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엊그제만 해도 덥다고 난리를 쳤는데 벌써 찬바람이 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인해 날씨가 더 쌀쌀해질 것으로 보인다. 15일 오후,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가 않아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평택 만기사를 찾았다. 이곳은 보물 제567호로 지정이 된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만기사(萬奇寺)는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번지에 소재한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만기사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벌써 만기사를 다녀온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만기사는 많은 불사를 이뤄 가람 안에 전각이 늘어났다. 전형적인 산지가람 형태인 만기사. 주차장에서 걸어올라 천왕문을 지난다.

 

 

고려 태조 때 창건한 사찰

 

만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낮은 산비탈을 깎아 3단으로 전각을 배치한 만기사는, 고려 태조 25년인 942년에 남대사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만기사가 고려 시대에 창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시대를 입증할 만한 것은 보물로 지정이 된 철불인 철조여래좌상 뿐이다.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조 헌종 9년인 1843년에 기록한 <진위현읍지> 불우조에 기록이 보인다. 이 책에는 만기사에 대해서

만기사는 무봉산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물이 샘솟는데, 맛이 달고 차다. 옛날 세조가 이 절 앞에 수레를 멈추고 우물에 가 물을 마시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이나 감로천이라 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우물을 임금이 마셨다고 해서 어정이라고 한다 고 기록하고 있어, 만기사가 조선조에도 법맥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만기사에 기록은 기내사원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기내사원지는 진위현읍지의 기록을 예를 들어 만기사를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보국사 창건문 등에도 만기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기사는 큰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조까지도 사세가 계속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1972년부터 사격을 갖추기 시작해

 

현재 만기사의 당우로는 보물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무봉서원, 명부전, 종각, 감로당, 심우당, 원통전, 요사 등이 있다. 1972년부터 불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만기사는, 주지인 김혜송 스님이 대웅전과 요사, 삼성각을 지어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서요사를 신축하였으나, 1979년 동요가사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고,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만기사의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이 유일하다.

 

길상좌를 하고 있는 단아한 철조여래좌상

 

높이가 1.43m인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철불인 철조여래좌상은 현재는 금으로 도금하였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없고 불신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오른팔과 양 손은 새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원래의 것은 절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큼직하게 있다. 갸름한 얼굴의 세부표현은 분명하고 목에는 3줄의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옷은 우견편단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어깨에만 걸치고 있으며, 어깨는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은 편이다.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라는 길상좌를 하고 앉았는데, 어깨 부분에서는 크게 접어 계단식의 주름을 만들었다. 팔과 다리 부분에도 주름을 표현하였는데 매우 형식적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이 자세는 깨달음을 얻을 때 자세인 항마촉지인이다.

 

상체가 약간 긴 편이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당당한 형태이지만 도식적인 옷주름의 표현과 단정해진 얼굴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평택 만기사. 잠시 멈추었던 비가 또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이 쌀쌀해질 텐데, 답사의 속도를 높여야만 할 것 같다.

‘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 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 자연 많은 소리와 민속이 전승이 되었으며 그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명창 모흥갑의 그림 - 적벽가에 능한 모흥갑은 덜미소리를 내면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초기명창 모흥갑의 고장 평택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우표로도 발행이 된 모흥갑의 판소리그림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림속에 남아있는 모흥갑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얻기위해 폭포독공이나 동굴독공 등 힘든 학습에 열중했다. 남원 운봉에 있는 '국악의 성지'에는 동굴독공을 익힐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겉으로 본 동굴독공 학습장(위) 입구(가운데) 북 등이 놓여있는 동굴 안 학습장소(아래)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평택은 명창들과 인연이 있는 고장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족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평택 진위에 모흥갑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41-5번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인 ‘농성(農城)’이 있다. 이 성은 경기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마을의 북쪽 논 가운데 있는 성이다.

전체적인 성곽의 모습은 타원형으로, 둘레는 약 300m이고 높이는 4m 내외이다. 토축은 비교적 가파르게 조성을 하였으며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다. 무너진 곳의 단면을 보면 붉은색의 고운 찰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흔적이 있다.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쌓은 토성

이 성을 쌓은 이유는 분분하다. 삼국시대에 도적 때문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고려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이 성은 평지에 만든 소규모의 토성으로, 이런 흙으로 쌓은 성곽들은 대부분 초기 국가의 형성단계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들이 그들의 근거지로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우물터가 어느 곳인지는 밝혀지지 않고있다.



임팔급이 쌓았다고 전하는 농성

농성의 남쪽 문터를 바라보고 좌측에 동상이 한 기 서 있다. 바로 이 농성을 축성했다는 임팔급의 동상이다. 그 동상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한국 임씨의 시조이신 충절공 임팔급(林八及)은 신라의 이부상서에 오르셨을 때 적병이 변방을 침입하므로, 공이 분연히 토벌하여 위난을 공정한 공훈으로 팽성군에 봉해지고, 신덕왕조에서 충절공의 시호를 받았다.

충절공은 중국 당나라에서 18세에 등과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병무시랑 예부상서로 있을 때,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칠학사와 함께 서기 850년 전에 우리나라 평택 팽성에 오시어 이 농성을 쌓고 정주하였다.(하략)」




익산임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임팔급은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지내고, 신라에 들어와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평택 용포리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그 후손들이 평택임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익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에 쌓은 성으로 추정

임씨종진회에서 농성 앞에 임팔급의 동상을 건립한 것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이란 나라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쌓는 것으로, 일개인이 성을 쌓는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더욱 이 농성에서 발견된 토기편이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이 평택일대의 관방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파산성에서 ‘건덕3년’이라는 명문을 발견했다고 한다.




건덕3년이면 고려 광종 7년인 965년이다. 2004년에는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비파산성에서 ‘차성(車城)’이라는 명문이 적힌 기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들어 학계에서는 이 농성 역시 고려 때의 토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도 농성 부근에는 조선조의 객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농성부근은 예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곳은 고려 때의 곡창을 보호하는 성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농성(農城)’이라는 명칭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농성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1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 팽성 객사는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객사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어가는 곳이며,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에 중대청을 놓고, 양편으로 동, 서헌을 둔다.

팽성객사는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주택으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해체, 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문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광 등을 드렸으며, 동편을 꺾어 ㄱ 자형으로 마련하였다.



관리청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팽성객사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 양 옆에 동, 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객사 본 건물의 중앙에 마련한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절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진다. 중대청의 지붕은 양 옆에 마련한 동, 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 서헌은 각각 중대청과 가까이에 한 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이 동 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팽성객사의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조 현종 때 크게 중창을 하였고, 영조 36년인 1760년과, 순조 1년인 1801년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한다.

문은 잠가놓고, 쓰레기는 쌓이고

2월 12일 오후 팽성객사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팽성객사를 방문한 것은 2007년 10월 21일이었다. 그 때도 문은 굳게 잠겨있고, 관리사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객사의 대문은 잠을 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그리고 관리인이 묵는 관리동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잠겨 있다.



화장실 앞에는 지저분하게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담장 밑에도 담배꽁초와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동까지 지어놓고 정작 관리는 하지 않는 문화재. 관리동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이 건물은 벽도 떨어져 나가 흉물로 변하고 있다.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가만 두면 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주객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누구나 들어가 동, 서헌 마루에 앉아 쉴 수가 있다.





문화재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인식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무조건 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고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 관리사를 짓고 사용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대체 왜 혈세를 낭비하면서 문화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당 지자체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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