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1, ()한국문화유산연구원(원장 박상국)에서는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요리)에서 긴급 학술자문회의와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이날 향남2지구 발굴지역의 현장설명회는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H지점) 발굴 문화재의 현장설명회이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이 현재까지 조사 결과 미리 흑이나 돌로 봉분과 같은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양식인 분구묘 1기와, 덧널무덤인 목곽묘 1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조사가 진행 중인 목곽묘를 중심으로 공개했다.

 

 

덧널무덤인 목곽묘에서는 금으로 만든 모자인 금동관모와 금동으로 만든 신발인 금동식리’, 금으로 만든 귀고리인 금제이식과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 칼인 환두대도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인 등자와 재갈을 비롯한 마구류, 화살을 휴대하기 위해 담는 통인 성시구 등 다양한 유물이 부장되었다.

 

특히, 내부에서 꺾쇠와 관못이 정연하게 확인되어 목곽 내부에 안치했던 목관(木棺)의 결구(結構)와 제작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백제 때 주요 거점지역으로 추정돼

 

이번에 출토된 금동관모의 외면에는 삼엽초화문을 면을 도려내어 일정한 형상을 나타내는 조각법인 투조로 되어 있으며, 일정한 폭을 가진 띠 모양인 대륜부의 내면에는 자작나무 거질인 백화수피제 내관이 들어있어 현재 긴급 보존처리 중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금동관모의 양상은 공주 수촌리 1호 토광묘,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합천 옥전 23호분 출토품과 유사하여 금동관모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에 해당한다. 또 꺾쇠와 관못을 사용한 목관의 결구 방법은 공주 수촌리 고분군과 비교할 수 있다. 목곽의 모서리에 덩이쇠인 철정을 매납하는 방법은, 오산 수청동 고분군, 서산 기지리와 부장리 고분군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목곽묘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금동식리, 환두대도 등의 유물은 45세기 경기도 화성 지역이 백제의 지방 주요 거점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최고의 위세품(威勢品)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기 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분구묘는 김포에 이어 두 번째

 

현재 내부조사 예정인 분구묘의 경우, 경기 지역에서는 김포 지역(김포 운양동과 양곡 양촌 유적)에 이어 두 번째로 확인되었다. 앞으로 내부조사가 완료될 경우 분구묘의 축조과정, 확산과정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학술적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이번 조사지역이 위치한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요리 주변은 길성리토성을 비롯하여, 소근산성 등의 관방유적(關防遺蹟)과 마하리와 당하리 고분군, 발안리 마을유적, 기안리 제철유적 등 삼국 시대 대규모 유적군이 발굴된 바 있어, 지정학적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일괄출토품으로 신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금구(허리띠 장식품), 환두대도, 각종 마구류 등이 출토된 화성 사창리 산 10-1번지 유적은 이번 조사지역과 불과 100m 거리 내에 있어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목곽묘에 대한 마무리조사와 분구묘에 대한 내부조사를 통해, 4~5세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 세력 간 정치적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사진 문화재청)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원문화재단(대표이사 라수흥)이 주관하는 4~5월의 거개의 행사가 취소, 내지는 연기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수웜문화재단은 이달부터 11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가족 및 팀을 대상으로 하는 수원화성 12일 테마여행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수원 화성 12테마여행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다양한 체험을 통해 수원화성의 역사 및 정조대왕의 효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12일 동안 기수별 50명씩 총 500명을 모집하며, 1인 당 참가비는 성인 44,000, 청소년 43,000원 초등생 이하 42,000원이다.

 

이 비용은 수원유스텔의 숙박비와 식사비를 포함하고, 관람 및 화성열차, 국궁체험 비용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일의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화성의 반 구간을 돌아봐

 

첫날 프로그램은 화성 관련 애니메이션 영상 관람을 시작으로 1시간 30분가량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듣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장안문~연무대 구간을 답사하며 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연무대(동장대)에서 국궁체험을 갖는다. 국궁체험은 어린이들에게는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국궁체험을 마친 후에는 도심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화성열차 탑승하고 성신사까지 이동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걸어서 서장대에 오른 후 수원시내를 한 눈에 조망하며, 서장대 인근의 효원의 종을 타종하고, 다시 내려와 조선시대 최대 규모인 화성행궁을 관람한다. 다음날은 수원화성박물관 투어 후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조선시대 정예군사들의 무예24기 시범을 관람하며 일정을 마친다.

 

 

2%가 부족한 12일 종합투어

 

이 프로그램대로라면 12일 프로그램이 별 다른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한다. 무엇인가 추억에 남을 만한 소재가 부족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안내자를 따라서 화성을 돌아보고, 화성열차에 올라 30분 정도 화성의 안과 밖을 돌아본다는 것. 그리고 서장대에 올랐다가 자시 내려와 행궁을 돌아본다는 것에 무슨 큰 의미를 둘 것인가?

 

다음날은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무예24기 시범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끝난다고 했다. 이런 정도의 프로그램이라면 굳이 12일 동안 관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3(어른 2인 아이 1)이면 130,000원이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한 가족이 와서 굳이 이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즐길 수가 있다.

 

또한, 프로그램으로 볼 때 12일이 아니라고 해도 관람이 가능하다. 무엇인가 2%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남다른 추억거리를 필요로 한다. 첫날 모든 행사는 오후에 집합을 했다고 해도, 오후 5시 정도면 끝이 난다. 그 다음은 가족끼리 왔던지 친구끼리 왔던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수원화성박물관 관람 후 11시에 신풍루 앞에서 열리는 무예24기를 관람으로 끝을 맺겠다는 것이다.

 

 

감동 없는 프로그램 기억에 남지 않아

 

요즈음 전국의 각 지자체마다 이런 12일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들과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더구나 수원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이렇게 가깝게 있기 때문에 수원은 묵어가는 곳이 아닌, 거쳐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묵어갈 수 있는 12일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런 12일 체험 프로그램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남겨 줄 수가 없다. 그리고 첫날 저녁과 둘째 날 아침사이에 너무 오랜 시간이 아무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색다른 프로그램, 수원이 아니면 딴 곳에서와 차별화 된 프로그램, 참가를 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

 

요즈음은 SNS의 시대이다. 수원화성 종합투어를 즐기고 간 사람들이 정말 감동을 줄 만한 프로그램 이었다고 홍보를 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희망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프로그램은 그만한 감동을 주기에는 무엇인가 2% 정도 부족하다. 좀 더 별난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여기산(麗岐山)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전철 화서역에서 구운동 방향에 있는 여기산 공원은 축구장, 게이트볼장, 익스트림 스포츠 연습장 등 체육시설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경기도는 팔달구 화서동 436 일대 서호저수지 332997, 여기산 선사유적지 225828를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와 201호로 지정하였다. 여기산 서호방면에는 우장춘 박사의 묘와 그의 석상이 위치해 있다.

 

 

땀을 흘리며 돌아 본 여기산

 

8일 오후 2. e수원뉴스의 김우영 주간과 함께 여기산에 올랐다. 여기산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뜨던 부석소와 토축산성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여기산 입구에서 확인을 받은 후 천천히 산으로 난 소로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에게서 숲이 주는 향이 짙다.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잎들이 유난히 푸르다.

 

천천히 걸어 오른 길 우편에는 우장춘 박사의 석상이 자리하고, 좌측에는 묘가 있다. 그곳을 지나 높지 않은 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숲길로 접어들었다. 산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곳 여기산은 수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다. 산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예부터 이곳이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연녹지인 여기산은 1979~1984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사용했던 토기종류들이 상당수가 발굴이 되었으며, 생활용구인 철기류 등도 꽤 조사되었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들이 발견이 되어, 서호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었음도 확인되었다.

 

 

화성 축성 때 돌을 뜬 곳 발견

 

숲을 지그재그로 돌면서 옛 토축산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있는 중에 거대한 암벽을 만났다. 여기산은 화성 축성 당시에 돌을 뜬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소개된 돌은 길가에 보이는 작은 바위였다. 이렇게 큰 암벽은 아직 소개되지가 않았는데, 주변에는 큰 바위덩어리들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돌을 뜬 곳임을 알 수 있다.

 

절개된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나란히 난 쐐기구멍이 보인다. 이렇게 바위에 쐐기구멍을 내고 그 안에 나무를 집어넣은 후 물을 부어놓으면 나무가 부풀어지면서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커다란 암벽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다. 어떻게 이 큰 바위덩어리를 이렇게 반듯하게 쪼갤 수가 있을까?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토축산성

 

산을 한 바퀴 돌아 정상부근으로 오르다 보니, 한 눈에도 토축산성임을 일 수 있는 흙더미가 나란히 뻗어있다. 이 토축산성은 아마도 삼한시대나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곳은 주변에 광활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축산성을 따라 걷다보니 산 정상이 나타난다. 그 위가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군사지휘소가 있었을 듯하다. 두 시간 남짓 돌아본 여기산. 여기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농촌진흥청이 이곳에 자리한 것도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26일 화성 행궁 앞에서 열리는 무예24기 시범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명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 기록된 무예 6종은, 후일 조선에도 전해져 <무예제보>에 실렸다. 이 무예제보의 내용은 이후 <무예도보통지> 까지 이어지면서 조선 무예를 극대화시킨다. 기효신서에는 6가지 무기의 장, 단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장창은 길어 원거리에서 적을 처리하기 좋으며, 낭선은 길이와 더불어 가지의 철붙이로도 공격하니 장창은 낭선을 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낭선은 그 기법이 등패를 뚫지 못하고

등패는 낭선을 이기지만 곤방의 음양수에 당해내지 못한다.

곤방은 장도를 당해내지 못하며

장도는 당파를 당해내지 못한다.

당파는 길이에 있어서 장창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렇게 장창과 낭선, 등패, 곤방, 장도, 당파의 무기들의 장, 단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로 모아 진으로 구성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병력을 극대화 시킨 것이 바로 원앙진이다.

 


 무예 24기 시범단들이 활쏘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백발백중을 자랑한다.

 

서로를 보호해가면서 적을 공격해

 

원앙진(鴛鴦陣)’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고안한 진법이다. 원앙진이라 함은 진형을 이룬 형세가 마치 원앙의 모습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원앙은 암수 한 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가 따라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앙진은 12명이 1개 대를 이룬다. 우선 등패와 요도를 든 등패수 2명이 앞에 서고, 그 뒤로 10명의 갖가지 무기를 든 병사가 2열종대로 진을 갖춘다. 이 원앙진은 명나라 중기 절강성을 비롯한 동중국해 연안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만든 진법이다.

 

위는 무예24기 시범단이 '원앙진'을 펼치기 위해 도열해 있는 모습

아래는 KBS TV '원앙진'의 방송 자료화면


 

 

원앙진은 근접전 무기인 낭선, 당파, 장창, 등패 등을 채택하여, 왜구의 장기인 큰 칼을 이용한 근접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앙진을 사용하기 전에는 왜구는 먼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조총으로 선제공격을 한 뒤, 장검을 갖고 근접전에 대응을 하여 언제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군이 원앙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병학지남연의>라는 병서에는 원앙진의 위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이어서 화전을 발사하니,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듯했다. 화포와 화전의 공격에 왜적들은 기가 꺾였다. 적이 먼저 돌진해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등패수들이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 왜적이 패하여 도망가니 가히 천하무적이다

 

 

12명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원앙진은 6가지 무기를 장비한 12명을 1대로 편성한다. 한 대에는 지휘자인 대장 1명과 등패와 표창을 가진 등패수(이하 요도수) 2, 낭선을 가진 낭선수 2, 장창을 든 장창수 4, 당파와 화전(火箭)으로 무장한 당파수 2, 그리고 취사 등 잡일을 담당하는 화병(火兵) 1명이 편성되어 있다.

 

전투시에는 이 대의 군사 중에서 화병은 빠지고 대장을 선두로 하여 등패수-낭선수-장창수-당파수의 순으로 서서 적군을 향해 나아가 낭선, 장창, 당파 등을 이용하여 격투를 벌이게 된다. 접전시 진형은 2열 종대로써 등패와 요도로 무장한 요도수 2명이 장창 4명을 보호한다. 좌측의 요도수는 작고 둥근 등패를, 우측은 대형방패인 장패를 들고 표창이나 요도로 접근을 차단한다. 낭선수는 적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한다. 대열 후미에는 당파를 든 당파수가 화전을 이용하여 마찬가지로 근접하는 적을 막는다.

 

 

무예24기 시범단 활성화 방안 마련해야

 

26일 오후 3. 수원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는 수원문화재단 소속 무예24기 시범단의 무예시범이 펼쳐졌다. 권법, 활쏘기, 창검술 등의 시범을 보인 후 뒤에 원앙진이 시범을 보였다. 11명의 인원이 각자 6가지의 무기를 들고 이리저리 치고 빠지면서 시범을 보여준 원앙진. 진법이 끝나고 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수원 화성이 유형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면, 무예24기는 무형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화성과 무예24기는 떼어놓을 수 없는 수원의 자랑이다. 하지만 무예24기 시범단은 열악한 환경에서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시범을 보이고 있다.

 

무예24기 시범단 단원이 실제 검으로 베짚베기를 실연하고 있다 

 

수원이 세계적인 위상에 걸 맞는 도시로 도약하려면, 많은 문화예술 단체의 자랑도 필요하지만 화성과 연계가 되어있는 무예24기의 활성화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이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무예24기의 연마와 시범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금선무일 듯하다. 정조와 화성, 그리고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외영과 무예24기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성시 송상동 188에 소재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국권을 흔들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현륭원을 수호하던 용주사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용주사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다가 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원래 사찰에는 홍살문을 세우지 않지만, 이곳은 현륭원을 지키는 사도세자의 원찰이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홍살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앞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용주사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사람들은 간혹 천보루 앞에 서 있는 높이 4m의 오층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잘못 알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오층석탑은 높이 4.5m의 이 화강암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특이한 오층석탑

 

효행박물관 앞에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간략화 된 기단부와,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 등의 양식과 치석 수법을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석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점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오층석탑은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오층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이나, 처마가 수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한 것은 여느 탑과 다름이 없으나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다. 1. 2. 3층의 머릿돌의 옥개받침은 4단이나, 4층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밑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에는 사방에 귀꽃모양의 인상을 3구씩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기단면석에는 위패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된 곳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 중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로 조성하였다.

 

용주사를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오층석탑. 그 탑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무리들을 벌하시고, 선한 사람들이 제발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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