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그 이름으로 만도 가슴이 설렌다. 어릴 적 가장 존경하는 이를 쓰라고 하면 언제나 ‘이순신장군’을 써 오던 나이기 때문이다. 꼭 한번은 가고 싶었던 곳. 10월 14일 한삼섬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한삼섬은 세종 1년인 1418년 삼군도제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 7천 285명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의 대장정에 오른 출전지이기도 하다.

 

1592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행영으로 이곳에 제승당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원균의 참패로 제승당이 소실되었다. 1739년 조경 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을 중건하였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사적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퉁영유람선터미널을 떠나 인근으로 가는 유람선(위)과 한산섬으로 가는 도중 만나는 남해안의 섬들(아래)


 

유람선을 타고 한산섬으로

 

10월 14일 오전 10시 30분. 통영유람선터미널을 출발하여 뱃길로 20여분. 한산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바라다 보이는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한산대첩 기념비가 서 있는 봉우리와 거북등대를 지난다. 이곳은 물이 빠지면 암초가 많이 솟아있다고 한다. 한산대첩은 바로 그런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했다는 것.

 

선착장에 배가 닿자 사람들이 부지런히 걷기 시작한다. 주어진 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둘러볼 것은 둘러보아야지. 바다를 끼고 반원을 그리고 있는 적송이 한편으로 우거진 갈을 걷는다. 호흡을 깊게 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가슴 깊이 바닷내음을 전해준다.

 

매표소인 한산문을 지나 걸어서 5분. 과거 이순신장군이 사용을 했다는 우물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치면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천연기념물 제63호인 팔손이나무가 길 양편에 넓은 잎을 벌리고 손을 맞이한다. 조금 걸어 올라가면 계단 위에 충무문이 있고, 그 안에 이순신장군의 혼이 깃든 많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장군의 충정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승당이다. 제승당은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 간적들의 모함으로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1,491일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제승당을 바라보고 우편에는 그 유명한 장군의 시에 나오는 수루가 서 있다.

 

 

제승당으로 오르는 길에 서 있는 팔손이나무(위)와 제승당(아래)

 

수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산만의 모습이 아름답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얼마나 많은 포화가 터졌던 곳일까? 수루를 내려오다가 보면 좌측에 충무공의 후손들로 통제사와 부사로 부임을 했던 이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240년 ~ 130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제승당의 뒤편으로는 바닷가에 서 있는 한산정이 있다. 한산정은 충무공이 장병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한산정에서 바다를 건너 과녁이 보인다.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 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서 실전거리를 적응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적지 안에 한산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수루(위)와 장군의 후손들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들(아래) 

한산정에서 바라다 본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화살을 쏘는 과녁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시합을 하여 진편에서 술과 떡을 내어 배불리 먹었음을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장군의 탁월한 전술로,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장군의 영정 앞에 서다

 

한산정을 벗어나 충무사로 향한다. 외삼문인 솟을삼문을 지나면 한편에 제승당유허비가 서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타버린 것을, 1739년 제107대 통제사인 조경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유허비를 지나 내삼문을 들어서면, 충무사가 나온다.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향을 한 개비 들어 불을 붙여 꽂고 머리를 숙인다. 왈칵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찾아오고 싶었던 곳이다.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이곳에 섰다. 그저 목석이 된 듯 서 있는데 사람들이 빨리 가야한다고 부산을 떤다. 일행이 없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있고 싶었는데. 그렇게 잠시 장군을 보고 되돌아서야 한다니. 걸음이 떼어지질 않는다.

 

 

배를 타고 한산섬을 떠나오는데 갈매기 떼들이 배를 따르며 난리를 친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느라고. 저 갈매기라면 언제나 그 곳 한산섬을 갈 수 있으련만. 언젠가는 혼자 시간을 내어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 저 갈매기들처럼 자유롭게.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0) - 동북노대와 적대

화성에는 두 곳의 노대가 있다.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으며, 서노대는 가장 높은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북노대는 치 위에 벽돌을 쌓아 대를 조성하였다. 대 아래의 석축은 높이가 13척, 대의 전체 높이는 18척이다. 대의 밑에는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위는 벽돌로 쌓았다. 벽돌을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인다.

노대의 안쪽 너비는 17척 4촌이고, 바깥쪽 너비는 19척이다.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3면에 각각 1타씩이고, 바깥 쪽 2모퉁이에는 둥근 타구를 굽게 접히게 설치하였는데, 모두 방안 3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타구마다 좌우에 凸모양의 여장을 끼고 있다.


가공할 위력의 쇠뇌를 날리는 동북노대

동북노대의 안쪽 두 모퉁이는 평여장으로 굽게 접었는데, 모두 높이 6척 5촌이다. 가운데에 벽돌 계단을 돌계단과 이어지게 하였고,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렇게 대 안을 네모난 벽돌로 깐 이유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쇠뇌란 걸쇠라는 발사체를 유도하는 홈과, 그것을 발사하는 방아쇠를 갖추고 있다. 하기에 쇠뇌는 일반적인 활보다 그 힘이 강하며, 살상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쇠뇌는 비스듬히 적을 공격할 수 있어서 앞에 여장을 놓고도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힘이 있다 하니 그 사정거리도 일반 활에 비해 월등히 멀리 나갔다고 한다.




더욱 다연발로 연달아 활을 적에게 날려 보냄으로 해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쇠뇌를 쏘기 위한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감시와 공격의 효과를 노린 적대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는 북서적대. 정조 19년인 1795년에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있다.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

장안문의 동쪽에는 또 하나의 적대인 북동적대가 있다. 이렇게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적대 안에는 홍이포가 놓여 있다.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대포의 명칭을 홍이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영조 때 홍이포가 주조되었다는 사실은,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안문 양편에 조성한 적대는 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다. 포루와 치성은 성곽 밖으로 완전히 돌출된 반면, 이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되어 있다.

장안문 양편에 적대를 조성한 까닭은?

왜 적대 두 곳을 북문인 장안문의 양편에 설치한 것일까? 북문의 명칭을 장안문이라 붙인 것은 이산 정조의 남다른 뜻이 있었다. 장안이란 도성을 의미한다. 정조는 화성을 거점으로 하여 북진정책을 펴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북진정책을 하기 위해서는 북문의 역할이 남다르다.


즉 만일에 북진정책으로 인해 적과 교전이 붙을 경우,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북문인 장안문이 된다. 그 장안문을 보호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기에 장안문의 양편에 적대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조성한 두 곳의 적대. 그곳에는 정조 이산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인다.

어른들과 어린이들 모두 하나가 되어 활 시위를 당긴다. 활을 떠난 화살이 30m 앞에 놓인 곰두리 표적을 향해 날아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함성을 지른다. 누구의 화살이 과녁을 맞춘 것인지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쏜 화살이 맞았다고 즐거워 한다. 

11월 27일 오후. 수원에 소재한 사적이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동장대인 연무대 앞에는 국궁체험장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국궁체험을 즐기기 위해서이가. 하절기에는 오후 5시 30분까지, 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까지 활을 쏜다. 30분에 한 번씩 사대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즐겁게 국궁체험을 하는 것이다.





각궁은 고려 때부터 사용

우리가 일반적으로 국궁이라 부르는 각궁은, 삼국시대의 맥궁에서 기원하였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활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각궁이 언제부터 널리 보급되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다만 함흥 선원전에 보면 태조 이성계가 사용하던 각궁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여, 이미 고려 때부터 각궁을 사용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각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전통적인 활인 각궁은 참나무, 산뽕나무, 물소뿔과 소의 힘줄, 대나무 등을 이용하여 만든 복합단궁의 형태이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10여 종 이상의 활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각궁 한 종류 뿐이다. 하기에 우리가 국궁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각궁을 일컫는 말이다.




안내를 따라 쏘아보는 국궁

사대에 오른 체험을 하는 관광객들은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나란히 선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라 활과 화살을 들고 과녁을 향한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날아간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국궁체험은 사용료가 10발에 2,000원이며 두 번을 쏠 수 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다. 설명을 듣고도 따라하기가 힘든가 보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국궁체험을 하는 김아무개(남, 42세. 서을)는 10발을 다 쏘고 난 후





"정말 뜻 깊은 체험입니다. 이렇게 화성 안에서 활을 쏘니 정조대왕 때 장용위 군사라도 된 기분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홍보를 많이 해야겠네요" 라고 한다.

부모님들과 함께 왔다는 양모군(남, 11세. 초등학생)은

"정말 재미있어요. 우리 활을 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라고 하면서 즐거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화성의 국궁체험.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국궁체험장으로 몰려들 것이란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성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이 국궁체험을 할 수 있도록 통역관을 배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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