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55호로 지정이 된 고려 후기의 석조입상인 ‘목신리 보살상’이 자리한다. 이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지방도 392호선 옆 나지막한 구릉 위의 보호각 속에 안치되어 있다. 보호각은 2007년에 찾았을 때는 좌우 각 한 칸인 목조 가구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이 보호각의 지붕이 초가였다고 하는데, 2009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맞배지붕을 얹은 기와로 깨끗하게 보호각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슬레이트 지붕일 때의 가림나무가 그대로 있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1888년에 중수를 한 보호각

 

목신리 보살상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각의 종도리에는 묵서로 “광서십사년무자십일월 갑시(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初一日 甲時)”라고 쓰여 있어, 1888년에 이 보호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호각에 사용된 초석 중의 일부에는 주좌가 뚜렷한 초석이 남아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주변이 사지였음도 간과할 수 없다.

 

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성되어 있어, 마을의 수호, 기자, 기복, 치병, 기우 등을 바라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을 미륵으로 신앙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보호각

 

현재 보살상이 서 있는 구봉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양디현 목악면 장승동이라고 불렀다. 이 불상이 서 있는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 이 석조불상을 ‘미륵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속칭 ‘언청이미륵’이라고 한다. 이는 이 석조불상의 코가 마모가 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목신리 보살상은 머리에 갓 모양의 둥근 보개가 씌어져 있는데, 이 보개는 목신리 보살상과 석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후대에 조성해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보개를 덧씌운 이유는 사람들이 이 석조입상을 미륵으로 여기고 싶은 심리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인근의 가창리 미륵입상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현재까지 미륵으로 통칭되는 예는 전국적으로 약 300여 구에 달한다.

 

 

보개 아래에는 삼엽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관 중앙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목신리 보살입상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방형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표현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양 볼과 턱에는 살이 많다. 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귀를 감싸고 흘러내린 보발은 양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지방에서 조성한 보살상으로 보여

 

목은 상당히 짧고 어깨는 위축되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보살상이 흔히 걸치는 천의가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보편화된 불의형 대의를 걸치고 있다. 옷 주름은 선각으로 간략하게 중요한 부분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외장한 채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바짝 들어 올려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이 보살상의 높이는 155㎝, 보관 높이 25.5㎝, 상호 길이 60㎝, 어깨 폭 78㎝이다.

 

2007년 답사 때의 슬레이트 지붕 보호각

 

목신리 보살입상은 현재 마모가 너무 심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머리 부분이 신체에 비해 상당히 크고, 법의가 형식적인 선각으로 표현된 점이나, 양팔의 처리가 부자연스럽고 조각 기법이 서툰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후기에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보살상으로 보인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륵당집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하던 곳이다. 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곳은 계획을 세워 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녔으니...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다.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알려주었으니, 주변만 맴돌 수밖에.

 

 

주변을 돌면서도 당집을 발견 못해

 

몇 번을 파장동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난 후에야 바로 눈앞에 있는 당집을 발견했으니,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는 또 생전 처음이다. 당집 앞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었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누군가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부른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 까치발로 보다

 

그런데 문제는 미륵당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미륵님 미륵님, 선이라도 보세요?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을 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을 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향민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다 마을을 떠난 듯하다. 매일 수백 대의 버스가 앞으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미륵당 석불.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처럼 틈을 내어 찾아간 수원 파장동 미륵당 석불. 생긴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영험한 미륵조차도 버려두는 것인지.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절 있는 산을 돌아온 곳(퇴촌)인데

바람에 연기는 상방으로 접하는 구나

옛날에 놀던 곳은 뒤섞이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많이 바쁘다

 

고요한 방에 중과 이야기하기 아주 알맞으며

가을 등불 밝은데 빗소리에 밤은 깊어지는 구나

이어 생각하여도 보진자만 생각하니

밝은 시대였는데 역시 깊이 숨어 살았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세심정에 남긴 글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이며, 자는 여고, 호가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일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으며,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과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세심정은 양평군 지평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용계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덕촌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으며, 다리를 건너 우측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양평군 항토유적 제2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137번지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 찾은 세심정

 

육각형으로 지어진 세심정, 2평 남짓한 세심정은 49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심정에 걸린 현판. 용문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에서 몇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답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미 세심정이 가까운 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지만, 세심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다. 몇 번을 물은 끝에 겨우 세심정으로 향했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세심정이다.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세심정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점점 세차진다. 마음이 바빠 낙엽 쌓인 돌계단을 오른다. 벌써 낙엽 위로 쌓인 눈이 미끄럽다. 세심정 위로 올라 정자를 본다. 이렇게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난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냈을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490년 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세심정

 

처마를 길게 빼낸 세심정은, 육각형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쳤다


세심정은 명종 16년인 1521년 조선조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며 정암 조광조의 수제자로 명성을 얻은 조욱(1498 ~ 1557)이, 기묘사화로 정암과 그 문하들이 화를 당할 때 화를 면하고 낙항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욱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용문산중에 복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퇴촌(退村)이라 하고, 이 정자를 지어 세심정이라 이름하고, 당호를 스스로 '세심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으며,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고졸하다. 이곳에 은거한 후로 사람들은 조욱을 '용문선생'이라 칭했다고 한다. 야산 기슭에 이 세심정을 지어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욱. 세심정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있다. 아마 선생의 평소 학문을 그리던 나그네들이 지어놓은 글일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세심정 기>를 비롯한 몇기의 게판이 걸려있다.


연당과 아우러진 세심정의 조화

 

세심정은 육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곱 개의 주추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정자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난간 밖으로 다시 툇마루를 깔았다는 점이다. 따로 입구를 내지 않고, 여섯 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는 야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과 고목들이 정자를 쌓고 있다. 그리고 앞쪽 계단 밑으로는 연당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연당은 석축으로 주위를 쌓았다. 정방형으로 조성한 연당은 정면이 16m에 측면은 11,5m 정도의 연못이다.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펜션들로 들어찼지만, 처음 이 세심정이 지어졌을 때는 앞면이 트여있어 경관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세심정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 더 이상은 지체를 하지 못하고, 정자를 내려와 돌아가려다가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른 후, 다시 툇마루를 내었다

세심정의 앞에 자리한 연당. 중앙에는 섬을 만들고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조욱은 149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557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경양,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도 벼슬에 나아기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조욱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용문선생'이라 불렀다. 후일 명종 때 현사로 뽑혀 벼슬을 하면서, 이황, 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에 적힌 연대가 맞질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하다. 글자가 틀린 안내판, 연대가 맞질 않는 안내판. 찢기고 더럽혀진 안내판, 외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내용이 안맞는 안내판, 딴 때 같으면 한 마디 하겠지만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씼었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저 허~ 웃고 떠날 수 밖에. 

몇 번인가 찾아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던, 양평의 보산정을 찾아 길을 나섰다. 보산정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이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이, 고려 우왕 1년인 1375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고려의 어지러운 정세 속에 무안 박씨의 선조인 간의내부 송림공이 이곳으로 낙향을 하여, 시회장(詩會場)으로 보산정을 지은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옛 정취를 잃은 정자

 

보산정은 양평군 단월면 보통리 산33 부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는 대성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입향조가 14세기 후반에 터를 잡아, 대대(大垈) 즉 '한터'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무안박씨가 25대 이상을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정자는 송림공이 정자를 지은 후, 송림공의 6대 손인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원겸의 수학당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그 뒤에 저명한 유림의 학자들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장으로 활용하였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현 건물은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아름다운 절경에 자리한 역사가 있는 소중한 정자를, 시멘트로 복원하여 아름답고 고풍스런 옛 정취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1955년에 마루를 축조하고, 1974년에 무안박씨 종중에서 기둥과 벽 등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보산정이 서 있는 한터는 무안 박씨들이 25대 이상을 살아오고 있는 역사가 깊은 마을이다.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눈길이 아름다운 보산정

 

보산정이 있는 한터는 역사가 깊은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월면의 면소재지인 이곳은 둘레 6 ~ 8m 는 됨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보산정은 면소재지로 들어가는 길 우측 편 동산에, 부안천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주변으로는 노송이 자리를 하고 있다. 입구는 돌담에 일각문을 세워놓았다. 양편으로는 노송이 우거지고, 눈이 쌓인 길을 걸어 올라간다. 돌계단에는 아직도 눈이 녹지를 않아, 그대로 얼어붙어 미끄럽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낭패를 당할 것만 같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면서 좌측을 보니 밑으로는 무안천이 흐르고, 경사진 비탈에 노송이 가지를 뻗고 있다. 여기저기 잔 소나무의 가지들이 부러져 있다. 아마 지난 번 내린 눈으로 인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부러졌는가 보다.

 

정자 위로 오르니 현판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최근에 새로 쓴 현판들이다. 현판에 쓰인 날짜를 보니, 2006년에 써 붙인 것이다. 아마 그 해에 이곳에서 시회라도 열렸는가 보다.

 

보산정으로 오르는 일각문. 보산정은 무안천변의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눈이 쌓여있는 보산정으로 오르는 길. 양편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이 현판에도 용그림이 그려져 있다.

 

고려의 끝남을 서러워하는 시가 마음을 아프게 해

 

그 현판의 글 중에 하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고려 500년 사직을 이별하고, 이곳으로 내려 온 송림공의 마음을 표현한 듯하다.

 

500년 도읍터에 날은 저무는데

우러러보던 까마귀는 뉘 집에 머물런가.

임 떠난 외로운 신하는 편한 곳에서

서산 저편 올라 큰소리 외쳐 보고 싶구나.

 

아마 송도를 떠난 송림공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도 늘 임금이 계셨던 송도를 바라보고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60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나그네의 눈에 들어오는 주변은 그 풍광이 그대로 남아있건만, 임을 그리던 마음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산정의 안에는 현판이 걸려있다. 새롭게 조성한 현판들이다.

보산정의 천정에 단청으로 그려놓은 용.

 

정자의 현판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정자의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있다. 아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이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25대 이상을 살아오는 무안박씨의 문중에서, 입향조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그려 넣었을 것이다. 보산정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무안천에 내려앉은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찬바람을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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