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가끔 잘 가는 집이 있다. 광교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보면 출출하기도 하다. 그럴 때면 산 밑 버스 정류장 바로 위에 있는 식당을 찾아간다. 이 식당을 자주 찾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갑갑한 건물 안을 벗어나, 나무 밑에서 한 끼 식사를 즐기는 여유. 말로만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족한 듯하다.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47-2에 소재한 ‘광교헌’. 한마디로 이 집에서 늘 즐겨먹는 것이 보리밥이다. 보리밥에 나물 몇 가지 넣은 후 고추장과 참기름에 비벼서 먹는다. 함게 나오는 된장과 우거지선지국 또한 이집만의 별미이기도 하다.

 

 

어느, 시골의 툇마루 같은 집

 

20년 넘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계속하다 보니, 이젠 겉으로 집 모양만 대충 보아도 그 집의 손맛을 알 정도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자그마치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20년이 넘게 전국 방방곡곡을 발품을 팔았다.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물론 음식이라는 것이 ‘시장이 반찬’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왕이면 정이 가득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맛있는 반찬보다 낫다. 하기에 난 겉으로 보기에 으리으리한 집은 왠지 불편하다. 그것보다는 그저 마음 편하게 다리 쭉 뻗고 가끔은 지인들과 곡차 한 잔을 하면서 떠들 수 있는 자리가 좋다.

 

 

 

초가집의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그저 숲 속에 길게 늘어놓은 탁자가 마치 시골 집의 툇마루와 같이 정겹다


광교헌은 들어가면서부터 기분이 좋다. 이름 그대로 광교에 있는 마루라는 뜻이다. 마루란 무엇인가? 그저 길을 가다가말고 편안히 다리를 뻗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내가 이 집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어느 시골집의 툇마루와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난 늘 이 광교헌을 이렇게 비유한다.

 

뙤약볕 길을 걷고 있다가 만난 깊은 산골마을의 시골 길.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폴폴 나는 시골길을 걷다가 만난 초가집 한 채. 사립문조차 닫을 필요가 없는 산골 집에 툇마루. 그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안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시원한 냉수 한 그릇으로 땀을 식히는 그러한 기분이 드는 광교헌이다.

 

 

 보리밥을 비벼 먹을 수 있도록 내주는 나물과 아주 시골스런 반찬들


아주 시골스런 밥상에 군침을 삼키다.

 

나무를 그대로 마당에 두고 길 탁자를 놓은 곳. 그곳이 바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한 편에선 고기를 숯불에 굽고 있지만, 훤히 터진 곳이라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한편 나무가 가까운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주문을 하고 나면 내오는 반찬들. 참 시골스럽다. 직접 만든다는 묵과 두부, 그리고 생김치와 정구지무침, 된장과 우거지 선지국. 그리고 쌈과 고추 등이 이 집 반찬의 다이다.

 

보리밥 한 그릇에 비벼먹을 수 있는 나물 몇 가지. 그것을 모두 큰 보리밥 그릇에 집어넣고 썩썩 비빈다. 그리고 한 숟갈 크게 떠 입안에 넣는다. 보리라고 해서 조금은 껄끄럽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입안에 가득한 나물과 보리의 향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이 집에서 내주는 우거지 선지국은 막걸리 한 잔을 함께 하기에 딱 좋다


아마 답답한 실내에서 이 음식을 먹었다면, 이보다 맛이 덜할 듯하다. 그저 시골의 초가 집 툇마루와 같은 곳에서 먹는 음식이기에 그 향이 더한 듯한 것일 테지.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산 새 한 마리가 푸드덕하며 날아간다. 저 새도 밥 때가 되었는지.

한국민속촌의 남부지방 대가인 9호 집은, 한때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런 사극에서 많이 보아왔단 집이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이 집이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한창 인기가 좋은 성균관 스캔들은, 방송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켰으니 말이다.

 

이 9호 집의 안채를 돌아보면, 참 ‘대가집이라고 하는 것이 별나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고택의 형태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예술을 좋아하는 고장에서 이건을 했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의 무식함에서 조금은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ㄷ자형의 구조물, 그러나 참 놀랍소

 

호남 대가집의 안채를 보면 참 놀랍다. 이 집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아무리 좀 다른 대가집들의 집의 구조가 남다르다고 하지만, 이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제9호집은, 그런 집들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저 이 안채 하나만 갖고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우측에 돌출이 되어있는 ㄷ 자형의 집은 좌우 대칭이 다르다. 좌측이 조금 짧게 돌출이 되어, 전체적인 집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했다. 좌측은 돌출된 부분에 마루를 앞에 두고, 작은 방을 드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상당이 넓은 부엌을 두고 있다. 이 집 부엌의 크기로 보아, 지역의 대가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안방을 중앙에 둔 안채

 

부엌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식솔이 많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부엌의 옆으로는 안방을 두고, 그 옆에 대청을 둔 특이한 형태로 꾸며졌다. 즉 안채의 뒤편 - 자 부분의 중앙에 안방을 두고, 동편으로는 대청을, 서편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앞뒤로 툇마루를 놓았다.

 

 

 

 

이 호남의 대가집 안채의 아름다움은 바로 동편의 돌출된 날개부분이다. 대청과 연결이 된 이 부분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을 드렸다. 툇마루로 안방서부터 ㄱ 자 형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이 날개부분 끝에는, 높임 누마루를 놓고 난간을 두른 정자를 하나 두었다. 정자와 같은 형태의 누마루를 깔아 멋을 더한 것이다.

 

방의 옆에는 반드시 마루를 깔고, 안채의 뒤편인 대청과 안방의 뒤에도 마루를 깔았다. 대개 집 뒤편은 소홀한 편인데 비해, 이 호남 대가집의 경우 뒤편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창호 등을 섬세하게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집의 치목 하나를 보아도 예사집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안채를 바라보고 우측으로는 광채가 -자로 자리를 하고 있다. 4칸인 광체는 안채 쪽의 두 칸은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개방된 핫간 한 칸과 그 끝에 한 칸의 광을 드렸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집이다. 대문채 역시 대문 양편에 방을 드려, 식솔들이 다양하게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많은 탤런트들이 향내를 풍기고 갔을 이 호남의 대가집. 참 이 정도 집이라면 지금 당장 이 곳에서 살라고 해도 반가울 듯하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만나기 쉽지 않은 민속촌 안의 제9호집. 두고두고 분내가 풍겨날 듯한 집이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이웅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패드2’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6월 7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찾아간 집이다.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이며 마을의 전주이씨 향조이기도 한, 춘성전 이담손(1490년생)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이 집을 지은 것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지었으니, 벌써 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고택이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방형으로 구성된 대지는 북에서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군데군데에 축대를 동남향으로 쌓고 그 기단 위에 집을 앉혔다.


대문과 효자정려. 이 사진은 모두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하였다.

대문 위에 걸린 효자 정문

밖에서 보기에도 집은 넓지 않은 터에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삼문으로 구성된 대문은 이 집의 품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가의 일면을 알아 볼 수 있는 이웅재 고가는, 대문 위에 효자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이문주에게 내려진 이 현판에는, 「有明朝 孝子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之閭」라고 적혀있다.

문간채도 이 무렵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며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집안은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있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대문을 들어서면 5단의 장대석 축대 위에 올린 사랑채가 보인다.




 

안 행랑채 동편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1864년에 세워졌다. 기록에는 고종 1년인 1864년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사랑채는 동편으로 두 칸 마루를 놓고, 서쪽으로는 두 칸 방을 드렸다.

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빼 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있게 지어진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안담으로 연결이 되어있으며, 뒤편으로는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을 내어 놓았다. 그 뒤편으로는 높게 축대를 쌓고 지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높임마루를 놓아 책방을 꾸민 안 행랑채가 자리한다.



양편에 날개를 단 안채 공루가 특이 해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동서 양측에 날개를 달아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기단을 높이고 그 위에 앉혔으며, 날개채는 단을 낮게 놓았다. 하기에 날개채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보다 낮게 조성이 되었다. 안채는 큰방의 동측에 머리방 대신 도장을 설치하고, 도장 남측에 마루를 두고 이어서 방을 드렸다.

안채 대청을 바라보면서 우측날개에도 방을 따로 두고 있다. 상부는 외부를 판벽으로 두른 공루이고, 하부는 아궁이를 둔 공간을 배치하였다. 큰방의 서쪽에는 찬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현재는 실내의 공간은 조금 바뀐 듯하다. 이러한 가옥의 배치나 구성은 딴 집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이다.




안채 전면에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가 날개를 벌려 안채를 감싸고 있다. 이는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방아실과 안광이나 책방 등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의 배치는 풍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채로 불어드는 바람을 막지 않기 위함인가 보다. 방아실의 벽을 타고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게 조성하였다.

넓지 않은 대지를 이용해 건물배치를 한 이웅재 고가. 나름대로 건물배치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산란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가옥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제대로 된 답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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