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지동 일대의 골목길에 조성중인 벽화길. 그려지는 그림들도 테마를 주제로 해서 연결을 시키고 있지만, 그 벽화 길에서 만나는 조형물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지동은 화성을 가장 가까이 두고 조성된 마을이다. 건물의 높이 제한은 물론이려니와, 개, 보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곳이다.

 

지동시장에서 제일교회로 올라가 창룡문(화성의 동문)쪽으로 난 날망 길을 흔히 ‘용마루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을 사이에 두고 화성 쪽으로 난 곳은, 화성으로 인해 모든 규제를 받는 곳이다. 골목은 비좁고 음습하며, 집들은 30년을 훌쩍 넘긴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지동을 벽화로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지동이 날마다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딴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구조물들

 

지난 해 조성한 2년 차의 벽화 골목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창룡문 방향으로 화성을 바라보고 조성중이다. 이 벽화 길의 총 감독을 맡은 유순혜 작가는 테마가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저 처음 지동 벽화골목을 돌아보다가 보면, 조금은 밋밋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 해 그림이 그려진 600m의 벽화골목 중에는 아직 미완선 된 부분들이 있다. 그런 미완성 된 부분도 차츰차츰 정리 중에 있다. 그리고 새로운 IT골목 벽화가 조성 중에 있다. 올해는 더 많은 느낌이 있는 벽화길이 조성된다고 한다. 기대가 크다.

 

 

그런데 지동 벽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림보다 더 눈에 띠는 것들이 있다. 바로 골목길에 조성 중인 구조물들이다.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과 유순혜 작가에 의해서 조성 중인 이 구조물들은, 골목길을 찾아온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야말로 다양한 변화를 하고 있다.

 

벽에 붙은 평상, 담장 위에 꽃 등

 

지동 벽화골목을 찬찬히 돌아보면 재미있다. 어느 집 담장 밑에는 나란히 화분이 놓여있다. 그 화분들이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화분이 아니고, 목조로 특별 제작한 화분들이다. 초록색에 가까운 목조 화분 위에 핀 꽃들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담장 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한 화분들도 꽃을 피우고 있다.

 

 

예전에는 철조망으로 벽이 벌겋게 녹물이 든 집의 담장 위에도 화분이 만들어졌다.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선 화분은, 담장 위에 화단이 하나 생긴 듯하다. 그리고 그 위에도 꽃들이 자라고 있다. 어느 곳에는 청보리가, 어느 곳에는 야생화들이 자라나고 있다. 지동 벽화 길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역시 이 골목의 압권은 바로 담벼락에 매달린 평상이다. 평상시는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가, 주민들이 모여 다모라도 나누려면 손잡이를 돌리면 그 담벼락에 붙은 나무다 내려와 평상이 된다.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다.

 

“정말 지동 벽화 길은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벽화 길 조성을 다 마치면, 그 길이가 장장 3km가 넘는 우리나라 최장 벽화 길이라고 하니, 정말 기대가 됩니다.”

 

용인에서 이곳을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왔다는 전아무개(남, 41세)는 토요일(6월 1일) 오전 일찍부터 벽화 길을 돌아보고 있다가 이야기를 한다.

 

 

벽화 길의 압권은 아름다운 보도블록과 꽃들

 

그러나 지동 벽화 길에는 또 하나의 압권이라 할만한 곳이 생겨났다. 아직은 짧게 한 구간만 조성을 했지만, 앞으로는 많은 길들이 이렇게 바뀐다고 한다. 보도블록을 예쁘게 깔아놓고, 그 한편에 작은 꽃들을 심어 꽃길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도블록 사이에는 잔디를 심어, 그 길을 걷기만 해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동만의 벽화 길. 지동만의 아름다운 골목, 그리도 지동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 지동 벽화 길을 찾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지동은 찾아와 벽화 길 조성을 배워가는 지자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동의 모든 벽화 골목 조성이 다 끝나게 되면,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골목길이 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 문화센터 등을 찾아다니면서 서예로도 사람들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애를 먹고는 했죠.”

 

올해로 서예를 시작한지 30년이 되었다. 예전에는 미술대학에 서예과가 없었다. 단지 취미생활로 시작한 것이, 서예가 좋다가 보니 어쩌다가 서예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단다.

 

예전에 정보통신부에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서예와 접하게 되었어요. 글씨를 쓰는 것을 워낙 좋아해, 틈이 나는 대로 서예에 몰두했죠. 취미생활을 하던 서예가, 저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죠. 글을 쓰는 것이 너무나 좋아, 1994년에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해

 

처음에는 한문과 한글을 구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저 묵향을 맡으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체계적인 공부가 하고 싶어,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에 서예전공으로 미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에 공무원 생활을 접고 서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연금을 포기하고 퇴직금으로 서실을 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난관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서예에만 몰두를 했다.

 

한문과 문인화도 그렸지만, 글을 쓰다가 보니 한글에 대한 애착이 생겼습니다.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글의 서체에 많은 연구를 하게 된 것이죠. 지금 세계는 우리 한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글의 세계화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원 윤경숙(, 54) 선생은 서예가 점차 침체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워,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실을 열어 한글 서체를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접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생활서예에 심취하다

 

저는 생활서예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다가서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죠. 요즈음은 글씨를 갖고 캘리그래피라고 하여서 아름다운 글을 씁니다. 캘리그래피는 전통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아름다운 글씨를 말하는 것이죠. 이제는 글씨가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의 기능을 뛰어넘어, 감성까지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감성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캘리그래피가 되는 것이고요

 

원래 캘리그래피(Calligraphy)'아름다운 서체'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 '칼리그라피아(Kalligraphia)'에서 비롯된 말이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캘리그래피를 멋짓글씨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사회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음이 메말라 거칠어지고요. 이런 사람들을 서에로 치유를 할 수 있습니다. 왜 음악이나 미술은 치유가 되는데, 서예는 안된다고 할까요? 저는 석사논문을 <서예치료에 관한 연구>로 받았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분들이 서예를 하다가보니, 마음이 치료가 되는 듯하다고 합니다. 저도 서예를 하면서 치유가 되는 것을 느꼈고요.”

 

내면에 담고 있는 감성을 표현하는 것

 

그동안 국전초대작가가 되었지만,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현재 수원미협 서예분과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서원 윤경숙 선생은, 대한민국미술대전, 경기도미술대전, 전국휘호대회, 대한민국서예한마당, 공무원미술대전, 추사선생추모휘호대회 초대작가, 한국미협, 강물회, 묵향회, 서예치료학회 등에서 활동을 했다.

 

 

한글서학회는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단체입니다. 우리의 우수한 한글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홍보를 하는 것이죠. 저는 단지 한지에 글씨만을 갖고 작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버티컬이나 스탠드, 스카프, 방석 등 다양하게 한글을 사용하죠. 저희 공방 명칭이 먹즐방입니다. 먹을 즐기는 방이라는 뜻이죠.”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 2층 아트포라에서 만날 수 있는 서원 윤경숙 선생은, 다양한 소재를 이용해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표출해 내고 있다. 영동시장 2층 전시실에서는 현재 윤경숙 선생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고 싶은 사람은, 그곳에 들려 우리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청소년들이 마음껏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수원화성의 매표소가 있는 곳 앞에 있는 광장에, ‘남문 로데오 청소년 문화공연장이 개장을 한 것이다. 516() 오후 2시 이곳에는 200여명의 관계자와 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흥겨운 개장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남경필, 수원시의회 의원들과 윤건모 팔달구청장, 전통시장 상인회장 및 지역주민들이 함께 청소년 문화공연장의 개장을 축하해 주었다. 오후 1시부터 식전 축하행사로 풍물패 공연 및 브레이크 댄싱 등이 선을 보인 후 2시에 개장식 공식행사로 테이프 커팅 등이 이어졌다.

 

 

창업과 기업의 거점으로 삼을 것

 

김한중 로데오시장 상인회장의 간단한 경과보고를 마친 후 축사에 나선 염태영 수원시장은, 로데오 거리는 과거 청소년들이 넘쳐나던 곳이었는데 앞으로 그런 곳으로 다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로데오 거리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이곳이 지금은 쇠락했지만 수원시에서는 이 거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창업지원센터를 이곳에 열고나서 수원시는 전국 모든 지자체 중 일자리 창출의 대상을 받았다. 2억 원이라는 상금도 받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이 거리에 비어있는 건물들을 시에서 매입을 해, 창업을 하는 젊은 인력들이 계속 이 거리에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게 할 것이다라면서

 

 

로데오 거리가 창업, 기업을 하기 좋은 곳, 젊음이 끊임없이 이 거리를 찾아들어 마음껏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이어서 청소년 문화공연장에는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찾아들어 수준 높은 공연을 펼침으로써, 이곳이 문화콘텐츠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창업과 문화의 거점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를 하기도.

 

새롭게 탈바꿈한 문화공간

 

이어서 염태영 시장은 이 문화공간이 전통시장과 골목경제를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상인들이 노력을 해달라고 재삼 당부를 하기도.

 

 

이어서 축사에 나선 국회의원 남경필 의원은 이곳은 내가 어릴 때 자라고 뛰어놀던 곳이다. 이 문화공연장이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잘 활용되어 지역문화를 선도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수원시의회 민한기 부의장은 수원은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이 많아야 한다. 의회에서도 이렇게 청소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적극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도.

 

청소년문화공연장 개장식의 3부에서는 푸짐한 상품과 함께 가수들이 출연하여 개장식을 축하해 주었다. 한창 낮 기온이 올라 뜨거운 날이었지만, 개장식에 참가한 주민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주변 그늘에는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 청소년 문화공연장의 개장식을 축하해주었다.

 

 

근처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는 한 주민은

청소년문화공연장이 들어선 이곳이 그동안 노숙자들이 찾아들어, 이 거리를 찾아 온 사람들도 비켜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45천만원이라는 많은 예산을 들여 6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꾸며 준 수원시에 감사를 한다. 아무쪼록 이 공간으로 인해 로데오거리가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도.

수원 영동시장 아트포라는 무한 변신 중

 

지난 해 1025, 영동시장 상가 안 비어있던 2층이 새롭게 단장을 했다. 전통시장인 영동시장이 공간 안으로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변신을 시도하였다. ‘아트포라는 예술을 뜻하는 ‘art'와 라틴어로 시장을 뜻하는 복수형인 ’fora'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아트포라는 영동시장 내의 상인들과 예술가들이 연계하여, 예술적 상품을 개발하고 지역주민이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 실행하는 창작공간이다.

 

수원 화성의 팔달문 앞에는 9개의 시장이 모여 있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조하면서 장시를 연 곳으로, 그 역사가 2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동시장은 여러 장들과 함께 모여 있는 장으로, 200여 년 전부터 장터였던 곳이기도 하다.

 

 

문밖시장, 성외시장 등으로도 불려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팔달문 앞의 왕이 만든 시장은 그 영역으로 보아, 지금 팔달문시장 인근의 장들이 모두 한 장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동시장은 1919년 이후 문밖시장(팔달문 밖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성외시장(성 밖에 개장이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 등으로 불리며 4일과 9일에 장이 서던 곳이다.

 

영동시장은 2~30리 밖에서도 이용하는 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영정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5일장으로 열리던 시장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동시장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영동시장은 수원천을 끼고 상가와 상점이 발달되어 있으며, 2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점이 되어있다.

 

 

영동시장이 들어서 있는 팔달문 앞의 장은 모두 9개이다. 하지만 수원의 전통재래시장 22곳 중, 거개가 팔달구인 팔달문 인근에 밀집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21곳의 장 중 팔달구에만 14개소의 장이 있으며, 권선구 3개소, 장안구 4개소, 영통구 1개소가 자리하고 있다.

 

한복의 맵시에 취할 수 있는 영동시장

 

영동시장은 1층에 자리하고 있는 170여 개의 점포 중에서, 40여 개 정도가 한복을 취급하는 점포들이다. 그래서인가 영동시장은 예전부터 한복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것이 점차 한복이 급격한 수요의 감소가 오고, 점차 사람들이 편리한 옷을 선호하게 되자 한복의 입지를 재조명하고자 무단한 노력을 했다.

 

 아트포라 공간과 전시공간인 아라

 

또한 대중에게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2001년부터 ()영동시장의 주관으로 한복맵시대회를 열고 있기도 하다. 힌복맵시대회는 영동시장 내에 입점을 한 한복집들이 정성들여 제작을 한 한복을, 모델로 지원을 한 시민들과 함께 선보이는 축제이다. 이 한복맵시대회는 매년 화성문화제 기간 중에, 팔달문 지역 시장 거리축제로 선보인다.

 

아트포라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처음 아트포라가 영동시장 2층에 자리를 잡을 때는, 서편 일부 밖에는 자리하지 못했다. 개관 당시에는 전통시장 예술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모두 9명의 예술가들이 힘겹게 참여를 하였다. 개관 당시에 이곳에 입주를 한 작가들은 사진 조성근, 한복 이정화, 금속공예 어진선, 도자공예 안소원· 허영남, 서예 윤경숙, 회화 김춘홍, 한지공예 이혜순, 전통문양디자인 최윤경, 염색·직물공예 이정하 작가들이다.

 

아트포라의 모든 공방은 안이 들여다보이게 조성을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전시 공간처럼 보인다

 

개관을 하고 난 뒤 이제 6개월 남짓. 아트포라가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2013년에는 330일부터 시작해 1019일까지 토요문화체험부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체험은 토요일 15시부터 17시까지 운영을 하며, 금속책갈피 만들기, 종이죽으로 포장용기 만들기, 투명 장바구니 만들기, 흙으로 엽전 만들기, 단오부채 만들기, 꽃바람개비 만들기, 나도 화가다 등 다양한 체험이 마련되어 있다.

 

날이 따듯해지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영동시장의 창작공간인 아트포라’. 첫날 체험에 아이들과 함께 참가를 했던 박아무개(, 35. 서울)

 

이렇게 전통시장 안에 아름다운 작가들의 공방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앞으로 재래시장들이 이렇게 예술을 끌어안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한다. 그것이 예술과 재래시장이 동반 발전을 할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인 듯하다고 한다.

 

 

재래시장인 영동시장 안의 작가들의 산실인 아트포라.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더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기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하는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더 한층 발전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산실인 아트포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43년 동안 쇠를 다루면 산 정대봉 대장장이

 

수원시 팔달구 지동시장은 요즈음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곁에는 이름이 없어 무명시장이라고 호탕하게 웃는 장사꾼이 있는 시장이 있다. 점포라야 한 30여 곳. 그 중에는 문을 닫은 지가 오래인 상점도 있다. 지동시장에서 남수문 곁으로 터진 성 밑을 지나게 되면 만나게 되는 골목시장. 이곳은 남수동에 속한다.

 

327일 오후에 시장구경에 나섰다. 수원천 옆에 자리한 수원사라는 절집 담을 끼고 몇 개의 노점상이 줄지어 있고, 그 앞쪽으로 소망세광교회 앞으로 이어진 골목으로 점포들이 있다. 한가한 듯 한편에선 문 닫힌 점포 앞에서 윷놀이들도 하고 있다. 인구 120만의 대도시 수원에, 이렇게 한적한 시골의 장거리 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시장 이름이 없어. 그냥 무명시장이랄까!”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생선가게며 과일상회, 야채, 신발가게, 기름집에 옷 수선집도 있다. 허름한 식당도 있고, 열쇠집도 있다. 그야말로 어느 작은 면단위의 장거리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의 백미는 일방통행 길가에 있는 1960대의 점포들이다. 대장간, 솜틀집, 국수집들이 나란히 옛 간판을 간직한 채 자리하기 때문이다. 장을 느릿하게 걸으면서 구경을 한다.

 

이 장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장 모르지 이름이 없어. 그냥 무명장이라고 불러

무명장요?”

이름이 없으니 무명장이지

 

 

호탕하게 웃는 웃음을 뒤로하고 골목길을 빠져나온다. 대장간 앞으로 가니, 마침 시뻘겋게 불을 지피고 한창 쇠를 달굼질 하고 있다. 몇 번이고 달굼질을 하고 물에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가게 앞에 서 있는 손님에게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산에 약초를 캘 때 쓰려고 주문을 했더니 호파라고 부른단다. 괭이처럼 캐는 것이 아니고 식물 밑으로 집어 넣어 그대로 떠 올릴 때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

 

70명 직원을 거느렸던 정대봉 장인

 

간판에는 붉은 글씨로 동래철공소라고 쓰여 있다. 화덕에는 뻘건 불이 연신 불꽃을 뱉어낸다. 올해 62세라고 밝히는 대장장이 정대봉씨. 이곳에 와서 풀무질을 한지 벌써 15년째란다. 원래 이 집은 처삼촌인 고 김달봉이 40여 년간 운영을 하던 철공소였다. 그것을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본인이 맡아서 한다는 것.

 

 

저요 한 때는 부하직원을 70명이나 거느렸었죠. 용인 풍덕천 쪽에 있는 회사에 공장장이었는데, 일본도 자주 다녔고요. 그때 제 월급이 350만원에 공장장 수당 30만원을 더 받았어요. 그리고 차도 한 대 내주고요

그런데 왜 그만두셨어요.”

그곳에 물류창고가 들어왔거든요. 그 때는 좋았죠. 그래도 할 일은 다했죠. 아들 둘 다 대학 보내고 장가보내면서 아파트 한 채씩은 해주었으니까요. 원래 제가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었나 봐요.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세 번만 분해하면 바로 다 조작을 했거든요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공장에 들어가 공장장이 쇠를 다루는 것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실습을 마쳤단다.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을 한 사람이 공장장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저 그래도요. TV에도 여러 번 나오고, 신문에도 자주 났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와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마 지난 세월이 생각나는가 보다. 요즈음은 직접 찾아와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단골들 때문에 열심을 낸다고 한다.

 

항상 부지런함이 몸에 밴 대장장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날은 하루 종일 서 있어요.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문을 닫죠. 음식점의 칼, 미장용 가위, 농사꾼의 낫, 심지어는 무속인들의 작두까지 만들어 보았다죠. 아마 나만큼 그동안 쇠를 많이 다룬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재미있느냐는 물음에 재미없었으면 이 날까지 쇠를 다루고 있겠느냐고 하면서, 지금도 오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5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동래철공소. 그리고 그곳에서 2대를 물리며 15년간 쇠를 다룬 대장장이 정대봉씨. 5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철공소의 모습에서, 옛 기억 하나를 끄집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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