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 기단석과 유수 서유린 선정비 등에 성혈 보여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 놓았는데, 그 파인 형태적 차이에 따라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 부른다. 성혈은 단단한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홈을 말한다.

 

성혈을 학자 중에는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성혈에 대한 정설은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학자는 성혈을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으로 보기도 한다. 성혈은 그 새겨진 장소나 위치에 따라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 등을 기원하고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지석묘나 선돌 등에 새겨진 성혈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성혈은 죽은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망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새겨졌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큰 바위나 남성의 성기(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를 닮은 바위에도 성혈이 보인다. 이는 자손을 바라는 염원에서 새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기에 성혈을 선사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 연관 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산속 바위에도 성혈이 새겨진 것을 보면 성혈은 그 새겨진 위치에 따라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즉 성혈은 선사시대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근세에도 새겨졌기 때문에, 성혈은 자신의 간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형성한 염원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원에서 만날 수 있는 성혈은 무슨 용도였을까?

 

그동안 수원에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면서 찾아본 성혈은 수원화성의 장안문 기단석과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서 있는 선정비 군 중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석, 그리고 수원화성 축성 시 성돌을 떠낸 여기산에서 발견된 바위 위에 새겨진 성혈 등이다. 이중 가장 많은 성혈은 장안문 기단석에 새겨진 성혈이다.

 

20일 오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장안문. 장안문 성안 화단에 잔디를 정리하느라 막을 치고 한창 잔디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 중에 방해가 될까봐 얼른 안으로 들어가 사진 몇 장을 촬영한다. 장안문 기단석의 성혈은 그동안 몇 번이고 촬영을 한 자료가 있지만 답사를 할 때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나로서는 당일 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1794228,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정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안문의 성문 안쪽을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장안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키고 작은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장안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 있고, 그 이름이 장안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장안문에 성혈을 갈아내면서 자손들이 한양으로 입성해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자손들이 정조의 효를 본받기 위해서 성혈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효심 가득한 자손을 낳게 해 달라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조성했을 수도 있다.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도 성혈 파놓아

 

이렇게 수원화성 장안문이나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도 성혈을 조성한 것을 보면 성혈은 선사시대의 각종 기원속(祈願俗)신앙에서 유래된 습속으로 근세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이다. 교리 효수의 아들로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1831년에 건립되었다.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유수 서유린은 화성유수를 지내면서 정조에게 많은 건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이와같이 화성 유수시절 많은 업적을 쌓은 서유린의 선정비에 성혈을 판 것은 선정에 대한 감사와 그와 같이 충신이 태어날 것을 간구하기 위해 조성한 성혈로 볼 수 있다. 20일 한창 무더울 시간 찾아간 장안문과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 새겨진 성혈. 그 성혈의 의미는 지역학자들의 연구로 정확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 교리 효수의 아들이다.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선 선정비

 

선정비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베푼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 혹은 불망비라고 부른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에 소재한 수원화성박물관 경내에는 10여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리 선정비는 중동 사거리를 비롯한 수원시내 곳곳에 서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리 선정비를 보면 이상한 비가 하나 서 있다. 바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이다. 1831년에 건립된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성혈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자신이 서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파놓은 기원성 표시라고 한다. 성혈은 커다란 바위나 선돌 등 다양한 곳에 나타나고 있다.

 

수원의 대문격인 장안문의 기단석에도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아마도 한양으로 향하는 관문인 장안문에 성혈을 파는 것으로 많은 기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왜 유독 많은 선정비 중에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만 많은 성혈을 판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서유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정조와의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서유린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수원부사를 유수 겸 장용외사 행궁정리사로 겸직을 시키고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한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죄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를 한다. 용인과 진위, 안산은 화성에 속읍으로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화성 장용외영에 속해 있고 세금도 화성유수부로 납입됐다. 하지만 시흥과 과천은 총융청에 속해 있어 모든 세금을 총융청이 다스리는 남양부로 세금을 내야 했다.

 

 

지금의 화성시 남양동이 당시는 남양도호부라고 하는 화성유수부로부터 독립된 지방 고을이었다. 정조는 상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총융청의 병사들을 서유린의 주청에 의해 화성유수부로 편입을 시킨다. 이로써 화성 인근 5읍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이 화성유수부에 속하면서 이곳에 있는 부대 역시 장용외영으로 모두 속하게 됐다.

 

특히 용인과 진위, 안산의 3읍 협수군 12, 새로 이속된 시흥, 과천 속오군 5, 안산과 시흥 장초군 2, 용인, 진위, 안산 수어아병 8초 등, 도합 27초 병력을 확보해 기존의 화성유수부의 25초와 합쳐져 42초로 조선 최대의 정예부대가 됐다. 당시는 군제는 1초에 125명으로 이뤄졌으니 화성을 지키는 군사가 무려 5,250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를 하고자 화성 행궁으로 행어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부른다. 정조는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서유린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조는 화성을 만든 목적을 설명한다.

 

정조는 농업의 활성화 등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환궁을 한 정조는 28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 유수인 서유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벽파의 눈에는 가시 같았을 서유린

 

이 외에도 사초에는 서유린과 정조의 대화가 상당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서유린이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등극을 하자 벽파에 의해 귀향길에 올랐다. 화성유수는 정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벽파의 눈에는 서유린이 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00년 정조가 화성 행궁에서 환궁을 한 뒤 세상을 뜨자, 순조 2년인 1802년 집권 벽파는 시파의 군사기반인 장용영 외영의 군제를 없애고, 대신 규모가 훨씬 축소된 총리영을 둔다. 이로써 정조와 함께 강한 국권의 상징인 장용외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유린의 선정비에 많은 성혈이 있음은 결코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정조의 측근이었던 윤행임 등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시파의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로 간택이 되자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반대했던 권유, 김노충 등 벽파 쪽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켰다. 이로 인해 1807년 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지방으로 흩어져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화성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딴 비가 유수를 마친 이듬해나 수년 내에 조성을 한데 비해,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선정비를 세운 것도 벽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 무수히 새겨진 성혈. 사람들은 서유린의 선정비를 세우고 정조가 드나들던 장안문에 많은 성혈을 판 것처럼, 정조가 운명을 할 때까지 화성유수로서 선정을 베푼 화성유수 서유린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성혈을 판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무수히 많은 성혈을 그에 비 받침돌에 새기면서 화성유수 서유린의 충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백성을 사랑한 정조와 그에게 신임을 받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서유린의 마음을 기억해 내고자 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말없는 선정비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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