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흔히 99를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의 1을 빼앗는 것이 세상이라고 하지만, 작은 것에도 행복은 얼마든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욕심이 도에 지나치다 보니, 오히려 그러한 욕심이 과해 더욱 불행을 초래하기도 하겠죠.

 

5월이 되면서 산에는 자연에서 인간들에게 베푸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4월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지만, 5월이 되면 그만큼 풍성한 것들을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죠. 산을 가는 이유는 그러한 자연이 주는 것을 받아오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만히 있는데 주지는 않습니다. 그만큼의 땀을 흘려야 하는 것이죠.

 

 

힘들여 오른 산, 정한 만큼만 가져와

 

몇 년째 산을 오르면서 나름 한 가지 나만의 법칙을 세웠습니다. ‘욕심내지 말기’, 바로 그런 하나의 룰을 정한 것이죠. 내가 산을 오를 때, 딱 필요한 만큼을 미리 마음에 새겨둡니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도 필요한 것을 찾지 못하면, 아무 불평 없이 바로 하산을 합니다.

 

괜한 욕심을 내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마음에 정한 필요한 만큼의 양이 찬다면 이유 없이 발길을 돌립니다. ‘조그만 더라는 욕심 때문에 엄청난 참사를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이죠.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과하지 않는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근로자의 날1일 일찍 산행에 나서 서너 시간을 족히 계곡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그날 정한 만큼의 양을 채웠습니다. 기운이야 아직 몇 시간은 족히 돌아다닐 수가 있지만, 굳이 그렇게 욕심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또 시간을 내어 산으로 오르면 될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나와 인연이 아닌 것을 욕심을 낼 필요는 없기 때문이죠.

 

 

작은 산삼 몇 뿌리, 그것으로 행복 해

 

사람들은 산삼이라고 하면 영물(靈物)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귀하게 여기는 것이죠.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산삼동호회산삼카페등을 구성해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산삼을 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이 좋고, 그 산을 오르면서 흘리는 땀이 바로 나에게는 산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건강을 지켜주기 때문이죠.

 

숲에 들어가 좋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거기다가 흐르는 땀으로 인해 몸 안에 독소를 배출할 수 있으니, 그것이 산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열심히 계곡을 돌아다니다가 작은 것이라도 산삼(물론 전문적인 심마니들이 캐는 산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몇 뿌리를 캐면, 그것을 줄 사람을 정해놓고 산을 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 귀한 삼을 힘들여 캐놓고 정작 본인이 먹지 않으려면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나?’라고 묻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하겠죠. 경비 들여가면서 캔 산삼을 먹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까요. 하지만 그것을 먹고 사람들이 건강해질 수 있다면, 그 또한 복을 짓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비우고 오른 산에서 만나는 행복

 

산이 나에게 준 것. 저도 그것을 사람들에게 줍니다. 얼마를 보던지, 얼마를 캐던지 미리 정해놓은 만큼만 들고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해주고 난 다음에는, 다음 산행에서 캔 것은 누구를 줄까를 미리 정해놓습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조급할 것도 없고, 많이 캐야 한다는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여 산을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아주 작은 산삼 몇 뿌리. 그것으로 족합니다. 몇 시간을 땀을 흘렸지만, 하산을 하면서도 몸은 날아갈 것 같습니다. 한 달에 몇 번 이렇게 오르는 산이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주는 영약이 있어 좋습니다. 그것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어 좋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좋은 이유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주말이 바빠진다. 특별히 중요한 취재거리가 없으면 산행을 하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몸에 정말 영약이라는 산삼을 캐는 일이겠지만, 꼭 산삼이 아니라고 해고 자연에서 얻는 것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영지버섯이며, 장수버섯 그리고 더덕 등도 캘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참 열심히 산을 다녔다. 그 덕분에 괘 많은 양의 산삼을 캘 수 있었다. 산삼이라는 것이 그렇게 눈에 잘 보이느냐고 사람들이 묻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잘 띠는 데야 무엇이라고 설명을 하겠는가? 그저 전생에 남들에게 조금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자문을 한다.

 

먹지 않는 산삼 왜 힘들여 캐는데?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주변에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가보니, 그들에게 한 뿌리씩을 나누어 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좋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산삼이 눈에 띨 계절이다. 이 계절이 되면 주말에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산으로 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산삼이 영약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 귀한 산삼을 사람들에게 그냥 준다고 하면 설마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가져가라고 해도 선뜻 받지를 않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세상이 팍팍해진 것일까? 아니면 그 뒤에 무슨 조건이라도 있을까봐 그런 것인지. 그럴 때는 괜히 내 마음까지 즐겁지가 않다.

 

 

하긴 남들이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힘들여 산행을 해서 캐는 산삼이 아니던가? 남들처럼 등산로로 다니는 것도 아니다. 계곡을 타야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길도 없다. 때에 따라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게 채취한 산삼을 정작 본인이 먹지 않고 남을 준다고 하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올해도 다를 바 없이 산행을

 

생각하기 나름이다. 산삼을 캐서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것을 내가 대신 캐서 전해준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남의 것을 내가 갖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나쁜 마음이란 생각이다.

 

세상의 논리란 참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말고, 필요하면 본인이 산을 올라가 캐면 된다. 산을 탈 수가 없으면 조용히 나와 운이 맞기를 기다리면 된다. 조바심을 가질 것도 없고, 재촉을 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욕심이 과하다보면 스스로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오르는 산

 

산이 좋아 산을 오른다. 그리고 그곳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역시 내 몸이다. 몸이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좋은 환경에서 계곡을 흐르는 물 한 모금으로도 장이 청소가 되는 듯하다. 어찌 이런 즐거움을 마다할 것인가?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산을 오르기에 충분하다.

 

산에 오르기 전에 미리 줄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딱 필요한 양만을 찾아 나선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날은 딱 필요한 만큼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산삼이 영물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조금 더 욕심을 내면 단 한 뿌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많은 것을 욕심내지는 않는다.

 

이제 산행의 계절이 왔다. 올해는 또 누가 행운을 잡을 것인지. 그리고 누가 필요한 것인지를 살펴야 할 때이다. 남을 위해서 오르는 산행이지만, 그것은 곧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산행에서 더 많은 건강을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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