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일(배재대 교수·한국사)은 ‘송병준’을 친일매국노 제1호로 꼽았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1857년(1858년이라고도 하나 실제는 1857년이다)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태어난 곳도 장진이 아니라 서울의 기생집에서 태어난 뒤 아버지가 장진으로 데려갔다 한다). 아버지는 장진군의 속사인 송문수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덕산 홍씨라고 한다.

 


부친 송문수와 본처(제주 고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나, 너댓명의 첩을 두었기 때문에 송병준에게는 배다른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송병준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송문수는 일가를 이끌고 경상도 추풍령 부근에 내려와 정착했다. 서자로 태어난 송병준은 적모 밑에서 심하게 구박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여덟 살 때 어머니로부터 도둑질 혐의를 받고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집에서 쫓겨난 송병준은 동학교도(송병준은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났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믿어지지 않는다)라 칭하는 일단의 도적떼에게 구출되어 3개월 가량 쫓아다니다 헤어진 후,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루는 참외를 훔치러 갔다가 참외밭 주인에게 들키게 되었는데, 도리어 주인이 불쌍하게 여겨 함께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주인이 참외를 팔러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가게 된 송병준은 우연히 민씨 세도가인 민태호(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강교수의 글 송병준에서 첫 단락 ‘배신과 사기의 배후’에 소개한 글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와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늘과 역사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은 일일이 소개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 송병준이 용인 양지에 살 던 집이, 현재는 남양주시 평내동 궁집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용인에 있었던 집을 후손들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하여, 이곳에서는 이 집을 ‘용인집’이라고 부른다.


용인에 이 집이 있었을 때는 그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녹녹치가 않다. 그 세도가의 몰락은 결국 집까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몰락한 세도가의 상징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남양주로 이건하었다. 참으로 세상을 살면서, 왜 인간이 올곧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집이다.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용인집은 구한말의 가옥이다. ㄴ 자로 꾸며진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ㄱ 자로 꾸민 안채가 합해 튼 ㅁ 자형으로 조성하였다. 집 앞에 놓인 석물들도 모두 용인에 있던 것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것을 보면, 당시 이 집의 세도를 알만하다. 이 집은 아마도 송병준이 용인 양지현감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에 중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꺾인 행랑채와 우측의 사랑채가 ㄴ 자 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 우측 끝에는 한 칸을 앞으로 덧달아 누정을 만들었다. 창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 당시 세도가들의 집 꾸밈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지은 집들에서 이런 유리문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지나 ㄱ 자 집이다. 8칸 팔작지붕으로 지은 안채는 잘 조형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올렸다. 방과 대청, 부엌 등을 고르게 배치한 것이나, 치목과 석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당대의 재능이 뛰어난 장인들이 지은 집이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동안 만난 200여 채의 고택. 용인집은 집 그 자체로는 정말로 좋은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가 않다. 이 집에서는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한 매국의 냄새가 짙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냄새가 난다. 그래도 이 집을 돌아보는 것은, 역사는 준엄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헌절인 7월17일에 돌아보았다는 것이 더욱 의미가 갚다.

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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