에 회칠을 해 문화재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등, 우리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행위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치고 있는 경우이다. 학정리 석불입상도 제 광배가 조금 쪼개지고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원래의 것을 함께 놓았다면 그 가치가 지금보다 나았을 것 같다.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은, 새로 만들어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을 잘 지켜내는 것이다.

땅 밟기도 모자라 이번에는 신성한 타 종교의 전각에 난입해, 오줌을 깔기고 상스런 욕까지 낙서를 해댔다니. 이런 사람을 어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런 특정 종교의 횡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그냥 넘어갈만한 사안이 아니다. 팔공산 동화사가 한 마디로 한 종교인이라고 하기에도 허접한 인간에게 더럽혀진 일이다.

 

성아무개(43세)라는 개신교 목사(목사란다)라는 자가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산신각의 벽화에 상스런 낙서를 하고 선영을 모셔 놓은 조사전에 들어가 기물에 방뇨까지 했다는 것이다. 지난 8월 20일 성아무개라는 이 인간 말종은 차량 출입 통제가 된 동화사의 대웅전 앞마당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 법당에 있는 불교경전을 찢었다는 것.

 

 

산신각 탱화에 상스런 낙서를

 

30여 분 간 대웅전에서 행패를 부린 후 산신각으로 들어간 이 성아무개(개가 맞는 듯하다)는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 탱화에 상스런 낙서를 한 후, 다시 조사전으로 들어가 그릇과 향로에 소변까지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행패는 CCTV에 그대로 찍혀 동화사 측의 신고로 10여일 만에 경찰에 잡혔다.

 

성아무개는 경찰조사에서 ‘○교회 교단인 대한기독교 모성회의 소속목사로, 지난 200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최근까지 경상도 지역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호 목회를 했다'고 한다. 성아무개는 불교경전에 헛된 것이 적혀있어 훼손을 하고 낙서를 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보물인 동화사 대웅전. 이 안에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무단침입을 하여 불경을 찢고 난동을 피웠다

 

종교모독사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경찰은 "계획적인 것은 아니고 불교에 대한 증오심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신이상 증세가 있다”고 두둔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화사 측에서는 “정신이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최근까지 목회를 하고 운전까지 할 수 있느냐”면서 이것은 심각한 종교모독사건이라고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일부 개신교들의 종교모독 사건은 불교 문화재의 훼손으로 시작해, 종교장소까지 난입하는 횡포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의 광적인 행동들은 이 정부에 들어서 심히 극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산신각에 들어가 탱화에 상스런 낙서를 하고 조사전으로 가서 오줌까지 깔겼다고

 

조계사의 땅밟기를 비롯해, 낙서와 훼불 등이 심각할 정도로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경찰은 ‘현행법상 종교관련 처벌 내용이 없어 추가조사를 벌인 뒤 재물손괴와 건조물침입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라고 했단다. 참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발언인지 모르겠다.

 

보물인 동화사 대웅전에 무단 침입한 것으로 만도 중벌을 받아야

 

팔공산 동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동화사에는 보물 제1505호인 사명당 유정의 진영을 비롯해, 보물 제1607호인 목조여래좌상의 복장물인 화염경 등, 보물 제1610호인 아미타극락회도, 보물 제243호 마애불좌상과 보물 제244호인 비로나자불, 보물 제247호인 비로암 삼층석탑, 보물 254호인 당간지주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자칭 개신교의 목사라는 인간이 산신탱화에 이런 상스런 낙서를 했단다 (자료 출처 /연합뉴스자료 인용)

 

더욱 처음에 들어가서 불경을 찢고 횡포를 부린 대웅전은 보물 제1563호이다. 그런데 단순히 손괴된 책과 탱화, 벽화의 감정서 제출을 요구하며 재물손괴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수사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이번에는 불교계도 그냥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종교모독행위에 대한 단호한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더욱 문화재법을 개정해서라도 문화재에 함부로 난입을 하거나, 문화재 안에서 난동을 피울 경우 가중처벌을 할 수 있는 법 조항을 신설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광적인 작자들이 언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훼파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국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 느끼는 점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란 우리에게 당장은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오랜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하기에 이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에 가면 사벌국의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능이 있다. 이곳을 들어가는 입구에 보면 삼층석탑이 1기가 보인다. 그저 색다를 바 없는 석탑이지만 보물 제1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달리 삼층석탑이다. 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1층의 몸돌이 유난히 큰 삼층석탑

 

전반적으로 비례가 불균형하고 기단부의 일부가 훼손되어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구의 석조여래좌상이 1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나,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화달리 삼층석탑은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진 형태다. 1층의 몸돌은 그 높이가 유난히 높고 커서 기단보다도 큰 형태이다. 지붕돌의 귀퉁이는 처마처럼 위로 솟아 석탑에 날렵함을 불어 넣었다. 석탑의 위에 올리는 상륜부는 아무런 장식도 남아 있지 않다.

 

기단부 위에 올려놓은 목 없는 석불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이 탑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탑의 기단부 위에 놓여 진 목 없는 석불 때문이다. 목이 없는 석불좌상은 얼핏 보아 탑과 같은 석질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일대가 혹 절터였을 것으로도 생각하지만, 아직 정확한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곳이 혹 비사벌 왕릉을 지키는 원찰이 있었던 곳은 아니었을까? 생각은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저 석불이 왜 하필 저곳에 앉아 계신 것일까? 그리고 누가 저렇게 석탑의 기단부 위에 목 없는 부처님을 올려놓은 것일까? 석탑의 기단부도 한쪽이 깨어져 나가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 위에 목이 없는 부처님까지 좌정을 하셨다니. 아마 어떤 재화에 이렇게 훼손이 된 것에 대한 시위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더욱 석탑 기단부의 깨어져 나간 면을 보니 이건 최근에 깨어진 듯 하다.

 

 

 

문화재 보존, 좀 더 적극적이어야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다. 그 문화재의 현실은 한마디로 ‘어렵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모든 국보나 보물을 다 관리를 못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예산이 없고, 인력이 부족하다는 판에 박은 소리들이다. 일 년이면 축제를 한다고, 수억에서 수십억을 사용하는 지자체들도 같은 소리들이다.

 

한 마디로 축제할 예산은 있어도, 문화재를 관리할 예산은 없다는 것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그러다가 보니 산 중에 있는 문화재, 혹은 마을 한편에 아무렇게나 있는 문화재들은 언제든지 손을 탈 수가 있다. 꼭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강구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시일이 조금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다.

 

 

화달리 석탑과, 그 기단 위에 좌정한 목 없는 부처님.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 해야 한다고 입만 벌리면 되뇌는, 우리 문화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언제나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여주 점동면에서 삼합리 쪽으로 가는 길을 들어가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삼합리이다. 이 삼합리에서 충주 앙성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타난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오갑사지 석불좌상>이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이 표지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들어가는지, 거리가 적혀있지가 않다.

 

두 번이나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석불좌상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결국엔 찾지를 못하고 뒤돌아선 적이 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다. 두 번째 답사 길이다. 이번에는 앙성면 사무소를 찾아들어가 오갑사지 석불입상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약도까지 펼쳐 보이며 안내를 한다. 면사무소 직원이 적어주는 주소를 갖고, 번지를 찍어 보았다. 여주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한참을 가니 '동막마을'이라는 석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부터는 '대물낚시터'라는 저수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비게이션이 지난번에 들어왔던 곳을 도착하자, 찾는 곳의 근처에 왔다는 안내를 끝으로 멎어버렸다.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요즈음은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몇 집 되지도 않는 마을이라,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 그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았다. 마침 차가 한 대 나오기에 길을 막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한참 들어가야 한단다.

 

 

 

고개를 넘어 도로 같지도 않은 좁은 길을 들어섰지만, 마을회관이 보이지를 않는다. 차가 지나가면 서로 비켜주어야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재차 묻는다. 한참 가야 한단다. 이러니 내비게이션이 알려줄 수가 없었나보다. 길도 표시되지 않은 곳을 10여분을 가서야 겨우 마을회관을 찾았다.

 

파손이 심한 오갑사지 석불좌상

 

마을회관 집 뒤라고 알려준 대로,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아무 곳에도 석불좌상이 보이지를 않는다. 묶어 놓은 개 두 마리가 무슨 낮도둑이라도 되는 양 짖어댄다. 요즈음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개들하고 한창이나 실랑이를 해야 할 때가 많다. 마침 사람이 나오기에 재차 물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결국 두 번째 답사 길에서, 그것도 몇 바퀴를 돌면서 헤맨 끝에 만난 오갑사지 석불좌상. 한 마디로 너무 많은 훼손이 되어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파손이 되었다고 해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찾아온 여행자가 반갑기라도 한 듯, 석불좌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연꽃 문양을 한 대좌와 석불좌상

 

오갑사지 석불좌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작고 아담한 이 석불좌상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실주의적 기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연화대좌는 밑에 원형으로 받침을 만들고, 8각형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3단으로 조성이 된 대좌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한 면이 있다. 고려 석불에서 나타나는 대좌의 형식이다.

 

 

 

석불좌상은 얼굴과 머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손은 양팔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형태로 남아있어 정확한 수인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법의는 깊게 처리가 되어 있어, 조금은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은 얼굴 표정은 미소를 띠우고 있다. 발은 결가부좌를 해 발가락이 법의 밖으로 삐져나왔으며, 무릎도 파손이 된 것을 떼어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불균형적인 듯하지만, 조각 기법 등은 매우 우수하다.

 

오갑사의 주불상이었을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서는 '명창3년임자(明昌三年壬子)'라고 명문이 새겨진 기와와, '오갑사'라고 쓴 명문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명창 3년인 1192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보존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석불좌상의 뒷면까지 법의를 표현하였고, 다리를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도 조각을 하는 등,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중한 문화재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비록 높은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치는 수도 왕왕 있지만,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찾아나서는 길에 게으름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오갑사지 석불이 아무리 심한 훼손이 되었다고 해도, 그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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