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사에는 문수보살을 모신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협시보살로 최고의 지혜를 갖고 잇는 보살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이라고 하여, 문수보살을 대지(大智)보살이라고도 한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문수사는 우리나라의 많은 절 중 오대산 상원사, 춘천 청평사, 삼각산과 김포의 문수암, 울산 문주사 등과 함께 문수보살을 모신 절 중 한 곳이다.

 


 


  
익산 문수사의 극락전은 1994년에 새로 지었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이후의 연혁은 알 수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 중건한 바 있다. 그 후 몇 차례 중건한 문수사는 백운암과 백련암의 부속 암자를 두고 있다. 천호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관세음보살 등 3대 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문수사는 문수보살, 백운암은 보현보살, 백련암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산신각은
  
1994년까지만 해도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나무의 단풍. 매년 이렇게 아름답게 물이 든다고 한다


  
아름답게 그려진 단청이 눈길을 끈다

 

가을 날 찾은 문수사는 비구니 절들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대웅전이 극락전 앞에 선 나무는 반홍반황(半紅半黃)의 색을 띠고 있어 아름답다. 극락전 뒤에 선 삼성각은 1994년까지는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1994년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이 정리가 되어 있는 절. 장독대는 얼마나 닦아댔는지 윤이 반지르르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을이 깊었음을 알린다. 요사 뒤에 있는 모과나무에는 튼실한 모과들이 달렸다. 그저 밑에만 가 있어도 모과냄새가 코를 간질일 듯하다.


  
문수사 요사 뒤에 모과나무에는 모과들이 참 많이도 달렸다


  
깨끗히 정리된 장독이 윤이 난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고 하는 문수사. 현재는 김제 금산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 문수사의 가을은 또 하나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어디를 가나 아름다움이 한 가지씩은 있다는 절집들. 문수사의 가을은 극락전 앞에 선 아름답게 물든 단풍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전주천을 굽어보는 한벽당 앞 다리 쪽에서 올려다보면, 산마루 가까이 7부 능선쯤에 커다란 입석불상이 서 있는데 이곳이 동고사다. 동고사는 전주의 사방에 세워진 절 중 하나로, 남고사, 서고사, 진북사와 더불어 사방에 세운 절 중 한 곳이다.


차를 타고 올라도 힘든 길이다. 6월 7일 5시가 넘어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이라 숨이 턱에 닿는다. 전주의 남고산성과 더불어 마주하고 있는 동고산성을 오르기 위해서다. 동고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편에 있는 산성을 '남고산성'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헌강왕 때 도선스님이 창건한 동고사


현재 동고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전주의 동쪽에 자리한 절이라 하여 '동고사'라 칭했다고 한다. 동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었던 것을 조선조 헌종 10년인 1844년에 허주 스님이 재건을 하고, 그 후 1946년에 영담스님이 대웅전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동고사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아들이 '범공'이라는 이름의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랬던 곳이라고도 한다. 동고사를 오르니 전주 시내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동고산성 인근 위편에 자리한 절이다. 절에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염불원 등의 전각이 있다. 전각 아래로는 언제 쌓은 것인지 돌을 쌓아 탑을 여러 개 조성하였는데, 담장이가 타고 올라 고찰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견훤의 왕궁 터엔 주추만 남아


동고사 인근에 견훤의 왕궁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나섰다. 동고사에서 내려오다가 단군성전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난 길을 돌아 올라가면 동고산성의 안내판이 있다. 동고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에 걸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왕궁 터라고 전해진다.


견훤은 신라 효공왕 4년인 900년에 완산주(현재의 전주)에 '전주성'을 쌓고 도읍지로 정했다. 그 후 936년까지 37년간 존속을 했다. 1990년 이곳을 발굴할 때 전면 22칸 84.4m, 측면 3칸 16.1m, 총 66칸의 건물지가 발견이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단일 건물지로는 최대의 크기고, 이곳이 견훤왕의 궁성이었던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잡초가 우거진 궁궐터에는 커다란 돌 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다듬지 않은 넓적한 이 돌들이 당시의 주초였는가 보다. 앞으로는 축대를 쌓았던 흔적인지 가지런히 돌들이 남아있다. 세월이 변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부흥을 꾀했던 견훤은 37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역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발굴된 자료에서 견훤의 궁터임을 알 수 있어


이곳을 견훤의 궁터로 추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자료와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해서다. '전주성황사중창기'에는 이곳을 <견훤고궁허>라 하였고, 1980년 발굴된 건물지의 기와 명문에서 '전주성'이라는 글자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城)'자가 박힌 기와는 왕궁 터에서나 쓰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이 기와의 연꽃무늬는 신라 말 고려 초기에 것으로,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시기와 일치한다.

 

 


역사는 비정한 것인지.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이곳 완산주에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불과 3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동고산성 안에는 여기저기 건물지가 보이는데, 아마 궁을 중앙에 두고 앞으로는 군막들이 있었고, 뒤편으로는 또 다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니 이곳이 천혜의 조건을 가진 성터로 보여진다. 하지만 37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 사라진 후백제. 그러나 이곳은 영원한 백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닐는지. 그 넓은 왕궁터에 남은 주춧돌만 보아도, 당시 견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소재한 봉암사 경내, 대웅보전 곁에는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이 전각 안에는 국보 재315호 지증대사탑비와,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인 881년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탑의 명칭을 ‘지증대사 적조탑’이라 부르는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온전한 지붕돌의 섬세한 꾸밈

8각으로 꾸며진 지붕돌은 아래에 서까래를 두 겹으로 표현한, 겹처마 지붕으로 아름답다. 서까래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한 지붕돌의 처마는 살짝 들려 있다. 낙수면의 각 모서리 선은 굵직하고, 끝에는 귀꽃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앞뒤의 양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아마도 이 탑이 지증대사의 사리를 보관한 탑이기 때문에 이런 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킨다는 사천왕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조각들이 지증대사 탑의 전체에 고르게 표현이 되어있다. 전국에 수많은 사리탑을 둘러보았지만, 이처럼 화려하게 장식을 한 탑은 그리 흔치가 않다. 위서부터 아래 기단까지 고르게 조각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이 어우러진 탑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으로 꾸며졌다. 밑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위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금방이라도 탑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윗단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무릎을 굽힌 천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공양을 드리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조각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꾸며져 탑의 조형이 남다름을 알 수가 있다.

정녕 사람이 만든 탑일까?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고이기 위한 고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한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어울리는 지증대사 적조탑. 안정감이 있게 조형이 된 탑의 옆에 세워진 비문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 헌강왕 9년인 8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는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 수행 중인 스님들께 자장을 해 드리기 위해 7월 6일에 찾아간 봉 옛 고찰. 그곳에서 만난 지증대사탑의 모습은 한참이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재 중 아름다운 전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봉암사 극락전을 말한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전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봉암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기도 하다.

봉암사 극락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이다. 지증국사가 봉암사를 창건하면서 지어진 건물로, 지어지고 난 후 80년이 지나 봉암사의 많은 전각들이 화재로 모두 소실이 되고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대사가 봉암사를 재중창 하였으나, 임진란을 거치면서 일주문과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경순왕이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한 극락전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에,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옥개석을 보수 한 듯, 망와에는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봉암사 극락전은 얼핏 보면 중층으로 지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층 몸채에 차양 칸을 둘러 마치 중층 같은 외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6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봉암사를, 하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봉암사는 공양대접을 하는 사람들도, 3시간 이내에 사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면 경내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에는 조금은 버거울 듯해, 걸음을 바삐 해야만 했다.



탑처럼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봉암사 극락전. 현재 보물 제15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은 기단부의 상, 하 갑석을 면석으로 처리를 하고, 기단의 바닥은 장방형 판석으로 깔았다. 원형의 주추는 잘 다듬은 원형의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외진주 12본과 내진주 4본으로 중층 목탑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삼면에 문을 낸 극락전, 궁전의 천정과 같은 아름다움

중앙에 마련한 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의 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전면의 문은 세 짝문을 내었으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뒤편으로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를 해,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 측면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내출목의 상단에는 장혀를 올리고 상벽을 구성한 후, 외진으로 17개의 우물을 돌려 궁전천정을 연상케 한다. 천정의 중앙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불단은 간략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이 돌로 만든 장식을 올려놓았다.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봉암사 극락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그리 흔치가 않다. 봉암사를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란 생각인데, 거기다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까지 볼 수 있다니.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전국을 다니며 문화재를 답사한 것에 대한 보답은 아니었을까?


극락전을 뒤로하고 삼층석탑으로 향하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언제 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를 모르니.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