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회당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한인데도 유일하게 동헌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사적 제231호는 홍주성과 홍주아문, 그리고 안회당 등이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그 중 안회당은 홍무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으로 '안회(安懷)'란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일반 동헌과는 전혀 다른 안회당

 

안회당은 동헌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왔던 동헌과는 그 형태가 전혀 다르다. 동헌과 달리 위엄이 있어 보이는 높은 지붕에 넓은 대청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느 부유한 집의 사랑채 정도로 꾸며져 있다. 안회당이 처음부터 동헌은 아니었다. 안회당 뒤편서남쪽에 '근민당'이라는 동헌이 있었다. 근민당은 천주교 박해를 한 동헌으로 유명하다.

 

 

근민당이 어떻게 해서 유실되고 대신 안회당이 동헌이 되었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안회당이 1977년 해체 복원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근민당이 동헌이었을 것이다. 홍주성은 처음 축조한 년대는 정확지가 않다. 그러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안회당은 모두 22칸으로 조성된 목조 팔작집이다. 숙종 4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후에, 고종 7년인 1780년 목사 한응필이 개축하였다고 한다. 처음 안회당을 지었을 때, 안회당이라 쓴 편액을 대원군이 하사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뛰어난 목조건축의 미가 돋보여

 

안회당을 돌아보면 이런 아름다운 집에서 집무를 하는 목사는 절로 사람들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름답게 꾸며진 동헌이다. ㄱ자 형으로 된 안회당은 정면 7.5칸에 측면 2.5칸 정도로 되어있으며, 건물을 바라보고 좌측 끝에는 꺾이어 나온 누마루 방이 달려있다. 누마루 방은 모두 두 칸의 마루방으로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처럼 꾸몄다.


 

 
 


 

측면 반 칸의 앞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뒤편으로는 높다랗게 연도를 뺀 굴뚝을 올렸다. 누마루 방 뒤로는 개방마루를 놓아 뒤편 여하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동헌이라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날렵하게 위로 솟은 처마는 한옥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사적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사람들

 

홍주성과 안회당 등을 돌아보다가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 있다. 차들이 여기저기 주차를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곳은 사적 안이 아닌가. 더구나 안회당과 건물 앞에 있는 홍주아문 등은 모두 사적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바로 곁에 주차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곳은 많은 차들이 문화재 안에 주차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주차장이 부족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홍주성은 1978년 10월 7일 강도 5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들을 매입하여 주변 정리를 하고, 홍주성곽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홍주아문과 안회당 주변에 있는 건물부터 먼저 철거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선이란 생각이다. 그것이 많은 예산이 들어 불가능하다면, 그전에 주차문제라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적지 안에 버젓이 들어가 주차를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부분이다.

난 봄이 되면 가장 즐겨하는 답사 장소가 산으로 꼬리를 내닫고 있는 성곽이다. 유난히 봄이 되면 성곽을 즐겨 찾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산성을 오르다가 보면 주변으로 펼쳐지는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또한 그 산 마루로 오르는 길에 아주 가끔은 정겨운 짐승들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에 찾는 산성. 우선은 평지에 쌓은 성보다는 산성을 주로 찾는 이유는 또 있다. 평지에 쌓은 성에서 맛볼 수 없는 기분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성 위로 난 길을 걷다가보면, 주변으로 달라지는 풍광에 빠져들게 된다. 그 풍광이란 것은 우리가 그냥 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삼년산성

 

산성을 걷는 즐거움

 

전국에 수많은 산성들이 그동안 복원이 되었다. 하기에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산성은 각각 그 산을 에워쌓고 있는 방법이 다르다. 하기에 산성을 걷다가 보면, 많은 공부가 된다. 또한 역사 속에서 왜 우리 선조들은 이런 형태의 성을 쌓았을까를 생각하다가 보면, 꽤 길이가 있는 산성임에도 언제 돌았는지 모르게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산성을 따라 걷는 즐거움도 다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그 땀을 산마루에 난 산성위에 올라앉아 식히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진다. 오염되지 않은 산마루에서의 심호흡. 그것 하나만으로도 산에 오른 효과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데 거기다가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고’ 가 이닐까?

 

 

위 단양 적성, 아래 고모산성

 

자연을 따라 자연이 되는 시간

 

우리 선조들은 성을 쌓을 때 자연을 이용한다. 산성을 걷다가보면 어느 한 구석 자연을 넘어서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 자연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산성이다. 그래서 그 산성이 곧 자연이다. 그 자연을 품고 걷다가보면, 나 스스로가 자연 안에 파묻히고 만다.

 

인위적으로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이 곧 자연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느끼면서 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 주변 곳곳에 참으로 아름답게 펼쳐지는 자연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성곽 틈사이로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 위로는 샘이 있고, 그 아래로는 수문이 생겨난다.

 

 

위 안성 죽주산성 아래 완주 위봉산성

 

그 모든 것이 자연을 거슬리지 않았다. 참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얼마나 동화되는 삶을 살았는가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산성 위를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금처럼 자연을 온통 뒤집어가며 커다란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돌 하나를 놓으면서도, 그 돌이 자연과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음을 함께 놓았다.

 

올 봄 산성을 걸어보자

 

올 봄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성을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산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장관을 느끼고, 온통 꽃으로 덮이고 있는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걷는다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위 적성산성, 아래 홍주성

아름다운 산성 길. 가끔은 풀숲에서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를 보는 것도 즐겁고, 산짐승 한 마리가 새로 난 풀잎을 뜯다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는 모습도 정겹다. 물 한 병 찔러 넣고 천천히 걷다가 보면, 그 산성 안에서 자연과 산성, 그리고 내가 결코 둘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성은 대개 산 위에 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쉽다. 그러나 성의 종류를 보면,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은 산성과, 수원 화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이용해 쌓은 성곽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홍주성과 같이 평지에 성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명칭을 보아 ‘○○산성’이란 명칭이면 산을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고, ‘○○성’이면 평지에 쌓은 성으로 볼 수가 있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사라지고, 성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동문이었던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곳까지 성이 연결이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8월 29일이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왜 하필 많은 성 가운데 홍주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홍주성이 국치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항일의 성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과 홍주성 전투그림. 칼과 죽창을 든 의병들이
신식무기인 총을 가진 일본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을사보호 조약을 반대한 의병들의 항거

국치의 시작이기도 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한 의병들이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다. 홍주성에는 의병장인 민종식과 이세영,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과 보령, 청양 등 충남의 요지를 점령한 후,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이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해 5월 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주성.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돌출이 된 치가 보인다(가운데와 아래)

의병장 이세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을 도와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의병장 안병찬은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변호사가 된 안병찬은 1909년 안중근의사 공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발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비록 의병들이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홍주성에 머물면서 신식화기를 가진 일본군과 3일간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홍주성이 언제 축성이 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초기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홍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터인 듯하다. 성벽이 트여있는 안으로 들어가니 와편이 보인다. 전각이 이곳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초기 성 쌓기 방법을 충실히 따른 성곽

홍주성은 문종 때 성 주위가 4,856척에 높이가 11척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가 사라진 홍주성은 홍성군에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중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네모난 돌들을 가지런히 맞춘 성벽에는 담장이가 타고 오른다. 성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성은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지리적으로 비워져 허전한 곳에는 치를 내어 보강을 하였다. 잠시 걸어가니 성벽이 트인 곳이 나온다. 아마 성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터진 곳으로 들어가니 한편에 와편이 쌓여있다.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성에는 모두 세 곳의 문이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과 북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위치로 보아 이곳이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몇 기의 비들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의 비는 충남 지정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이다.


홍주성을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수성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고 볼품없는 비 하나. 이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황폐된 홍주성을 보수하면서 세운비로, 내용을 보면 순조 23년 이곳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상을 수리하기로 하고, 그 해 8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고 기록을 했다. 완성된 성의 길이는 7리이고, 공사시간은 100일이라는 것이다.

한양을 지키는 길목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홍주성. 오늘 이 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아픔을 거울삼아, 다시는 가슴 찢기는 또 다른 형태의‘국치’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성벽 위에 난 길과 담장이로 인해 아름다운 성벽. 이 아름다움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로 지켜진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피로 지켜지는 역사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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