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인생에 반전을 가져 온 것이 바로 우리 춤입니다. 이제 춤을 춘지는 한 2년 반 정도 되었는데, 결혼을 하고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바깥출입도 잘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우리 춤을 알게 되었고, 그 춤이 제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죠. 제가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남편과 아이들도 적극 후원을 하고 있어요. 춤을 추러 간다고 하면 남편도 아무런 탓도 하지 않아요. 좀 늦어도 무엇이라고 말도 하지 않고요. 이제 제 나이 68세인데, 제 인생에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 같아요.”

 

26일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28에 소재한 수원문화원 지하층. 10여명의 사람들이 넓은 치마를 펄럭이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수원문화원 동아리 모임인 춤사랑의 회원들이다. 음악에 맞추어 입춤을 추고 있는 자태가 아름답다. 팔달산의 꽃소식에 이끌려 올라갔다가 아름다운 춤까지 구경을 하게 생겼다.

 

 

인생에 대 반전을 가져왔다는 김향순씨는 인생이 즐겁다고 한다. 이렇게 즐거운 춤을 출 수가 있어 너무 기쁘다는 것. 수원문화원 민속예술단이기도 한 동아리 춤사랑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7, 이매방류 승무의 이수자인 여지영(43) 선생이 지도를 한다. 40대에서 70대의 회원을 가르치면서도 따끔하게 혼을 내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스승을 닮았다.

 

동아리로 태어난 지 6, 천식도 고쳐 준 우리 춤

 

저희 춤사랑 동아리가 처음으로 시작을 한 것은 6년 정도 되었어요. 현재 수원문화원에는 한국무용 기초반이 있고 동아리인 춤사랑이 있습니다. 현재 회원은 15명 정도가 있는데 딴 곳처럼 이것저것 가르치지는 않아요. 한 가지를 배워도 기본기가 단단하게 제대로 학습을 해야죠.” 춤사랑 지도강사인 여지영 선생의 말이다.

 

춤사랑 동호회 홍의진(56) 회장은 취미로 춤을 시작한지는 20년 정도 되었지만 이제야 좋은 선생님을 만나 제대로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면서 즐겁다고 한다.

저는 마사회에서 우리 춤을 추어왔어요. 등산도 다니고 골프도 치고는 했지만, 요즈음은 우리 춤에 푹 빠져 있어요. 저는 춤을 추면서 50견이나 골절 통증 등은 아예 앓아보지도 않았어요. 여기 계신 우리 회원님들이 모두 그렇지만요. 저희가 지금 선생님을 만나 춤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춤을 추는 시간이면 빠트리지 않고 참석을 한다는 것이다.

 

 

동호회에서 가장 연장자인 서영애(71)씨는 춤을 추기 때문에 늘 행복하고 즐겁다고 하면서, 등산도 하기도 하지만 아직 몸이 건강해 겨울철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춤은 호흡이 중요하기 때문에 호흡기질환도 고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회원 권숙경(52)씨는

저는 춤을 춘지가 꽤 되었는데 한 번도 집에 공연 때 구경을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난 해 남편과 아이들이 정기공연 때 꽃다발을 사들고 왔더라고요. 그 뒤로 남편과 아이들이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항상 천식이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춤을 추고 난 뒤 천식이 없어졌어요.”라고 한다.

 

 

많은 봉사활동도 하는 춤사랑 동호회

 

각 동호회마다 일 년에 한 번은 수원문화원 무대에 올라야 한단다. 그리고 연말에 가족잔치가 열리면 그때도 무대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고.

저희들은 항상 봉사를 하러 다녀요. 문화원 밑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향교에서 잔치가 열리면 그곳도 참석하고요. 수원문화원의 행사가 있을 때는 늘 동참을 하죠. 그러다가 보면 꽤 많은 봉사를 하는 것 같아요.” 홍의진 회장의 말이다.

 

잠시 쉬면서 이야기꽃을 피운 회원들. 그런데 한 회원이 갑자기 손을 들면서 이야기를 한다. 모인 동호회 회원 중에 작고 어려보이는 구자애(53)씨이다.

저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대전예요. 그런데 매주 월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문화원에 와서 우리 춤을 배우고 있어요. 대전에도 춤을 가르치는 곳은 많지만, 이렇게 수원문화원 동아리처럼 제대로 배울 곳이 많지 않아요. 공연준비를 할 때는 매일 출근을 하다시피 했어요.”라고 한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는 한 회원의 말에 절로 부끄러워진다.

요즈음 우리 춤을 가르치는 곳이 상당히 많기는 해요. 그러나 가르치는 사람이 호흡조차 알지 못하면서 춤을 가르친다고 하면 정상적인 춤을 추겠어요. 그런 분들로 인해 우리 춤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파요. 이젠 그런 분들이 춤을 가르치지 못하게 제도적으로 막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멋을 느끼고 빠져들어야 하는 우리 춤이,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 것만 같아요.”

 

비록 전공자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 춤이 좋아서 춤을 추는 수원문화원 우리 춤 동호회 춤사랑’.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팔달산에 활짝 핀 목련만큼이나 그 표정들이 환하다고 느낀다.

수원은 191931일에 일어난 기미년 3,1만세운동 때, 수원 곳곳에서 한 달간이나 계속되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329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건강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기생 33명이 주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청 등에 속해있던 예인들이 기생단속령으로 인해 관기 등으로 전락하자, 기생조합을 설립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 중심에 솟아있는 팔달산. 팔달산은 화성이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팔달산은 수원시민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이 팔달산에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이 기념탑은 196931일 세운 것으로 40년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에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 있다.

 

팔달산 3,1운동 기념탑 정비한다.

 

팔달문에서 화성 성벽을 따라 위로 오르면 서남암문이 나온다. 암문을 통해서 용도로 나갈 수가 있으며, 암문에서 우측방향으로 10m를 가면 3,1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21일 오후 5시 경 수원시장을 위시한 몇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훼손이 된 기념탑을 새로 정비를 하기 위함이다.

 

이번에 새로 정비가 되는 기념탑은 좌우에 새겨져 있는 부조를 청동으로 교체한다. 기념탑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3,1운동 당시 거기로 나와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우측에는 유토피아를 표현한 부조이다. 또한 탑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상석은 비례가 안 맞아 한편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것을 고흥석 재질로 조금 크게 조성한다.

 

 

기념탑 가운데 3,1독립운동 기념탑이라고 쓴 게판도 글씨가 다 지워질 정도로 훼손이 된 것을 새로 제작을 하기로 했다. 또한 기념탑 우측에 마련한 기념탑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문구도 브론즈 재질로 선명한 글씨로 교체한다. 탑 주변에 마련한 긴 의자도 샌딩 및 오일 스테인 도장으로 교체한다.

 

중포산에서 옮겨 온 기념탑

 

원래 3,1독립운동 기념탑은 196931일 우리 선열들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쟁한 성업을 빛내고 선열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최초로 기념탑을 세운 자리는 일제치하의 수원경찰서 사범계 주임인 노구찌소위의 순국비를 허문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것을 3,1동지회가 그 해 1015일 팔달산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탑의 뒤편에 보면 196931일 이 탑을 세울 때 이병희가 지은 <삼일독립운동 기념탑비문>이 적혀있다.

191931. 한국 민족의 울분과 감개가 멍울진 독립선언은 반만년 역사를 이어 온 배달겨레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만방에 선양한 바 있으니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원한의 함성은 지축을 뒤흔들고 자유와 그것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민족의 피맺힌 절규는 온 누리에 자유의 횃불을 밝힌 것이다.(중략)

 

나뭇잎 바람결 한 소리에도 영원한 민족의 생명이 천고의 기가 차오리다. 3,1은 민족의 얼이요 피요 구원의 샘터로 가리어지고 가꾸어지리니 정의의 채찍을 들고 길을 밝힌 그 드높은 3,1의 얼은 자유와 평화, 영광과 번영을 향한 줄기찬 민족의 전진 속에 살아서 움직이며 굳건히 다지어 지리다

 

 

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지금까지도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일본. 그리고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역사마저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도덕 불감증인 나라. 이러한 시기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정비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정비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려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일 오후 5시부터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 입구 매표소앞 로데오 청소년문화공연장에서, ‘1회 로데오 끼 경연대회가 열렸다. 이 끼 경연대회는 청소년들이 마음껏 끼를 발산할 수 있도록 총 8회에 걸쳐 결선을 가졌다. 그동안 댄스 5, 보컬 3, 밴드 3팀 등 총 11팀이 결선까지 올라 경연을 펼쳤다. 이 대회는 남문 로데오상인회원들의 다양하게 후원을 해주어 더욱 풍성한 즐거운 대회가 되었다.

 

남문 로데오상인회에서 주최, 주관을 하고, 수원시에서 후원을 한 이 1회 로데오 끼 경연대회는 지난 6월부터 매월 예선을 거쳐 회 별당 1, 2팀씩 결선에 올랐다. 2일 그 동안 결선에 오른 팀들이 최종적으로 한 무대에서 결선대회를 연 것이다.

 

 

달라지고 있는 남문로데오상가

 

남문 로데오상인회는 지난해인 2012년을 기점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수원의 전통시장 중에서 가장 긴 거리에 조성되어 있는 로데오 상가지역은, 과거에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 때는 극장이 6곳이나 있어 서울 명동과 어깨를 견줄 만한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구 도심권으로 전락하여 쇠퇴되어 가고만 있었던 거리였다.

 

상가 거리에는 빈상점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젊은이들은 이 거리를 떠나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런 남문 로데오 상가를 상인회가 주동이 되어, 2012년 초부터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올해는 팔달산을 오르는 입구에 청소년문화공연장이 개설을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청소년밴드가 공연을 합니다. 그리고 2일 오후 5시부터 그동안 결선에 올랐던 팀들이, 끼 경연대회를 열어 실력을 겨루는 것이죠. 젊은이들을 다시 이 거리로 불러들이기 위해 노력한 끝에 극장도 한 곳 유치를 했습니다. 또한 벽면갤러리와 가로등 갤러리도 운영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옛 젊은이들이 넘쳐나던 로데오 거리의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만들어야죠.” 로데오상인회 김한중 회장의 이야기이다.

 

많은 노력으로 옛 명성 되찾는다.

 

그동안 김한중 회장을 비롯한 상가상인회원들은 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토요일과 일요일 청소년 문화광장에서 열리는 문화행사,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인해 변화가 되어가는 거리, 상인들 모두가 단합으로 빈 점포 되살리기 등으로, 지금은 250여 점포의 상인들이 회원으로 가입이 되어있다.

 

 

상인회에서는 온누리 상품권 환전 등 공영 주차장 무료이용권발급, 매달 회보 발행 등으로 차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남문 로데오거리. 로데오거리는 전통시장에 등록되어 기존 재래시장에서 탈피하여, 상가형 시장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 10대에서 20~30대의 젊은이들을 겨냥하여, 퓨전음식, 주점, 의류, 신발, 노래방, 금은방, 당구장, 미용실, 액세서리, 고기부페, 통닭집, 커피전문점, 구제의류점, 모자전문점 등, 다양한 점포들이 입점을 해 있다.

 

경연대회로 젊은이들 불러 모아

 

2일 세 시간가량 열띤 경연을 벌인 끼 경연대회에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은, 젊은이들을 다시 이 거리로 불러들일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청소년만이 아닌 대학생들까지 참여를 시킬 방안을 모색 중에 있다고 한다. 매월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작음음악회 등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모여 경연대회를 즐기게 되면, 언젠가는 이 거리가 옛 명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침체되어 있던 남문 로데오 거리가, 모처럼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아요. 기대가 큽니다.”

로데오 거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한 상인의 바람처럼, 이곳이 다시 젊음의 거리로 재탄생할 날을 기다려본다. 경연대회장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찰 수 있도록.

 

팔달사’, 이름 그대로 팔달산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팔달산 기슭에 자리한 팔달사는, 전통사찰 제75호로 198810월에 지정이 되었다. 팔달산의 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전각을 조성한 팔달사는, 도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힐링장소이기도 하다. 1031일 오후 찾아간 팔달사는, 가을이 한창 깊게 물들고 있었다.

 

팔달사를 찾는 것은 가끔 용화전 벽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기도 하다. 거만하게 생긴 호랑이 한 마리가 장죽을 물고 있고, 두 마리의 토끼가 시중을 들고 있는 벽화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 중 한 소재인 이 그림을 왜 용화전 벽에 그렸는지, 그 내력이 궁금해서이다. 하지만 언제나 들려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1922년 흥법 비구니가 설립

 

팔달사는 흥법(윤흥자) 비구니가 1922년 토지와 건물을 합쳐 114평 정도를 구입하여 팔달암을 건립한 것이 현 팔달사의 불사내력이다. 정확한 사록(寺錄)이 없어 자세한 팔달사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이채순(평등월) 보살이 일본 조동종 사찰에 입산하여 비구니계(불명 묘심)를 받은 후, 승려생활을 해 오던 중 피부병이 생겨 승려생활을 할 수 없자 환속을 했다고 전한다.

 

그 후 흥법 비구니의 셋째아들인 김용기와 결혼을 해, 1934년에 사찰운영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19406월에 현 재단법인 선학원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 팔달사 재산 전부를 증여한 후 제1대 창건주가 되었다. 이채순 보살의 남동생 범행스님이 1952~2003년까지 주지로 소임을 맡았다.

 

 

당시 주지 범행스님은 1987~20036월까지 제2대 창건주로 승계를 받았으며, 이채순 보살과 범행스님의 노력으로 주변의 토지와 가옥을 사들여 1,200평의 도량에 지금과 같은 팔달사를 이룩하였다. 20066월에는 범행스님의 상좌인 혜광스님이 제3대 창건주로 팔달사를 승계 받은 후, 주지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절 팔달사

 

팔달산의 비탈을 이용하여 대웅전, 범종각, 용화전, 요사, 산신각 등을 배치한 팔달사. 그저 누구나 편히 들어가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다. 1,500평의 대지에 각종 나무들과 꽃들이 가꿔져 있어, 가을이 되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눈이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어, 외국의 관람객들도 심심찮게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10월의 끝에 찾아간 팔달사.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용화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벽화를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용화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범종각이 머리 위에 있다. 팔달사의 범종각은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다. 늘 이 범종각을 볼 때마다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도심 속의 힐링공간 팔달사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라고 해도, 팔달사는 언제나 옛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특히 가을에 찾아가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대웅전 뒤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면 더욱 고풍스럽다. 팔달사를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아직도 뒤편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옆으로 난 소로 길을 걸어 석탑 앞으로 다가선다. 계단 옆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불사리를 모셔 놓았다고 한다. 잠시 머리를 숙인다. 고개를 드니 용화전 옆 향나무와 석탑 앞에 심은 꽃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을 팔달사 경내에서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고 해도 잠시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고, 더욱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도심 속에 산사(山寺)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절이 있을까? 내가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 팔달사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런 산사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로등 갤러리

 

남문 로데오 거리. 수원 화성 팔달문 옆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부터, 수원 향교를 지나 도청으로 올라가는 길까지를 말한다. 이곳이 한 때는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거리를 활보했던 곳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거리에서 자신의 젊음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거리를 젊게 만들었다. 그랬던 거리에 젊은이들이 떠나버렸다.

 

90년대 초만 해도 이 거리에는 극장이 6곳이나 있었다. 그 극장 앞에는 늘 젊은이들이 장사진을 이루었으며, 사람들은 이곳을 로데오거리라고 불렀다. 그만큼 활발하던 거리였다. 31일 찾아간 수원시 팔달구 남문 로데오거리. 이 젊은이들이 떠났던 로데오거리에 젊은이들이 찾아들고 있다.

 

주차장 외벽에 갤러리를 조상공사를 하고 있다. 지역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할 곳이다

 

애경백화점, 롯데쇼핑몰 이겨낼 수 있어야

 

로데오거리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젊은이들로 하루 종일 북적였던 곳이다. 하지만 수원역에 애경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젊은이들이 수원역 앞으로 옮겨갔다. 6개의 극장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는 마치 커다한 동공이 뚫린 듯 허전하기만 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로데오거리에 또 하나의 악재가 겹쳤다. 바로 수원역사 뒤편에 대형매장인 롯데쇼핑몰이 들어오기로 한 것이다. 롯데쇼핑몰이 들어오면 더 어려운 난관이 닥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상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것.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내기 위한 자구책을 상인들과 지역예술가들이 마련하기 시작했다.

 

로데오거리에 있는 작가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2012년부터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아름다운 테마거리 가꾸기를 추진하고 있다. 장기간 경기침체로 폐업중인 상당수의 빈 가게를 활용하여 야간조명을 설치하고, 그곳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서 우범지대로 전락하고 있는 거리를 아름다운 테마거리로 변화시키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로데오 갤러리 1관. 앞으로 이런 작은 전시 공간을 더 마련한단다 

 

거리자체가 갤러리로 변해

 

31일 오후에 돌아 본 로데오거리. 거리 곳곳에 젊은이들이 보인다. 그동안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눈에 띠게 많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거리가 젊게 변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커피숍들이 문을 열고, 나름대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지금이 오히려 우리 로데오거리가 살아날 수 있는 호기인 줄도 모르죠. 상인들이 모두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단합이 잘 될 수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교동창작촌을 중심으로 화가들이 로데오거리를 거대한 갤러리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교동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는 한 주민은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이야기를 한다. 로데오거리 여기저기에는 많은 그림들이 걸려있다. 가로등에도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있어, 무심코 지나는 사람들도 위를 쳐다보고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남문 로데오상인회(회장 김한중)에서는 주차장 외벽에 야외 갤러리를 마련하느라 바쁘다.

 

그동안 문을 닫았단 영화 사영관들도 다시 시작한다 

 

이 갤러리에도 지역의 화가들이 작품을 그린다고 한다. 로데오거리 한편에는 로데오 갤러리 1이라는 작은 전시 공간이 생겼다. 지역 작가들의 그림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앞으로 자투리땅을 이용해 이런 갤러리를 더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과거의 젊음의 거리를 되찾기 위한 지역주민들의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지금은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역주민들과 상가번영회, 지역의 작가들이 하나로 힘을 합칠 때, 곧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더구나 그동안 굳게 문을 걸었던 중앙극장이, 12월 초에 개관을 하려고 준비 중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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