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은 우리나라의 명창들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란 칭호를 듣던 이동백 명창이 종천면 도만리 출신이며, ‘한국 판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을 한 김성옥 - 김정근 - 김창룡,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김문의 소리가문이 장항 빗금내에서 살았다. 이렇듯 우리문화의 보고로 불리는 서천은 마량리 동백숲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는 유명한 동백나무 숲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서천 팔경 중의 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 5백 여 년이 지난 동백나무 80주 정도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마량리 동백 숲은 3월 하순부터 5월 초순까지 푸른 잎 사이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붉은 동백꽃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열매는 삭과로 가을에 구형으로 익으며 3갈래로 벌어지는데, 그 속에는 진한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아직은 파랗거나 붉어지는 열매가 달려있다.

절경에 자리한 동백 숲

 


시원한 서해바대를 바라다보면 앞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에 떠 있는 무수한 고깃배들을 볼 수가 있다. 조금 가파르기는 해도 계단을 오르면 키가 큰 소나무 숲을 지나 동백 숲이 보인다. 동백 숲을 지나면 그 중간에 당집이 있다. 마량리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백나무 숲 안에는 풍어제를 지내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으로는 서해안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으나, 현재 동백정은 보수공사 중이다. 이 동백나무 숲은 이곳에서 500m 쯤 떨어진 마을의 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해지는 이야기는 별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설에는 약 300여 년 전 이 지방에 부임한 고을 수령이 꿈을 꾸었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다발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서 가져와 심었는데, 그 때 심은 꽃이 현재 동백나무 숲이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에 이곳에 모여 풍어제를 올리며, 고기잡이를 나간 어선들이 재앙이 없기를 빌고는 한다.


휘귀한 보호 숲 마량리 동백나무 숲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대만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한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동백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마량리는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자리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높다.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강한 바람을 받아 키가 작은 편이며, 3∼5m에 이르는 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2∼3개로 갈라지면서 곁가지가 발달하여 나무의 모습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철을 기다리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 정월에 시끌벅적하니 치러지는 풍어제와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 멀리 나가있는 수많은 고깃배들이 만장을 느린 모습들을 그려보면서.

얼마 전 화성시로부터 보도자료 하나를 받았다. 내용은 2012년 3월 4일(일) 오전 10시부터 화성시 궁평항 특설무대에서 ‘2012 화성시 궁평항 풍어제’를 한다는 소식이다. 옛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궁평항에 기점을 둔 많은 배들이 올 한해 풍어를 기원하는 지역 축제라는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침 일찍 궁평항으로 달려갔다.

썰렁한 축제장, 날씨마저 방해를 놀아

며칠 동안 봄날 같은 포근한 날이 계속되었다. 뉴스에서는 남녘에는 벌써 꽃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고, 연신 봄이 다 온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3월 4일 궁평항은 바람도 불고, 날씨마저 차다. 행사장에는 축제장답지 않게 사람들도 많지가 않다. 이 날 궁평항 풍어제는 오전 10시에 ‘신청울림’으로 시작을 해, 오후 5시 50분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짜여 있다.


그런데 순서를 보니 이상하다.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에서 풍어제(굿)를 한다고 하는데, 굿의 제차를 보니 경기도굿이 아닌 황해도 굿이다. 세경들이, 초감흥, 초부정, 영정거리, 땟배나가기, 타살굿 등 이런 거리 제차는 모두 황해도 굿에서 나오는 굿거리 명칭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특설무대에서는 황해도 만신들이 굿을 진행하고 있었다. 경기도 땅, 그것도 화성시의 궁평항에서 문화의 전승을 위해 마련한 풍어제에서, 얼토당토않은 황해도 굿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성은 재인청의 무부들과 신내림을 받은 무녀들에 의해, 경기도 굿의 중심지에 서 있는 곳이다.


화성은 특별한 곳이다.

딴 곳이라고 한다면, 그저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화성이라는 곳은 경기도 내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화성은 예부터 수원을 중심으로 한 재인청이 있던 곳이다. 재인청이란 굿을 하는 무부, 소리를 하는 창부, 재주를 부리는 재인, 그리고 옛 무기(舞妓)들이 교방청이 문을 닫고 난후, 그 무기들까지도 등록을 한 후에 기예를 부릴 수 있도록 한 예인집단이 있던 곳이다.

재인청이란 조선조 말기, 세습 무녀와, 화랑, 재인, 광대 등 직업적인 민간 예능인들의 예능 및 사회 활동을 행정적으로 관장했던 조직체이다. 재인청은 광대청, 혹은 장악청이라고도 불렀으며, 그에 속한 인원이 많았을 때는 3만 여명이 넘었다고 하는 대규모 예인집단이었다. 그렇다고 이 재인청이 관 주도적인 조직이 아니었다. 이 재인청은 각 지역마다 재인청을 두었는데, 그 재인청의 우두머리를 대방이라고 하였다.


이 재인청들을 모두 관장하는 곳이 당시 화성재인청이었으며,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3대를 재인청의 도대방을 지낸 이용우 일가가 살았던 곳이 바로 현 화성시요, 그 외에 수많은 무부들이 화성을 근거지로 살아왔다. 이런 화성시에서 전통문화 보존 운운하면서, 정작 굿은 황해도 굿을 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가 납득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갑신완문(1824)’에 팔도재인 편에 보면

「팔도 재인들은 병자년(인조 14년, 1636) 이후로 칙명을 가져오는 사신의 행차를 위해 좌우 산대를 거행한다. 재인 중에는 도산주라 불리는 소임을 가진 자가 있는데 각도와 읍에서 재인들이 도산주를 취하여 올려 보낸다. 이들은 각각에게 맞는 마땅한 준비로, 행사를 받들게 한다. 갑진년(정조 9년, 1784) 이후에는 좌우 산대가 설행되지 않은 까닭에 옛 법을 개선하여 준수하도록 할 계획으로 팔도 도령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산대) 설행을 위한 대방 회의 후, 각도의 소임일 뿐이나 한 명씩 차별을 두어 정하기로 하였다.」

고 적고 있다. 지역에 전하는 재인청 이야기에 의하면 화성의 재인청에 속한 인물들이 정조의 능행차시 많은 연희를 담당하였다고 한다.(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증언) 이렇듯 화성시는 수원과 더불어 경기도 굿의 전승지역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러한 화성시 궁평항에서 전통문화 운운하면서 황해도 굿으로 풍어굿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경기도에서는 경기도 굿을 해야 마땅하다.

사실 황해도 굿이 경기도에서만 굿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황해도 서해안 풍어굿’을 ‘서해안 풍어굿’으로 지정을 하고 난 후,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서해안 지역이 황해도 굿으로 진행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에 따라 굿의 제차가 다르고, 지역적인 특색을 가진 굿이 전승이 되어 온다.

황해도는 황해도 굿, 경기도는 경기도당굿과 강신무굿인 경기안택굿, 충청도와 전라북도는 독경자에 의한 앉은 굿, 전라남도 지역은 씻김굿, 남해지역은 남해안 별신굿, 동해안 지역은 동해안 별신굿, 그 지역마다 모두 지역 나름의 특징적인 굿이 전승이 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특징적인 굿들은 각기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한 지역의 전통문화유산을 전승,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나름의 전통적인 것을 찾아 그것을 전승시켜야 마땅하다. 요즈음 지역 축제들이 기획사라는 곳을 선정하여 행사를 맡기고 있는 가운데, 정작 지역의 문화유산은 홀대를 받고 있다.

적어도 전통문화를 계승,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문적인 지식을 자문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지역과는 전혀 무관한 황당한 굿거리 제차를 보면서, 또 하나의 문화가 변질이 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인다. 그것도 재인들의 중심지였던 화성시라는 곳에서.


가끔 바닷가를 지나다가 보면, 해안가에 작은 집이 있는 것이 보인다. ‘당집’이라고 하는 이 집들은 풍어와 바닷길의 안전을 비는 제의를 하는 곳이다. 대개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딴 곳과 달라,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당고사를 지내거나 풍어제는 지낼 때, 아무래도 일반적인 마을의 동제(洞祭)보다 더 많은 금기를 지키게 된다. 바닷길의 무사고와 풍어를 위한 마을의 제의는 3일간이나 하는 것도, 모두 살아가는 동안 평안을 바라기 때문이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 안에도 당집이 있다.


500년 역사의 마량리 당집

마량리 당집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당집에는 서낭을 5분이나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서낭을 모신 것은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일어난 불행한 일 때문이다. 500년 전 이 마을의 주민들은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풍랑이 몰아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단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노파의 남편과 자식이 그렇게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를 못했단다. 그러던 중 바다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용왕을 모셔야 마을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노파는 용왕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었나보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해안가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 해안 백사장에서 널을 하나 발견했다.


두 가지로 전해지는 전설

그 널 안에는 서낭 5분과 동백나무의 씨가 들어있어, 서낭은 당집을 지어 모셔놓고, 씨는 해안가에 뿌렸다고 한다. 그것이 현재의 동백 숲이 되었으며, 마량리 당집 안에 모셔진 서낭이 그 다섯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전설은 두 가지로 전해진다. 그 하나는 동백 숲을 조성한 것은 수군첨사라고 하며, 그 조성시기도 3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서천군의 소개에는 300년으로, 마량리 동백 숲과 당집에는 500년으로 기록이 되어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아마도 그저 지역에 전해지는 전설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른 것인가 보다 하고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마을의 안녕과 풍어, 뱃길의 무사고 등을 기원하는 것이라면, 그 추정연대를 같게 소개를 해야 할 것이다. 마을 노파의 전설은 500여 년 전, 수군첨사의 전설은 300년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어야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아마도 수군첨사의 300년 보다는, 노파의 500년이 당집과 더 어울린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뱃길의 안녕과 풍농을 위한 당제

마량리 당제는 마을주민들이 제가 있기 며칠 전부터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거두어 들인다. 이렇게 집집마다 쌀을 걷는 이유는 모든 가정이 다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그렇게 걷어 들인 쌀을 이용해 제물을 마련하는데, 화주와 선주의 일을 도와주는 화장, 그리고 당제에서 대를 잡는 당굴 등을 선정한다.



제관을 선출할 때는 생기복덕을 가리고, 집안에 산모가 있거나 환자가 있는 집은 가려낸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3일간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당제는 선창제를 시작으로 독경, 대잡이, 마당제, 용왕제, 거리제로 이어지며, 수십 개의 만선기와 풍어기를 당 주위를 꽂아놓는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당집 안에는, 선반에 남녀 각 두 분씩의 모형을 모셔놓았다. 아마도 다섯 분을 모셨다고 했는데, 한 분은 위패로 모신 듯하다. 아직 마량리 풍어제를 보지 못해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는지가 궁금하다. 오랜 세월 풍어와 바닷길의 무사고를 위해 서낭에게 빌던 마량리. 아마 오늘도 뱃길을 지켜주는 서낭님들이 있어, 마을이 풍요로운가 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