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고성군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 제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이라 했으며, 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 폭 그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이라 했다.

 

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로 정했다.

 

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이라 했으며, 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 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단 곳으로 밝혀졌다.

 

 

매년 새해의 첫날인 11일이 되면 동해안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동해인은 가장 북쪽인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부터 시작하여 속초, 양양, 강릉, 삼척 등과 경북 울진, 경주 문무대왕 수중릉과 감포, 영남 주상절리 등 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렇게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모여드는 것은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고 마음에 담아 둔 염원을 기원하면 이룰 수 있다는 무속적 사고에서 기인하지만 그보다는 새해 첫 번째 뜨는 해를 바라보면서 일 년의 안녕과 건강을 발원하고 새로운 마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밤길을 달려 동해안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다 같기 때문이다.

 

고성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가 간성군에 속해있는 호수였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의지행부록(地行附錄)동계조에 보면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여은포라고도 불렀으며 현 봉포리와 용촌리 사이에 있는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1231일이 되면 고성군 화진포 일대는 일출을 보기위해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아마 깨끗한 동해인의 물에서 떠오르는 헤를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동해인 일출을 보기위해 먼 길을 달려가기 힘들에 생겼다. 그동안 동해인 곳곳을 다니면서 일출을 보아왔기 때문에 회진포 일출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다. 경자년 11일이 죄기 전 화진포 일출을 보기위해 모여든 사람들 무리를 보는 것으로 화진포 일출의 모습을 가늠하기 바란다.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시인묵객들이 찬한 화진포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고성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가 간성군에 속해있는 호수였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의지행부록(地行附錄)동계조에 보면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여은포라고도 불렀으며 현 봉포리와 용촌리 사이에 있는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기록하고 있다.

 

이 화진포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서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금구도는 광개토왕의 무덤일까?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왕은, 이름은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일려졌다.

 

이 곳은 신라시대 수군 기지로 해안을 지키던 흔적인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섬의 중심부에서, 19974월 와편과 주춧돌이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200810월에는 현장조사와 함께 2달간의 조사에서는, 건물지 및 우물지 고려시대 청자 유물 등이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왕 3년인 304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다만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들은, 왜 광개토왕이 사망을 한지 2년이 지난 후에 이곳에 안장을 했을까? 초도(草島)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가 혹 초분(草墳)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구도라는 명칭도 왕(=今上)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하는 금구(金丘), 금구(金柩)는 아니었을까? 등 많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에 세운 안내판을 보니, 고성군에서는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확인될 경우 원형복원을 하겠다고 적고 있다.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민족의 웅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 이글은 고성문화원 김광섭 향토사학자님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였습니다. 김광섭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5일 서둘러 길을 나섰다. 2013년의 첫 답사지역을 일부러 강원도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정했다. 이곳에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이기에,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다. 5일 저녁 무렵 심하게 바람이 분다. 옷깃을 아무리 여미어도 살을 에일 듯 파고드는 바람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119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금강산 법보정사(주지 진관스님)라는 인법당을 모신 암자였다. 인법당이란 법당과 살림살이를 하는 요사가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작은 법당을 말한다. 이곳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준 아기장수 이야기

 

법보정사가 있는 뒤편 산을 노인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바위가 영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다해서 노인산(老人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에 옛 절터라는 곳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 절터에도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는 것.

 

 

 

마침 법보정사에는 이 마을에 사신다는 신도 한 분이 와 계셨다. 박기선(, 70) 할머니는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법보정사 건너 편 앞에 옛날에 절이 있었데요. 그곳을 마을에서는 절터라고 불러요. 그 절에서 자식이 없는 한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려 아이를 하나 점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양편 어깨 밑에 날개가 있었데요, 나중에 크면 큰 인물이 될 아이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장수가 나면 바로 죽여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아기장수의 아버지가 날개를 인두로 지져버렸다고 하네요. 아이가 뜨거우나 당연히 온 동네가 떠날 듯 울어 젖혔겠죠. 그때 화진포 바닷물 속에서 천마가 한 마리 튀어나오더니, 아기장수를 태우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 절이 퇴락해 버렸단다. 그리고 한 3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기도생활을 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들 있지 못하고 자주 떠났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절이 있는 인근의 지기가 상당히 세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전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법보정사 뒤편에 보면 산신각 터라고 시멘으로 조성을 해 놓은 곳이 있어요. 그 뒤로는 쪼개진 바위덩어리가 있고요. 이 마을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곳을 올라가면 괜히 넘어지고는 한답니다. 그래서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질 않아요.”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보고 그 뒤편 노인봉과 일직선으로 자리한 산신각 터를 돌아본다. 이곳에 옛날에 산신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세를 보아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노인봉을 배산으로 하고 지어진 산신각. 그 산신각이 바라다보는 곳은 동해안 화진포 방향에 솟아있는 고성산이라고 부른다.

 

 

날개를 가진 아기장수가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현내면 산학리. 이곳은 금강산으로 왕래를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던 곳이다. 이 산학리 논 자락에 서 있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와 불망비 1석이 있어,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소나무와 불망비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전설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곳 노인봉 아래 옛 절터와 산신각터,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는 아기장수 이야기 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할 것만 같아 쉽게 길을 떠나지 못한다. 숨은 이야기들은 늘 신비롭기 때문이지만.

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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