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생부에 의해 ‘뒤주’속에서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어 ‘뒤주세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250년 세월, 그렇게 슬픈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었던 ‘사도세자’기 250년 만에 <장조황제>가 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 기획전시실에서는 6월 1일부터 7월 1일까지 수원화성박물관과 용주사효행박물관 공동으로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를 열고 있다. 전시는 크게 4가지 테마로 되어있는데, 생애와 활동, 가족, 원찰 용주사 창건, 그리고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으로 꾸며져 있다.

 

 

2세에 왕세자가 된 선

 

사도세자(1735~1762)는 창경궁의 집복헌에서 조선조 제21대 임금인 영조와 영빈이씨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영조가 첫 번째 얻은 아들인 효정세자를 잃고 난 뒤, 4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왕자여서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다. 아마도 그 사랑과 기대가 너무 큰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한 설치벽면을 커다랗게 장식하고 있는 국보 제249호인 동궐도(고려대학교박물관)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동궐’은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호칭한 것이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전체 구조와 배치, 주변의 자연환경 등을 16책의 화첩에 나누어 제작한 궁궐도이다. 이곳 창경궁 집복헌에서 사도세자가 태어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지냈다.

 

 국보인 동궐도. 붉은 원안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집복헌이다


사도세자는 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세자 수업을 받았다. 15세 때에는 이미 부왕인 영조를 대신하여 정사에 임하였으나, 176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와 활동이 전시공간에는 13년 동안 왕세자 수업을 거쳐, 대리청정에 임해 대소신료들과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736년 3월 15일 장조의 왕세자 책봉시 반포한 글을 새긴 ‘장조왕세자 책봉 죽책’이다. 제술관은 윤순이고 시사관은 김취로이다. 죽책은 모두 6폭인데 1폭 당 죽책 5간 씩을 엮어 제작하였으며, 총 30개의 죽간 중에서 28개의 죽간에 글을 새겼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전략) 아 너 원자 선이여 내가 다행히도 늦게 너를 낳았는데 하늘이 꼬 남다른 자질을 주었다. 품 안에 있을 때부터 지각과 사려가 먼저 트여 말은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처럼 의젓하였으며, 자세히 보면 기국과 도량이 현저하여 훌륭한 덕을 갖출 조짐이 뚜렷하였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침착하기가 남다르니, 자라서는 총명하고 어질며 효성스러우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삼종(효종, 현종, 숙종)을 계승할 수 있을 것 같아 십년 동안 깊은 밤까지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팔도의 백성이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니 조정 관원 모두가 세자 책봉의 경사를 기뻐한다.(하략)」

 

‘폐세자반교’에 얽힌 내용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총명하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소신료들과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왕제의 덕목을 갖춘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열 살 무렵부터 사도세자는 책읽기를 싫어하고 말타기나 활쏘기 등을 더 좋아하였다. 그리고는 살이 쪄 몸이 비대해졌다.

 

1749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영조실록』에는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자에게 병이 생겨 본성을 잃었다고 했다. 이 본성을 잃었다는 병은 곧 광증인 정신병을 말한다. 그리고 발작을 하면 살인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히고 만다.

 

 대리청정시 사도세자가 내린 교지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한다는 ‘페세자반교’의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는 광증이 있었고, 병이 깊어지면서 아랫사람 100여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생모인 영빈이씨까지 죽이려했고, 마침내 영조까지 죽이려하다가 영조의 처분을 받아 죽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자가 내관,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또 장번 내관은 내 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 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 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생모인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아뢴 말이다. 창덕궁으로 사도세자를 찾아 갔을 때 영빈 이씨는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결국 사도세자는 폐세자가 된 후 죽음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원찰 용주사 상량문과 불설부모은중경 동판


고종 때 황제로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다

 

아마도 이런 폐세자를 실행하게 된 것은 그만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죽책의 내용을 보면 영조가 장조 왕세자에게 건 기대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기대가 결국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을까?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 가족과 원찰 용주사 창건을 지나, 마지막 테마인 ‘왕세자에서 황제로의 추숭’ 편을 돌아본다.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을 하여 왕위를 계승한다. 왕위에 즉위한 정조는 바로 부친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추상하면서 생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존호의 추상 뿐 아니라 궁묘의 정비와 능원의 조성 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정조의 ‘효(孝)’는 지극하였다.

 

 

 

이런 와중에 정조 16년인 1792년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한 영남만인소는 정조를 한껏 고무시켰고, 이러한 추숭과 현창사업은 후대 왕들에게로 이어졌다. 그 결과 고종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는 왕세자에서 왕위를 거쳐 황제위까지 추존되어 명예를 되찾았다.

 

 

 

250년 만에 뒤주에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사도세자.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만날 수가 있다. 무예와 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사도세자. ‘능허관만고’라는 문집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세자가, 광증이 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늘 사도세자를 만나 직접 그 이유를 들어보기를 권한다.

‘아리수’의 ‘아리’는 아리랑을 말한다. 그리고 ‘수(樹)’는 나무이다. ‘아리랑나무’라는 뜻을 가진 아리수는, 아리랑을 뿌리삼아 한국음악을 꽃피우는 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로 태동이 되었다. 아리수는 토속민요 발굴과 보급에 앞장섰던, 1984년 창립된 단체인 ‘민요연구회’의 맥을 이어 2005년에 창단이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2007년도에 발행한 제1집 음반인 ‘아리랑 나무를 심다’와, 2010년 제2집 ‘아리랑 나무에 꽃피다’를 제작하여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민요가 이 시대에 삶을 노래하고, 상생의 음악이기를 꿈꾸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여성민요그룹 ‘아리수’. 년간 약 80여회의 공연을 하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리단체이다.

 

 

 

속요는 민초들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소리

 

우리가 흔히 ‘속요’라고 하는 소리는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전승방법에 의해서 전해진다. 현장에서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소리이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속요는 정형화되지 않은 소리를 말한다. 그런 소리를 정형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아리수’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속요는 작업의 현장이나 창자가 다르면, 그때마다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따라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속요를 정형화시킨 민요는 누구나 같은 사설, 같은 음으로 부를 수 있어 전승이 수월하다.

 

 

 

지난 해부터 경기문화재단의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원 소재 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던 아리수는 올해 2년차 상주단체로 지정이 되었다. 아리수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이들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접목을 시도하며 늘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키는 아리수의 공연

 

아리수는 2005년에 창단하였다.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천차만별콘서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0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하고,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지정이 되었다. 2011년에는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9~2012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수원화성박물관 상설공연 ‘국악꽃피다’ 기획, 주관하여 16회의 공연을 가졌다.

 

 

 

 

수원 화성 박물관 상설공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은 ‘국악 꽃피다’는 2009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국악 꽃피다는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수원 화성박물관과 (사)아리수가 기획 주관하는 상설공연이다. 아리수는 이 공연을 하면서 상주단체 아리수의 신규 프로그램 개발 및 공연프로그램의 다양화를 꾀하고 민요의 대중화에 기여함은 물론, 공연장의 활성화와 관객개발. 수원화성박물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올 12월 21 ~ 23일에는 정조와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한 소리극 ‘팔달전’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2012년 한 해 여성민요그룹 아리수는 단독기획공연인 소리극 팔달전과 해설이 있는 민요 콘서트 ‘아리랑 톡톡’과, 아리수 콘서트 ‘가·무·악’을 선보인다.

 

 

 

또한 공동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는 ‘국악 꽃피다’와 ‘색소폰 성벽을 울리다’, 직장인 록 밴드 공연 등도 준비하고 있다. 2012년 여성민요그룹인 (사)아리수의 더 많은 공연을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