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적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데는 그 생김이나 재질, 모습의 특징 등을 보아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 그래서 불교유적의 제작시기를 대개는 몇 세기경이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불은 유일하게 그 제작연도를 새겨놓아, 통일신라 불상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함안 방어산 마애불을 찾아갔을 때는 꽤 더운 날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자료 정리를 하다가 함안 방어산 마애불을 보는 순간, 아스름한 옛 기억이 되살아 난다. 아마도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흘린 땀이 족히 수건 몇 장을 적실만한 양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한낮의 더위는 그리 녹록지가 않은 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고통이다.

 

 

시작부터 문제였던 문화재 답사 길

 

 

거기다가 방어산을 오르는 날은  넥타이에 구두까지 신었으니, 현장답사를 하기에는 적합한 차림새도 아니다. 마애불을 오르는 길에 있는 마애사를 찾았다가, 보물이 있다는 소리에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문화재를 답사하는 날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고생을 한다. 

 

그러나 출발을 한지 채 20분도 안되어서 후회를 시작했다. 길은 계단으로 잘 만들어져 오르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이정표가 500m라고 적힌 것을 보고 우습게 안 것이 불찰이다. 입구에서 잡화를 파는 분에게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조금만 가면 된단다' 그래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500m가 그리 멀 줄이야. 도대체 문화재 측정거리를 실 거리로 표시하지 않고, 직선거리로 표시를 해 놓다니.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런 경우 정말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고된 문화재 답사를 기억해내다

처음에는 그저 오르면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한참을 올랐는데도 마애불이 보이지를 않는다. 작은 물병은 이미 바닥이 나고, 손수건은 그냥 손에 힘만 주어도 닦은 땀이 주루룩 흐른다. 오르는 길에 쉼터가 보인다. 앉아서 쉬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내려온다.

 

"마애불이 어디쯤 있어요?"  

"예, 꼭 반 왔네요"

"반이요?  500m라고 되어 있는데요"

 

가까운 거리인줄 알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멀다니 앉아서 고민을 한다. 올라가야하나, 아님 포기를 하고 내려가야 하나. 그러나 절반을 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다. 아무리 땀이 흐르고 힘이 들어도 보물이 있다는데 하면서 다시 산을 오른다.

 

그저 땅만 내려다보면서 묵묵히 오른다. 위를 보고 오르면 더 빨리 지칠 것 같아서다. 오르다가 보니 앞에 산 날망이 보인다. 그런데 마애불은 보이지를 않는다. 결국 능선 위를 다 가서야 마애불을 볼 수 있었다. 500m를 오르는데 무더운 날씨 덕에 엄청난 땀을흘리며 한 시간은 걸린듯 하다. 문화재 하나를 만나기 위한 고통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미끄러운 길을 걷다가 발을 겹질린 것만 해도 아마 수십 번은 넘을 것이다. 깨지고 찢어지고, 흉터가 생기는 험난한 여정이 바로 문화재 답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국엔 그 많은 땀을 흘리고 마애불 앞에 섰다. 산 정상 바로 아래서 만난 방어산 마애불. 널직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마애불은.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 산중에 도대체 왜 오랜시간 공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 선 하나 하나를 파면서 스스로 피안의 세계를 그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니까짓 것들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기나 하는겨?

 

방어산 마애불의 조성년대는 신라시대인 801년이다. 중앙에 본존은 약사여래이며, 좌 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새겨넣었다. 왼편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이며 오른편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그려진 여성상이다.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다. 평지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몇시간을 산을 올라야 탑 하나를 찍을 수도 있다. 날씨가 매번 좋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비가 쏟아져 바로 코 앞이 보이지 않을 떄도 있고, 눈이 쌓여 미끄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재는 우리의 정신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많이, 또 한 점이라도 더 많이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다.

 

언젠가는 이 답사도 끝이 날 것이다.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올들어 급작히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을 수 있고 체력이 받쳐만 준다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마음이다.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 스스로에게 힘을 얻기 위한 자구책이다.

 

"니까짓 것들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기는 하는겨?" 


사람이 사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느 누구는 치부를 자랑으로 사는가 하면, 어느 누구는 청빈한 삶을 살기도 한다. 명성을 찾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할 일만 죽어라 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했는가는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을 한다고 하니, 사람마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녹녹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1420 ~ 1489)의 생가가 있다. 단종의 폐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이곳에 내려와 은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그 때에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아마도 그 집 자리에서 몇 번은 보수를 한 듯하다.


청빈한 생활 그대로

울안에는 수령 500년의 보호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한 시기와 흡사하다. 아마 집을 짓고 난 뒤, 이 은행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높이 20m에 둘레가 3,4m나 되는 적지 않은 나무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분이 바로 어계 선생이다.

당시 사약을 받고 청령포에 시신을 버렸다고 일설에 전하고 있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위폐를 동학사에 모신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어계선생은 일체 좋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고사리와 풀만 먹었다고 전한다.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 뒤편 산의 명칭도 백이산이라고 한다.




어계선생의 생가는 단출하다. 당시 벼슬을 한 사람들의 집이 고래등 같은데 비하면, 기와집이라고는 하지만 초막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전하는 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은 대문채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원북재,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졌다.

대문 위에 걸린 충신지려

어계생가를 들어가려고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 위에 현판이 걸려있다. 충신지려이다. <충신 증 이조참판 조려지려>라 적혀있다. 생육신의 한분이었으니, 충신이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원북재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 원북재를 재실로 보고 있다. 살림집이 아닌 재실로 보는 까닭은 부엌 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양편에 한 칸씩의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두 칸 대청을 놓았다. 별난 것도 없는 검소한 고옥이다. 이 원북재는 사랑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두 단의 축대 위에 지은 원북재. 그 집에서 조려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조금의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집이다.

원북재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대나무 숲을 뒤로 한 사당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주변을 돌담으로 둘렀다. 사당에서는 조려선생과 부인의 항례가 행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한 집이기에, 원북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담장에 붙어있는 집, 안채가 아닐까?

조려선생 생가 곁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따로 담장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주추 등으로 보아 조려선생 생가와 년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집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집은 네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발라놓아 정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측 한 칸을 내달았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부엌방과 안방, 한 칸의 대청, 그리고 높임마루를 둔 건넌방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부엌이 딸린 방 벽 밑에는 창불을 때는 아궁이가 보인다. 주추도 마름모꼴로 조성을 하였다. 여느 일반집 같지는 않다. 아마도 조려선생 생가의 안채는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어계 조려선생의 생가는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르다. 선생의 평소에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아마도 사랑채가 없는 것은, 바람 부는 청풍대를 사랑채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어계선생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날마다 커져가는 집들을 자랑하는 세상사가.


예전의 선인들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나보다. 물론 민초들이야 먹고살기도 바빴으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민초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양반네들에게 매일 뜯기고 찢기다가 일생을 마쳤을 테니까. 그러나 양반네들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대해, 그 흔적을 곧잘 남겼다는 생각이다.

그런 자신의 생애를 가장 잘 표현한 것들 중에는, 많은 정자가 있다. 정자란 쉽게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다가 보니, 자연 정자에 자신의 살아 온 흔적을 남기기를 즐겼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영남지방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조선조 전 시대를 영남지방의 반가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을 기억하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려 선생은 단종이 숙부에 의해 사약을 받고 영월 땅에서 죽임을 당하자, 영월까지 가 그 시신을 수습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 위폐를 동학사에 모셔놓고 백이산 아래에 은거를 하였다고 전한다.

원북리 앞을 지나는 지방도 옆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채미정(菜薇亭)’ 말 그대로이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한 조려선생은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채미'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섬기는 것을 수치로 알고, 수양산으로 숨어들어 풀과 고사리만 먹다가 아사를 한데서 유래한다.



조려선생은 백이, 숙제와 같은 뜻을 품고 이곳에서 은거를 하면서,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채미정이다. 채미정은 정자로서의 아름다움보다, 그 안에 숨은 뜻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무너져 내렸던 채미정

한 10여년이나 되었을까? 이곳으로 답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채미정을 들렸다. 인근에 있는 방어산 마애불을 답사하러 갔다가 들린 곳이다. 당시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정자는 쇠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지나는 길에 들린 채미정은,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자 앞에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 쓸어져가는 대문은 없애버리고, 대신 한편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10여대나 차가 설만한 주차공간도 만들었다. 정자도 말끔히 정리를 하고, 주변도 정리를 하였다. 채미정은 1735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300년 가까이 되었다. 근처에는 생육신을 향사한 사액서원인 서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뜻이 더 아름다운 채미정

일각문을 들어서면 앞으로는 연못이 있다. 정자에 걸린 현판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순흥 안용호 선생이 지은 채미정 중건기문이다. 그 기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함안읍성 서쪽 삼십리 지경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산이 백이산인데, 그 산 서편에 있는 동리가 원목이다. 동천복지답게 명려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기름진 옥야는 가히 밭 갈고 은거할만한 곳으로...(중략) 선생은 단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래학관에 계시다가 을해년 왕위찬탈의 화를 만나 재생들과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충의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분이시다.(하략)

이러한 선생의 충절을 되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 건립한 것이 바로 채미정이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정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채미정이 지니고 있는 조려선생의 충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채미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이다. 중앙에는 방을 드렸는데 판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창호 위에는 작은 밀창을 사방으로 두었다. 정면으로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측면으로는 사각기둥을 배열하였다. 누마루를 방의 주변에 깔아, 사방으로 편안하게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있기가 답답하면, 위편에 있는 청풍대에 올라 바람을 쏘였을 것이다.

청풍대(淸風臺)와 문풍루(聞風樓)에는 소식조차 돈절한데

채미정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위를 청풍대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더 있다. 문풍루.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 바람결에 영월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충절을 지키느라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한 조려선생이, 날마다 이곳에 올라 애타게 바람결에 오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채미정, 이름보다 뜻이 더 아름다운 정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조려선생은 이 채미정으로 인해 천만세에 그 이름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청풍대에 올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심히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채미의 큰 뜻은 퇴색되어 가는 것인지.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계절이 따로 없는 정자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이러한 조삼선생이 노후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찾아오는 동료들과 강론을 하고자 지은 정자무진정. 무진정을 찾아갔을 때는 앞으로 조성한 연못의 바닥을 고르기 위해, 몇 대의 중장비들이 연못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는 적은 섬을 만들어 ‘영송루’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으로 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연못에 걸린 다리를 지나, 잠시 ‘영송루(迎送樓)’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라면 이곳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또한 달밤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송루를 지나 커다란 고목을 끼고, 돌아 오르는 다리를 마저 건넌다.

‘정말 절경이다’ 감탄이 절로 나와

무진정을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예전에야 상당한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오르는 계단 주위로는, 푸른 대가 아직은 찬바람을 맞아 잎이 부딪쳐 바스락거린다. 작은 일각문 하나가 손을 맞이한다. ‘동정문(動靜門)’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문이란다.




마치 선 문답을 하듯 한참이나 속으로 그 뜻을 되뇌어 본다. 무슨 뜻으로 이런 일각문을 달아놓았을까?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무진정은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앞에서 보니 정자 가운데에 방을 드렸는데,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이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고, 정면을 뺀 삼면에는 창호를 달아냈다.

무진정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창호들이다. 삼면의 창호를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고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문을 모두 닫아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날이 좋으면 모든 창호를 위로 열어. 바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정자

정자의 기둥 위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다. 축대를 쌓은 돌도 장대석이 아닌 자연적인 돌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인 정자들이 보이는 양반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로 올라본다. 조금은 찬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정자 가운데 있는 방의 문도 좌우 문을 위로 달아 놓게 되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정자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생전 선생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하지를 않았을까? 그저 모든 일에 답답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들고 온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과연 무엇일꼬?’


함안군은 군청이 소재한 읍명이 ‘가야읍’이다. 그리고 함안면이란 곳이 따로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군명을, 행정의 중심인 곳을 읍명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함안군뿐인 듯하다.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는 ‘큰절마을[大寺谷]’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고목 곁에 석불이 서 있다.

보물 제71호인 함안 대산리 석불. 양편에는 온전하게 보존이 된 협시불 입상 2기가 서 있고, 조금 뒤편으로 물러 선 중앙에는 목도 잘리고 깨어져, 훼손이 심한 석조 좌불이 한기가 있다. 이 양편에 선 입상이 협시불이고, 좌불이 본존불인 듯하다. 이 3구의 석불을 합해 보물로 지정을 하였다.


생김새가 같은 협시불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은 손 모양만 다르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관이 아닌, 마치 두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다. 조금 길쭉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평면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눈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일반적으로 석불에서 나타나는 법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치 우리 고유의 한복을 보는 듯하다. 왼쪽 어깨에는 매듭으로 묶은 것처럼 자세히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 밑으로는 매듭을 지었다. 치마는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타원형의 주름이 양편으로 드리워져 있다. 법의의 표현이 조금은 무겁게 보인다.




두기의 협시보살은 손의 형태가 다르다. 석불입상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우측의 보살의 좌측 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손에 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약사여래불인 듯하다. 이 협시보살은 어깨의 매듭과 무릎 아래로 늘어진 타원형의 옷 주름이 특징적이다.

발은 대좌에 새겨져 있어

이 두기의 협시불은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발이 석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대좌에 조각을 해 연결을 하였다. 대좌는 연꽃을 두텁게 새긴 상대와, 8각의 면에 앙련을 새기고 안상을 새겨 넣은 하대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윗면에는 석불입상의 발을 새겨 넣어, 석불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초기 석불의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는 이 두 기의 협시불은, 지방의 특성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경남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가 이렇게 흡사한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힘든 본존불

뒤편에 앉아있는 석조불상은 목이 없다. 광배가 남아있는 이 좌불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다. 남은 부분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광배의 형태나 석질로 보아, 고려 때의 석불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한 옆에도 목이 없는 석불과 석조물들이 몇 점 보인다. 이 대산리 석불은 마을에서 섬기고 있다고 한다.




2월 20일 찾아간 대산리. 마을 안쪽 동구나무 곁에 서 있는 이 석불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형태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을 이름도 ‘큰절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일대에 상당히 큰 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절 경내에 있었을 석불들. 그저 지금의 형태로나마 남아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나마 양편의 협시불이라도 온전한 모습이기에.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