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나라가 온통 침체에 빠져 헤어날 줄을 모른다. 사람들은 기력을 잃고 웃음도 잃은 지가 벌써 보름째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속 시원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무정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20명이 예약을 했다가 취소가 되었어요. 그래도 저희는 손님들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술만 파는 곳은 매출이 평소보다 4~50%가 줄었다고 해요. 이대로 일주일만 더 지나면 다 문을 닫아야 할 판예요

 

영통에서 음식장사를 하는 누이의 이야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오후시간이 되면 북적이던 통닭집의 앞도 분위기가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하루 매출이 30% 이상 줄어든 것 같아요. 손님들이 영 기운이 없어요. 음식을 드셔도 예전처럼 그렇게 웃고 떠들지를 않아요. 그저 조용히 드시고 가세요. 술은 아예 주문도 하지 않고요.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큰일 나겠어요.”

 

사람들은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침몰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곳곳에 마련한 분향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린다. 이번 사고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세월호와 관련된 장소를 취재하다 보니 남들보다 더 아픔을 느끼는 것일까?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 한 편이 늘 비어있는 것만 같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하루 종일 집을 치워보았다. 그래도 허전하기는 매한가지. 이런 시기에 음주를 한다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기운을 차려야 하니 어쩌겠는가? 평소에 잘 어울리는 지인들을 불러 만남을 가졌다.

 

 

지인 한 사람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민다. 요즈음은 만나지를 못하는 형님 한 분이 계시다. 누구라고 하면 다들 알만한 분이시지만, 사는 것이 바쁘다가 보니 자주 뵙지를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에 전해주라고 하셨단다. 오래 묵은 느티나무를 반원형으로 다듬어 그 위에 북두칠성의 형태로 구멍을 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글 쓰면서 살겠습니다.”

 

얼마나 오래 간직을 하신 것일까?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그 나무 편편한 한편에 독서상우(讀書尙友)’라고 적혀있다. ‘읽고 쓰기를 늘 벗처럼 하라는 뜻이다. 그저 남들이 보면 나무토막 하나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정신을 차릴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매일 취재를 한다고 돌아다니고, 날마다 기사를 써야 하는 나로서는 이 말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으랴.

 

늘 형님이 가까이 찾아와도 현장에서 취재를 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자주 뵙지를 못했는데, 이렇게 소중한 선물까지 받고 보니 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싶다.

 

 

형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시다니

어디 있어?”

여러 명이 술 한 잔 하려고 모였습니다.”

난 집에 들어왔지. 이런 핑계로 외도하지 말고

시간 내서 한번 뵐께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그렇다. 무슨 깊은 의미도 없다. 나도 젊게 산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형님 앞에서는 젊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만나면 즐겁고 소년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놓고 일곱 개의 구멍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볼펜 등을 찾아 꽂아놓는다. 형님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져 있다.

 

형님 고맙습니다. 열심히 취재하고 열심히 기사 쓰겠습니다,”

 

하루에 1.8개의 글. 참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11일부터 1130일까지 거의 날마다 2개씩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자료를 보거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쓴 글이 아니기에 더욱 더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나 기타 사람들 간의 인터뷰,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라는 것은 절대로 집안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현장을 나가 문화재를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에 흠뻑 젖어도 보고, 눈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11달 만에 쓴 글이 자그마치 654개나 된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9월 한 달 5kg이 빠졌다.

 

9월 한 달 동안 수원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렸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수원시와 ICLE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유엔 HABITAT(유엔 인간주거계획) 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의 차 없는 거리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미래에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난 후, 우리의 자손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인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였다. 9월 한 달 동안 행궁동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살았다. 9월은 연일 살인더위였다.

 

 생태교통 한 달동안 5kg이 줄었다. 80개의 기사를 썼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거리에서 한 달간, 하루에도 몇 군데씩을 현장 취재를 하고 다녔다. 한 달간 쓴 기사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그동안 살이 무려 5kg이나 빠졌으니, 흘린 땀만 해도 어지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 년간의 활동을 뒤돌아보다

 

201311일부터 1130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역시 나는 문화재 전문 블로거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러 나가기 전날이면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흡사 소풍날을 앞둔 아이처럼.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11개월 동안 답사를 한 날짜를 계산해보니 58일 정도가 된다. 58일 동안 답사로 소요된 경비만도 천여만 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길거리에 돈을 뿌렸다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발 목까지 눈이 쌓여도 그 핑계로 답사를 멈춘 적은 없다

 


지만 문화재 답사는 나에게는 내 일생을 걸고 하는 나만의 생활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자료로 만들어 둔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이용해 좋은 연작 자료집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벌어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천여만 원을 투자해서 나에게 돌아 온 수입이란 고작 300여만 원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투자한 금액보다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방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성한 글의 90%는 모두 현장에서 취재를 한 기사이다


 

앞으로도 내 바람 따라 걷는 길은 영원할 것

 

눈이 온다고 해서 답사를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정취를 풍기는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늘 나는 스스로를 바람 같은 남자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길을 나서 문화재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 년 동안 엄청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그보다 몇배 깂진 지료를 얻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나라도 없을 것만 같다.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산속이나 들판 등에 자리를 한 문화재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훼파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 서 있는 것도 결국 나 하나만이라도 그 문화재를 눈 부릅뜨고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이다.

 

2014, 2015, 혹은 그 이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문화재 답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3. 5 생태교통관련 기자회견 중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를 한다. ‘무슨 기사를 그렇게 많이 쓰세요?’라고. 글쎄다. 이런 질문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을 한다. ’기자가 기사 안 쓰면 무엇을 하나요?‘라고. 참 바보 같은 질문에 바보 같은 대답이란 생각이다. 기자는 당연히 기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기자의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기자가 아닌, ‘시민기자’라는 것이다. ‘시민기자’, 한 마디로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일까? 난 늘 ‘시민기자도 기자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취재를 하고, 당당하게 기사를 쓴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서 쓰는 기사가 아니라, 현장을 뛰면서 나름 노력을 하고 쓰는 기사이다.

 

일년동안 300개가 넘는 기사를 섰다. 시민기자는 한 달에 10개의 기사만 고료를 준다 

 

나에게 물었다. “미안하지 않으세요?”

 

언제인가 잘 아는 시민기자 한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대답은 단호하다. “기자가 기사 쓰는데 왜 미안해야 하며, 미안할 일이라면 기자 그만 두어야죠.”라는 대답이다. 기자가 현장을 누비며 취재를 하고 그것을 기사화하여 올리는데,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긴 이런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기자들은 한 달에 기사가 10개로 제한이 되어있다. 그런데 한 달에 40개 가까운 기사를 쓰다가 보니, 온통 한 사람의 기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같은 기사를 계속 올리는 것이 아니고, 그때마다 다른 기사를 올리고 있으니.

 

2, 25 특별공로기자로 염태영 수원시장으로 부터 위촉장을 받고 있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 자긍심을 가져야

 

사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라고 하면, 명함을 받아 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한 마디로 일간지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시간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리게 되는, ‘빠른 알리기’라는 e수원뉴스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SNS시대이다. ‘누가 가장 현장에서 소식을 빨리 전하는가?’. 이것이 관심의 대상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e수원뉴스야 말로 수원을 가장 빨리 홍보할 수 있는 보도매체이다. 더구나 180명이나 되는 시민기자들이 수원의 곳곳을 다닌다.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일이, 기사화될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것을 가장 빠르게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기자들이다. 사실 이런 시민기자들이야 말로 두려운 존재일 수가 있다.

 

남들이 가지 못할 곳을 다닐 수가 있고, 남들한테는 ‘이것이 무슨 기사가 되지’하는 것들이 기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릴라식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양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민가자들이다. 어찌 두려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시민기자 1년, ‘나는 전업시민기자이다’

 

2012년 8월 13일, 처음으로 e수원뉴스에 기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만 1년이 된다. 그동안 수원 곳곳을 참 많이도 헤집고 다녔다. 1년 동안 300개가 넘는 기사를 썼다. 물론 그 중에는 사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사는 이야기조차 난 현장에서 기사를 썼다. 그것이 생리에 맡기 때문이다.

 

시민기자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이 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 하지만 나는 ‘전업시민기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것이 내 일이다. “날도 더운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라는 바보 같은 질문도 받는다. 기자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데,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어떻게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동안 열심을 낸 덕분일까? 이제는 수원이라는 곳 어딜 가도 알아보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이기보다는, 그냥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나는 나와의 처절한 싸움을 해야만 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날이 춥거나 찌는 듯한 더위이거나. 나는 현장에 있었다.

 

지난 일년동안 참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앞으로도 ‘시민기자’로서의 본분 다할 터

 

사실 나이라는 것은 속일 수가 없다. 요즈음 후텁지근한 일기로 한 두 시간만 돌아다녀도 땀으로 흠뻑 젖는다.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가 저녁이 되면 몸에서 쉰내가 난다. 그렇게 매일 돌아다니다가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천성이 집안에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현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리는 행궁동 일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곳을 가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제는 행궁동을 가면 지니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내가 생각해도 ‘징한 인간이다’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원의 자긍심을 세울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어찌 집안에서 편히 기사를 쓸 것인가? 당연히 현장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해야 옳다.

 

얼마나 더 열심을 낼 수 있을까? 사람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난 이것 하나만은 꼭 지키고 싶다. 내가 e수원뉴스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는 한은, 어벌쩡한 기사는 쓰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최고가 되기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기자가 되자!.' 이것이 내가 시민기자로서 할 수 있는 나와의 약속이다.

지난 2011년에 51회 봉사에 30,000여 그릇, 2012년 12월 20일까지 64회 35,000 여 그릇. ‘사랑실은 스님짜장’의 주인공인 운천스님이 전국을 다니면서 ‘스님짜장’으로 봉사를 한 회수와 그동안 봉사를 한 짜장면과 짜장밥의 그릇수이다. 2년 동안 115회 봉사에 65,000 그릇 정도를 급식공덕을 했다.

 

운천스님의 짜장봉사는 날로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처음에는 노인복지관과 군부대, 그리고 장애자들이 있는 복지재단 등에서 활종을 하더니, 이제는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남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불산누출 사고마을이나 섬까지 들어가 봉사를 한다.

 

 

봉사는 나의 운명이라는 짜장스님

 

운천스님의 짜장봉사는 천년고찰인 남원선원사 주지로 부임을 하면서 부터이다.

 

“선원사 주지 소임을 맡아 왔는데, 우연히 짜장면을 만들어 공양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근에 군부대가 있어 장병들에게 무엇이 가장 먹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짜장면’이라는 것입니다. 몇 날을 고민을 하다가 결정을 했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 속으로 들어가 실천을 하자고요.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 마음에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제가 다가갈 수 있는 길은 짜장면을 들고 가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사랑실은 스님짜장'을 시작했다. 지금은 선원사 주지 운천스님보다, 오히려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운천스님의 행보가 요즈음은 종교의 벽을 뛰어 넘었다. 시류가 그렇게 변하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이미 종교의 벽은 하나도 가치가 없다고, 어떤 종교에서 필요로 하던지 망설이지 않고 달려간다.

 

 

처음 불교와 관련 된 곳을 찾아다니던 운천스님은, 이제는 스님짜장 한 그릇으로 갑갑하고 꽉 막혔던 종교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데 일조를 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경비가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기름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그 또한 많은 부담이 된다고 한다. 더구나 장비를 싣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적은 차로 이동은 불가능하다.

 

“짜장 한 그릇에 원가를 따져보니 1,400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물론 자재 값만 그렇습니다. 인건비면 운송비 등을 합치면 원가는 더 들어가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저희를 필요로 한다면 달려가야죠. 지금은 그것이 제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껄껄 웃으면서 밀가루 반죽을 한다. 내일은 또 멀리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은 전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일 년이면 60회 정도를 봉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니, 함께 봉사를 하던 봉사단들이 모두 치쳐 있다는 것.

 

 

스님짜장의 특별함, 그 비밀

 

스님짜장이 사람들에게 왜 인기가 있을까? 물론 무료로 나누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매달 두 번씩 찾아가는 부산 구서 전철역의 무료급식소에는 800여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자리가 모자라 항상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 중에는 이런 곳에 와서 드시지 않아도 될 법한 어르신들도 눈에 띤다. 왜일까?

 

“스님짜장의 맛이 달라요. 우선은 정성이 가득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고기를 쓰지 않아요. 그리고 먹으면 먹을수록 담백함이 느껴져요. 무엇인가 이 짜장만이 갖고 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스님짜장을 급식하는 날이 되면, 일부러 이곳에 오신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이다. 도대체 스님짜장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짜장 봉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까지 걱정을 하는 운천스님이다.

 

“비밀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저 남들보다 더 좋은 재료를 준비하고 고기보다 비싸다는 콩고기와 콩 햄 등을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짜장을 볶아내고 면을 그 자리에 뽑아서 삶아내기 때문인 듯도 하고요”

 

그렇게 대답을 하는 운천스님이지만, 사실 스님짜장의 맛의 비밀은 딴 곳에 있었다. 짜장을 어쩔 수 없이 사용을 하고 있지만, 짜장을 볶을 때 사용하는 육수를 밴댕이 등의 어류와 멸치를 삶아서 만든다. 그리고 야채의 종류가 7~8가지나 들어간다. 이런 것들이 모여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다. 먹는 사람들의 건강을 최우선 한다는 것이다.

 

 

“가끔은 돼지고기를 넣기도 합니다. 외진 곳이나 불산마을, 군부대 등에는 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것이 콩고기보다 더 쌉니다. 그래도 옛날 분들은 그런 것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고기를 넣어 드리기도 하죠.”

 

결국 스님짜장의 비밀은 정성과 재료가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우선 들어가는 야채 종류가 다양해 그것들이 어우러져 느끼한 맛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짜장면을 한 그릇씩 비운 분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것을 보는 짜장스님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환하다.

참 아픈 말이다. 그리고 큰 아픔이었다. 난 죄인이라도 된 듯 말을 할 수 없었다. 구미시 산동면 임천리. 지난번에는 그저 마을회관을 들어가면서 겉모습만 촬영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미시해평청소년수련원’에 묵고 있는 70여명의 주민들, 그들의 아픔을 하나하나 들춰보기로 했다.

 

하늘도 무심하더라

 

남원 선원사 주지인 운천스님이 12일에 불산 누출 사고마을에 또 들어가신다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 번 돌아보려고 일찍 출발을 했다. 스님이 해평청소년수련원에서 ‘스님짜장’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불산누출 사고마을인 임천리로 향했다. 처음 이곳을 들렸을 때는 솔직히 이 정도인줄은 몰랐었다.

 

봉지를 씌운 체 남아있는 배

 

붉은 천에 쓰인 ‘불산누출사고 피해지역 절대식용불가’라는 글씨. 그 앞에서 하염없이 잘 자란 배추를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

 

“올해는 아이들 김장도 못해 주었네. 저 아까운 것을 어쩌지”

 

할머니는 매년 김장을 해서 자녀들에게 보냈다고 하신다. 그러나 실하게 자란 배추가 하루아침에 만져보지도 못할 죽음의 배추가 되어버린 것이다. 임천리 들판에는 베지 않은 벼가 누렇게 타서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배나무에는 봉지를 씌운 배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사과나무에는 잘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흐른다.

 

추수를 하지 못하고 방치된 벼와(위) 붉은 고추가 달린 고추밭(아래)

 

그야말로 아픔이었다. 누군가 ‘하늘이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다’라고 말을 한다. 순간의 잘못으로 인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소년수련원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임천리 주민들. 불편한 이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몇 차례 수련원과 마을을 운행하는 버스로 집을 돌아보고는 한다.

 

“기자가 죽을까봐 어떻게 여길 왔지”

 

한참 마을을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을의 어르신이 누구냐고 물으신다. 취재를 하러 들어왔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기자분이 죽을까봐 어떻게 여길 오셨소. 기자 분들은 오지 않고도 글만 잘 쓰드만.”

 

붉게 익은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들(위) 주렁주렁 열린 포도

 

임천리 옆 해평마을에 사신다는 어르신은 기자들에 대해 화가 많이 나신듯하다. 어르신께 왜 그렇게 기자들을 미워하시는가를 물었다.

 

“기자들이 제대로 알고 기사를 써야죠. 여긴 들어 온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소. 말로만 듣고 기사를 써대니, 마치 구미 전체가 마치 불산에 오염된 것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잖소. 구미라는 인쇄가 들어가 있는 농작물은 아무도 사지를 않아요. 구미 농사꾼들은 올 한 해 어떻게 살라는 것인지. 정말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말이요”

 

어르신이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불산 누출로 인해 기형아를 낳는다거나, 뼈가 녹는다는 말들이 흉흉하게 떠돌았다는 것이다. 불산에 노출된 것을 먹으면 똑 같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불산이 공기로 퍼져나갔다고 했다는 것이다.

 

스님짜장을 준비하는 운천스님과 짜장을 드시는 임천리 주민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구미 전체의 일은 아닌데, 하도 떠벌려대니 사람들이 구미라는 글자만 있어도 그 식품들은 안산데요. 돈 들여 인쇄해 놓은 포장박스를 다 버려야 할 판이니, 기자가 글만 쓰면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너무 무책임 한 것 같아요. 마치 구미시 전체가 오염되어 버린 것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요”

 

졸지에 죽일 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벌써 불산누출 사고마을을 다녀 온지 3일이 지났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 아픔을 느끼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배추밭에서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어머니의 마음을 본 것이다. 그래도 먼저 자녀들 김장 걱정을 하시는 어머니. 한 사람이 부주의가 불러온 것치고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다. 이 분들 언제나 정든 집으로 돌아가실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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