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체정은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소재한 정자이다. 경체정은 뒤편에 낮은 산을 두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한다. 그저 바라다보면 단아한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정자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정자다.

 

전국에 있는 많은 정자를 찾아다니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거개의 정자들이 문을 닫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정자를 만나면 그저 담 밖으로만 돌아야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설명이야 안내판이 있으니 대략적인 것은 알 수가 있다고 해도, 그 속을 모르니 답답할 때도 있다.



 

사면에 다른 글씨로 현판을 달아

 

  
경체정에는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중에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확인을 할 수가 없는 정자는 늘 안타까움만 더한다

경제청은 모두 4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조 철종 때인 1854년에 지어진 경채정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경체정이라는 현판이 4개나 달려있으니 어느 글이 추사 것인지 밖에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경체정은 강윤(예조정랑, 승지),강완, 강한 세 형제의 덕행과 학식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강태중이 지었다고 한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세웠으며 앞으로는 누마루를 깔고 뒤로는 방을 드렸다. 안을 들어가 볼 수가 없으니 외형만 보고 정자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주변에는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마루 밑에 있는 외바퀴 손수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경체정은 높지 않은 담을 주위에 두르고 그 중앙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주인의 마음을 닮아

 

담 밖에서 경체정을 둘러보니 정자의 누마루 부분은 기둥을 세워 받쳤고, 방을 드린 뒤편은 흙으로 쌓았다. 그 한편에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을 놓은 듯 하다. 기둥이 선 뒤편에는 무엇에 사용을 한 것인지 외바퀴 수레가 놓여있다. 정자 주위를 돌과 흙을 섞어 담을 쌓고 그 위를 기와를 얹어 마감을 한 담장, 앞쪽에 낸 작은 일각문, 그리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은 경체정. 주변과 잘 어우러지며 서 있는 정자는, 그저 선비 같은 모습으로 말이 없다.

 

정자를 볼 때마다 그 정자를 닮아가는 마음이 없다면, 정자가 그저 단순한 전각 하나로만 보일 텐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만난 경체정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을 것 같다.

홍성군 홍성읍 오관라에는 옛 홍주목의 관아가 자리하고 있다. 사적 제2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홍주성은 조양문과 아문, 산성 등을 합쳐 지정을 했다. 아문 뒤편에는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뒤편에 옛 관아건물인 안회당 있으며, 그 뒤에 연못 가운데 자리한 여하정이 있다. 여하정은 고종 33년인 1896년 당시 홍주목사인 이승우가 옛 청수정 자리에 지은 정자이다.

 

고목과 연못이 어우러진 정자, 극치미를 자랑해

 

여하정은 관아에서 집무를 보던 목사들이 관아 일을 보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했던 장소라고 한다. 연못에는 정자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정자 앞으로는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어림잡아도 수백 년은 될 성 싶은 고목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는데, 자연석을 잘 다듬은 돌로 주초를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지면에서 약간 띄워 마르를 깔았으며, 마루의 각 변에는 장식을 한 난간을 둘렀다. 지붕의 중앙에는 커다란 꽃 봉우리 하나가 매달려 중심을 잡았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하지만 주변 경관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5월 29일 여주를 떠나 달려간 홍주성. 성을 한 바퀴 돌아 내려 온 곳에서 만난 여하정. 멀리서도 그 아름다움에 취해 한 달음에 달려갔다. 어떻게 성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 생각을 한 것일까? 초여름 잎을 녹색으로 바꾸어가는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12현판의 걸린 시액, 아름다움 논해

 

정자의 기둥에는 한 기둥에 두 편씩 열두 편의 시액이 걸려있다. 3평 남짓한 크지 않은 정자 여하정. 연못에 그림자를 느리며 서 있는 고목의 풍광도 일품이지만, 육각형인 정자의 기둥마다 걸린 현판의 글은 작자미상이나 그 내용은 아름답다.

 

余方宥公事 내 목사로서 공사를 보게 되어

作小樓二間 조그마한 누 두 칸을 지었다

懷伊水中央 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

樹環焉泉縣 등나무가지는 샘가에 느렸다

開方塘半畝 반이랑 정도 수문을 열어놓으니

九日湖之湄 햇빛에 비친 연못의 물살에 아름답구나.

一人斗以南 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건만

捨北官何求 싫다하면 관직을 어찌 구하려하는가

環除也皆山 환제는 모두가 다 산인데

於北豈無隹 그 북쪽에 어찌 새가 없을쏘냐?

賓主東南美 손과 주인이 동남에서 만나 좋아하니

其必宥所樂 반드시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

 

 

 

열두 편의 편액은 모두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것을 두 편씩 기둥에 걸어놓았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지나는 과객들이 어찌 글 한 수 떠올리지 않을까? 아마 여하정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에 취해 시 한 수 걸어놓고 싶어 했을 것이다.

 

 

 

기나긴 세월 속에 많은 환난의 아픔을 겪기도 한 홍주성.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여하정이 있어, 홍주성의 복원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 모습을 그려보는가 보다. 사방 어디서 바라보아도 아름다운 여하정. 초여름의 지친 심신을 시원한 나뭇잎과 작은 연못의 물이 식혀준다. 연못 속으로 빠져들 듯 기울어버린 고목. 그 고목을 버티고 있는 석주. 그 모든 것이 여하정을 더욱 여유롭게 만든다. 나그네의 땀을 식혀주는 이런 여유가 있어 나들이 길이 좋은 것이련만.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있다. 밑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 한벽루. 정자를 보지 않고도 '한벽루'란 말 한 마디로도,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그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익랑을 달고 있는 한벽루

 

 

한벽루가 특이한 것은 정자의 오른편에 익랑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익랑은 대문간에 달아 만든 방을 말한다. 이 계단식 익랑을 통해서 한벽루에 오를 수가 있다.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졌다. 익랑 하나만 갖고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거기에 한벽루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단지 안편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익랑은 뒤로 가면서 한 단계를 높였다. 누마루를 깐 익랑은 난간을 놓고, 한벽루에 오르기 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 볼 수 있는 예비 공간이다. 익랑의 주추는 1단의 주추 위에, 또 다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석축을 사용했다. 주추가 이단으로 되어있는 익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특이함을 보이는 것이 한벽루의 축조형태다.

 

한벽루는 익랑을 달고 있다. 익랑은 대문간에 덧내어 들인 방이다.

 

익랑의 주추는 특이하다. 일단의 주추 위에 마름모꼴 주추를 더 올렸다.

 

자연적 주초석 위에 서 있는 배부른 기둥

 

한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누마루를 깐 정자는 정면 4칸, 축면 3칸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밑의 기둥을 지나면서 마루를 올려다보면, 참으로 꼼꼼히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자재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벽루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전각이 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름다운 정자가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만일 홍수로 인해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벽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연석 주추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았다

 

사방이 트인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는 모두 3단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라보면 익랑이 2단으로 차이 있게 만들었으며, 본 정자는 조금 더 높게 난간이 설치가 되어있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조금 높아진 익랑의 마루가 있다. 그리고 한벽루의 마루는 익랑보다 한 계단 높게 만들어졌다.

 

한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도도함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곳에 서 있는 한벽루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일경이라 할만하다. 육각형의 기둥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다. 아마 우리 선조들도 이곳에 올라 이렇게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마루가 있다

 

익랑에서 본 정자로 오르는 마루는 또 다시 계단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한벽루의 아름다움은 어느 계절에도 빠지지 않는다. 누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 예전 같으면 이곳에 올라 글 한자 남기든지, 아니면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풍취에 젖어 찬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한벽루의 또 다른 흥취려니.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327에 소재한,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인 칠충사. 순창 조씨 가문에서 배출된 충신 가운데 『괴산삼강록(槐山三綱錄)』에 등재되어 있는 조신, 조종, 조복, 조반, 조덕공, 조덕용, 조은 등 7명의 충절인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사당이다.

 

괴산읍에서 문광면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보면, 삼거리가 나오고 그 앞에는 문광초등학교가 있어 찾기가 수월하다. 삼거리 이정표에는 ‘문광삼거리’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도로변에서도 눈에 띠는 곳이라, 초행길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충절의 상징, 칠충각과 칠충사

 

칠충사는 순창 조씨 문중의 7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1975년에 순창 조씨의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사당 아래에는 1973년에 건립한 정면 7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 순창조문(淳昌趙門) 칠충각이 자리하고 있다.

 

칠충사로 오르기 전에 먼저 만나게 되는 칠충각은 평지에 길게 7칸으로 지었는데, 전각 안에는 각각 7명의 정려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현판에는 「忠節 高麗國子進士麗亡不事二君大明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避世遯于槐山松坪隱逸 趙紳 之閭」, 「忠臣 精忠出氣布義敵愾參原從功臣行通政大夫中樞府僉知出東 萊別中營穩城都護府使 趙 悰 之閭」등의 문구가 보인다.

 

 

순창 조씨 7명의 충절인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는 칠충각과 정려(아래)

 

5월이라고는 해도 올해는 날이 일찍 더위가 찾아와서인가. 여기저기 잡풀이 널려있고, 그 한편에는 제초제를 뿌린 듯한 흔적도 보인다. 벌써 안내판을 가릴 정더로 자란 풀들이니, 곧 안내판을 가릴 듯하다. 조금은 바쁘다고 하지만, 큰길가에 서 있는 문화재이니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으련만.

 

난세를 피한다는 정자 ‘피세정(避世亭)’

 

칠충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으로 작은 안내판 하나가 산으로 화살표가 나 있다. ‘피세정’으로 오르는 길이라고 한다. 이곳은 이번 답사가 세 번째이다. 그동안 달라진 것은 없을까? 궁금하여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올라본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자리했지만, 한 낮에 오르다가보면 조금은 땀방울이 맺히기도 하는 곳이다.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촬영한 칠충사. 마당에 잡풀이 가득하다. 관리를 좀 잘했으면

누군가 오르는 길의 풀을 잘라놓아 발을 감지는 않는다. 천천히 오르는 숲은, 백년 이상이 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숲에서만 맡을 수 있는 숲내가 코를 간질인다. 산에 오를 때는 조금 힘이 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숲속 냄새가 좋아 산을 오른다.

 

원래 피세정이란 정자 이름은 ‘피세 조신’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피세 조신은 고려 때의 충신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송평으로 낙향하여 오마산 깊은 골에 ‘피세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야말로 세상을 등진 정자라는 뜻이다.

 

 

좁은 산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피세정(아래)

 

피세정은 한 때 터만 남기도 하였지만,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단경왕후가 죄도 없이 폐비가 되고 나라에 간신배들이 들끓자, 14세손인 송제 조세구가 다시 피세정 터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피세정이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성격이 곧은 조세구에게 군자감 봉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정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소박한 정자, 주인의 심성을 그대로 담아내

 

구불거리는 산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정자 하나가 서 있다. 피세정이다. 한 눈에 보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정자와는 다르다. 그저 꾸밈새 하나 없이 수수한 정자를 만나게 된다. 이 정자에 얽힌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면, 신경조차 쓰지 않고 뒤돌아설만한 그런 정자이다.

 

 

 

피세정 현판과 정자 안에 가득한 게판들(가운데와 아래) 

 

그러나 이 정자의 주인들은 모두 난세가 싫어 피한 사람들이다. 굳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화려한 정자를 지어야 할 이유가 없다. 정자 위에 올라 사방을 돌아본다. 저 밑으로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넓은 들판이 보이는 이곳, 피세정에서 정자의 주인들은 아마도 또 다른 벗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정자 안에 걸린 현판들이 그런 좋은 벗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외진 피세정이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었을까? 이곳까지 찾아와 글을 남겨줄 수 있는 좋은 벗들을 주변에 둔 주인들이다. 주변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잡초들 틈에서, 다듬지 않아도 고결한 품성을 느낄 수 있는 피세정이다.

 

피세정에서 내려다 본 들판. 보은으로 나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갔는가 보다. 더럽혀진 마루에 털석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노송 가지에서 ‘푸드덕’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갑자기 찾아든 나그네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피세정을 뒤로하면서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이 정자의 주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그나마 우리는 이런 난세를 피할 장소조차 없음을 탄한다.

화성 행궁은 마치 미로처럼 연결이 되어있다. 문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이 있어, 문 하나를 잘못 들면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처음 화성 행궁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말이다. “다 비슷비슷해서 특별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건축의 기법이 비슷하니 다 같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행궁의 건물 하나하나는 그 용도가 다 다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축조된 것이 아니다.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 증측한 것이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424칸이나 되었다.


화성 행궁 안에 자리한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


행궁을 비롯한 전각이 500칸을 넘어

당시에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 5칸, 좌변익랑 9칸, 우변익랑 6칸, 서변행각 5칸, 서상고 10칸, 중문 5칸, 내아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 7칸, 관청 5칸, 창사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그 뒤 공사는 계속되어 정조 20년에는 화성행궁이 모두 576칸의 규모를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왕위를 양위하고 난 후 이곳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또한 이곳을 자신이 추구하던 강력한 왕권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했을 것이다. 화성 행궁 곳곳에는 그러한 정조의 구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도 서리청이나 비장청도 그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서리청(위)과 비장청(아래)의 현판


수라간으로도 사용한 서리청


서리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을 말한다. 서리청은 바로 그 아전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 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1795년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7년 복원하였다.

서리청은 남군영에서 문을 통해 들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서리청의 본 문은 5칸의 전각과 마주하고 있는 솟을삼문에 있다. 솟을삼문은 ㄱ자 형으로 되어있으며 중간에 솟을문을 중심으로 우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한 칸의 문, 그리고 한 칸의 방과 대청을 두었다. 그리고 꺾어진 부분에는 방과 부엌, 그리고 두 개의 방이 있다. 대문채는 모두 9칸이다.


서리청(위)와 비장청(아래) 전각의 측면. 같ㅇ는 5칸이지만 비장청은 서편 한 칸을 마루를 드렸다


화성유수부의 비장들이 묵는 비장청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이다.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비장청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서리청을 지나 외정리소 앞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정조 13년인 1789년에 세웠는데 정조 20년인 1796년에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서리청의 솟을대문과(위) 비장청의 솟을디문(아래). 모두 9칸 ㄱ자로 되어있다


비장청의 규모도 서리청과 흡사하다. 하지만 비장청의 다섯 칸의 건물이지만, 서편 한 칸은 마루를 놓았다. 비장은 조선 시대, 감사나 유수, 병사, 수사, 혹은 견외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을 말한다. 서리청과 비장청은 각각 하나의 기관으로 독단적인 전각을 갖고 있었음도 주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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