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필의 말, 각양각색의 옷으로 치장한 1,800여 명의 사람들. 화성문화제의 꽃은 역시 능행차를 재현한 거리행진이었다. 공설운동장을 출발해 장안문을 거쳐 팔달문까지의 거리에는 구경꾼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매년 능행차 연시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화성문화제에서 이루어지는 능행차 연시는, 조선 22대 왕 정조가 어머니 경의왕후( 敬懿王后 : 혜경궁 홍씨 )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또는 화성행차도(華城行次圖)를 재현한 것이다.

 

 

이 기록은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잔치 내용을 치밀하게 기록한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김홍도의 책임아래 최득현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허식 등의 자비대령화원들이 제작한 목판화가 남아 있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식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써 행사에 참여한 문무백관이 임무와 품계에 따라 늘어서는 차례를 기록한 도표를 가리키며 반열도 또는 노부도라고도 부른다.

 

늘어선 행렬이 장관이었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정조대왕의 능행차 시연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거리에 늘어선 사람들마다 환호성을 울리는 것은, 200여 년 전에 이토록 화려한 행렬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종합 운동장을 떠난 능행차 일행은 장안문에서 화성유수로 분한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 그리고 시의원 등의 영접을 받는다. 그 뒤로는 어머니인 경의왕후와 누이동생인 공주들. 그리고 정조의 시위무사들인 자용외영의 군사들과, 취타대 등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한 일행 등이 뒤를 따랐다.

 

 

예전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대동하고 화성 행궁으로 들어 온 정조대왕은 정말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렇게 화려한 행군을 보면서도 가슴이 설레는데, 200여 년 전에는 정말 대단한 행군이었을 것 같아요. 오늘 우리 수원이 정말 대단한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장안문 위에서 지나가는 행렬을 보고 있던 시민 정아무개(, 44)씨는 연신 감탄을 하면서 박수를 친다.

 

시민퍼레이드도 뒤따라

 

따듯한 복지도시 등 수원을 상징하는 문구와 각 주민센터에서 내 놓은 문구를 적은 깃발이 시민퍼레이드의 맨 앞장을 섰다. 언제나 시민퍼레이드를 느끼는 것은 이런 장관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수원은 역시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고 극구 칭찬하는 한 블로거는 능행차 연시와 시민퍼레이드를 다 관람한 후 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였다.

 

 

시민퍼레이드는 화성에서 춤추다라는 제목을 달고 시작하였다. 시민, 대학생, 기업, 시장상인들, 해외관광체험단까지 총 50개 팀 2천여 명이 참가한 시민퍼레이드는 길가에 운집한 군중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정말 대단합니다. 능행차 연시가 장관이라면, 시민퍼레이드는 재미를 주네요. 화성문화제는 전국 최고의 문화제입니다. 어느 도시에서 이렇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를 하는 퍼레이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이기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수원이 하면 전 나라가 따라하지 않습니까? 생태교통, 화성문화제 이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도시는 우리 수원밖에 없습니다.”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갖는다는 한 시민은 박수를 얼마나 열심히 쳤는지 손바닥이 벌겋다고 보여준다. 수원시 22개 전통시장들의 연합회의 행진이 지나간다. 보부상 차림을 한 상인회장들이 이것저것 전통시장의 상징인 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시장상인연합회가 다가오자 장안문 앞에 모여 있던 일부 시민들이 달려든다. 매년 이렇게 장안문 앞에서 이것저것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2시간 여 동안 감동과 재미를 준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와 시민퍼레이드. 맨 마지막에는 생태교통에서 선보인 탈거리들을 탄 외국인들과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화성열차에 탄 외국인들과 전기차를 탄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회장이 시민들에게 인사를 했다. 장엄함의 극치인 정조대왕의 능행차 연시는, 수원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 시민은 이야기를 한다.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이 몇 개소가 자리를 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는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년 6월 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를 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로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독립된 축조물 봉돈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이 된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서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보이는 숫자와는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피운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햇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화성문화제 봉수의식 거행

 

제50회 화성문화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의식이었을까? 화성문화제 첫말 첫 행사로 봉돈에서 봉수의식이 거행되었다. 봉수의식은 장용영의 군사들이 ‘장용군사명’의 기를 들고 봉돈에 도착한 후, 군령에 따라 진행이 되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화병(火兵)들이 화두에 횃불로 불을 붙였다. 화구 안에 쌓인 나무에 불티 붙어 연기가 오르게 되어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불을 붙여서 그런지 연기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성문화제의 한 행사로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비록 연기가 많이 나지 않아 봉수의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불만을 토하고는 했지만, 봉수의식은 그 나름대로 의미부여를 할만하다. 화성을 지키기 위해 불을 피워 신호를 하던 봉수의식. 또 다른 볼거리였다.

 

수원천에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나타났다. 수원천 천변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물길로 어가행렬이 지나간다. 앞에는 취타대를 앞세우고, 그 뒤에 말을 탄 호위대장과 궁녀, 그리고 대왕의 어가행렬이 따른다. 그 뒤로는 궁녀를 앞세운 혜경궁 홍씨의 가마가 따른다. 화성문화제에서 선보일 ‘수원사랑 등불축제’의 모습이다.

 

역사도시이자 개혁도시인 수원은 행정의 가치를 사람중심에 두며,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시티이다. ‘생태교통 2013’의 세계적인 축제가 막바지로 치댔으면서 25일은 ‘마을만들기 주간과 26일 전국마을만들기 대회’가 열리고, 27일에는 ‘제50주년 수원화성문화제’가 시작을 한다. 이러한 모든 축제가 함께 자리를 하는 것이다.

 

 

수원천을 밝힐 등불축제 기대한다.

 

‘수원사랑 등불축제’는 나눔과 소통이 있는 도시, 복지행정의 참여로 모든 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 튼튼한 경제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도시, 청렴한 행정과 유비쿼터스 기반 조성으로 신뢰받는 첨단 도시인 수원의 오늘과 미래를 꿈꾸는 모습을 등불로 표현한 것이다.

 

217년 전 정조대왕은 개혁정신과 당대 과학의 힘을 집대성하여,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성을 축조했다. 이 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으며, 사적 제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사상의 산물이다. 강한 국권을 지향하던 정조대왕은, 가장 강한 군대인 장용외영의 무사들을 훈련시켜 이 화성을 지키게 만들었다.

 

 

선조들의 자연관과 통치 이념, 예술과 어우러진 과학, 경제의 중심이 된 상권조성 등 수원천을 중심으로 쌓은 화성과, 정조대왕의 사상을 등불로 형상화하여 보여줄 수원사랑 등불축제. 200년 이상을 지켜 온 수원의 사상과 효를 표현하고자 애를 쓴 것이다.

 

모두 네 가지 테마로 구분

 

등불로 이야기하는 수원 화성의 역사는 네 가지의 테마로 구분되어 있다.

테마 1 ; 정조대왕 능 행차

테마 2 : 마상무예

테마 3 : 화성의 생활

테마 4 : 휴먼시티 수원이다.

 

매향교에서 남수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조성한 형상화한 등불은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가마를 선두로, 뒤에는 말을 타고 월도를 휘두르며 기개 있게 말을 달리는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네를 타는 여인, 물레를 돌리는 아낙네, 가야금을 타는 모습을 감상하는 선비, 수원천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팽이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남수문 가까이에는 현대를 상징하는 휴먼시티 수원이다. ‘사람이 반가운 휴먼시티 수원’과 수원청개구리, 광교산을 뛰노는 다람쥐, 그리고 생태교통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한국의 등 전시와 소원 등의 터널, 빛의 터널도 마련된다고 한다.

 

화성문화제 때 선보일 이 수원사랑 등불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원천변 길을 걷던 한 시민은

“우리 수원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번 화성문화제는 5일간이나 열리고, 생태교통까지 함께 마무리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방문할 것 같습니다. 수원시민 모두가 이런 대단한 축제에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으면 합니다.”라고 한다.

 

수원천을 밝힐 수원사랑 등불축제. 제50주년 수원 화성문화제의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산 정조는 화성을 축성할 때, 직접 화성축성 장소까지 행차를 하기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면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에 참배를 한 후 8일간의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 ‘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에 불을 밝힌 모습이다.

 

 

 

이산 정조의 꿈인 야조

 

정조는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명,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명,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명,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명,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더욱 장용영의 군사들은 가장 무예가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면, 그 훈련을 보면서 누구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훈련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야간 군사훈련

 

제49회 화성문화제의 둘째 날인 10월 8일. 오후 8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화성, 정조의 꿈 야조’는 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단의 숨소리와 마상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장용영 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보다 시연장을 더 넓혔다. 관객들은 도로건너 연무대 앞에 자리를 틀었고, 시연은 창룡문 앞 잔디광장 일원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올해 야조를 기대한 것은, 정조 당시 그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인지. 한 마디로 올해 야조는, 전혀 야조답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넓고 크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 등은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인 야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곳에는 정조의 꿈은 없었다. 그저 화려하게 포장된 그야말로 ‘총체공연’인 공연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처음 20여분 동안 무예24기 시범단의 모습은 늘 보던 대로였다. 늘 보아오지만 창, 검, 봉 등 <무예도보통지>에 보이는 무술과 마상재 등을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지만. 문제는 정조가 이곳으로 행차를 한 후이다.

 

야간군사훈련의 의미도 해석되지 않은 야조

 

그런 데로 연희가 시작되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창룡문을 화면을 삼아 스크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날고, 말을 탄 군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행기가 폭격을 하고 난리법석을 떤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징한 듯하다. 관람객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문에서 쏟아져 나온 무희들이, 창룡문 문루에서 떨어져 내린 긴 천을 끌어다 놓더니, 변형된 도살풀이를 추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넋이라도 달래 보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이때쯤엔 이미 ‘야조는 물 건너갔다.’라는 느낌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야간군사 훈련이 행해진다. 성문으로 쏟아져 나온 장용영의 군사들과 적들이 서로 진을 형성한다. 그리고는 ‘학익진을 펼쳐라’라는 호령과 함께 양편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성문 양편에서 발사가 되는 신기전은 폭죽에 불과했다. 신기전의 위엄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진배없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거기에는 장용영의 힘도, 정조의 꿈도 없었다. 결국은 이 마무리도 무예24기 시범단이 그나마 분위기를 살려주었을 뿐이다.

 

마지막은 더욱 가관이었다. 정조가 훈련에서 승리를 한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연희를 베풀라’고 명령을 했는데, 신칼을 든 무용수들이 나와 난리를 친다. 신칼은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추었다는 춤이다.

 

한 마디로 실망스런 야조였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진 야조는, 그렇게 허무함만 남기고 끝났다. 수원에는 화성이나 야조, 무예 24기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분들이 많다. 적어도 이렇게 광대한 무대를 사용할만한 야조를 생각했다면, 연결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물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해야만 했다.

 

 

실망만 가득안고 돌아서는데 야조를 늘 보아왔다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수원시민을 배제한 야조는 있을 수 없다. 수원시민들은 정조의 꿈에 당연히 동참을 해야 한다. 지난해에도 횃불을 들고 행사장에 참여를 해, 우리들의 행사라는 긍지를 가졌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서울사람들에게 퍼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수원시민들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연결도 안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 이런 야조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조대왕의 꿈을 찾을 것인가? 행사를 주관한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들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2013년은 수원화성문화제가 50회를 맞이한다. 제발 그 50회 야조에서는 진정한 정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야조를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화성이 갑자기 황토색 물감을 칠한 듯하다. 사람들은 짚신을 신고 화성 안 여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은 또 처음이다. 마치 긴 황토색 천을 여장을 따라 늘어놓은 듯하다. 그 긴 황토색의 물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을하늘과 성벽, 그리고 소나무와 사람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만 같다.

 

제49회 수원화성문화제 셋째 날, 화성 동문인 창룡문 앞에는 1,500여명의 황토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발에는 모두 짚신이 신겨져 있다. ‘짚신 신고 수원 화성걷기’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기 때문이다. 가족 단위로 참가를 한 사람들은 옷과 짚신을 받아들고, 옷을 갈아입고 짚신을 신느라 야단법석이다.

 

 

 

가족들, 연인들이 참가를 한 짚신신고 걷기

 

오후 1시 30분에 창룡문을 출발한 참가자들은 방화수류정 - 장안문(화성 북문) - 화서문(화성 서문) - 서장대를 거쳐 행궁 앞까지를 돌아오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행사에 참가를 한 수원시 지동 표영섭 자치위원장은

 

“지난해에 이어 참가를 했다. 이런 행사를 일 년에 한번만 한다는 것이 아쉽다.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걸으면, 따듯한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가급적이면 분기별로 한 번씩 이런 행사를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고 한다.

 

 

 

참가를 한 사람들은 염상덕 수원문화원장의 ‘출발’ 신호와 함께 풍물패의 인도로 길을 떠났지만, 성급한 사람들은 그보다 앞서 먼저 화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연인과 함께 용인에서 왔다는 권아무개(남, 31세)는

 

“휴일을 맞아 화성에 놀러왔다가 짚신 신고 걷기라는 말에 참가 신청을 했습니다. 이런 기발한 발상을 했다니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냥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짚신을 신고 돌아볼 수 있다니, 정말 오늘의 이 행사를 평생 못 잊을 것만 같습니다. 내년에는 아이를 낳아 함께 돌아야겠네요.” 라며 걸음을 재촉한다.

 

 

 

 

푸짐한 경품까지 곁들여

 

사람들을 따라 함께 걷기 시작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걷는 화성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안양에서 친구끼리 참가를 했다는 김아무개(여, 42세)는

 

“얼마나 좋아요. 가을하늘과 바람, 그리고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떨면서 걷는 화성. 참 수원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걷는다는 것도 가슴 뿌듯한 일인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이보다 큰 행복은 없을 듯하네요.” 라며 걸음을 재촉한다.

 

 

 

짚신 신고 화성을 돌아본 참가자들은 오후 5시 30분 화성 행궁 앞에 모여 푸짐한 경품잔치까지 벌였다. 경품잔치에는 배역을 맡은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까지 함께 해 경품추천을 하는 등 재미를 더했다.

 

‘짚신신고 수원화성걷기’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한 가운데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행사를 마친 사람들은 행궁 공방 길로 몰려들어, 공방에서 차려 놓은 좌판에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 가을하늘과 화성을 즐기며 짚신을 신고 화성을 걸어 온 사람들. 많은 사람들은 그 재미를 평생 못 잊을 것 같다며, 내년에도 또 참가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내년 제50회 수원화성문화제가 기다려진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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