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 서운산은 남으로는 서운면 청룡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북동으로는 석남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석남사는 가파른 경사에 층계를 놓고, 전각을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운치 있는 절이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19년인 680년에 승려 담하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성왕 18년인 876년에 염거화상이 석남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고려 광종의 아들인 혜거국사가 후에 크게 중건을 했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서운산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아 헤매다

 

마애불이 있음을 알리는 이졍표

 

석남사에서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보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석남사까지는 300m, 정상까지는 1.8km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애불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금광면 상중리 산22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 높이 5.3m의 이 마애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남사를 한 바퀴 돌고 종무실에 가서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대답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애불이 500m 앞에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우측으로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직진을 해도 역시 산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마애불을 안내하는 표시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리를 건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으로 난 다리를 건너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500m 이상을 더 걸었을 것 같은데도, 마애불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새 산 정성이 바로 앞에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마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나,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편이라는 것이다. 다리 건너에 작은 이정표 하나만 세워주었어도, 이런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석남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석남사에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의, 자연암벽에 입상을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길이 갈라지는 마애불의 밑에서부터 돌로 탑을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이 지역의 마애불들이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를 한 것에 비해, 석남사의 마애불은 전체를 돋을새김 하였다.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전체적으로는 육중한 느낌이다. 암벽에 꽉 차게 조각이 된 마애불. 3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놓았는데, 그 모습이 투박하다. 그리고 몸에도 신광이 표현이 되어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겼을 텐데, 아직도 뚜렷하게 형태가 남아 있다.

 

발가락이 시리겠네요

  

얼굴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두광과 삼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연화대 위에 올라선 마애불, 법의 밖으로 발가락이 돌출이 되어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연화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발가락 부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경스런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양 발가락의 표현이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돌출이 된 연화대 위에 법의에서 벗어난 발. 그리고 한 편에 다섯 개씩의 발가락.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사실적이다. 법의 속에서 삐죽이 내민 열 개의 발가락. 전체적으로 무거운 마애불을 이 발가락이 희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모두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육계는 낮고 어깨는 넓게 표현을 하였다. 목에 보이는 삼도는 필요 이상으로 두텁게 해, 마애불의 인상이 투박하면서 무겁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덥고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U 자형의 주름을 이룬다. 주름은 복부 밑까지 내려오다가, 다리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석남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 그 모습 그대로

 

내의의 가슴께 묶은 매듭. 투박한 모습이며 밑으로 잡은 주름도 투박하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묶었으며, 밑으로는 주름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매듭이나 주름도 상당히 투박해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내영인과 같은 형태의 수인이지만, 한 팔을 아래로 하지 않아 내영인은 아니다. 일설에는 법설을 할 때의 수인과 같다고 한다. 양 팔에도 법의가 팔에 걸쳐있는 형태다.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산을 한 바퀴 돌아 찾아와서인가, 저녁 햇살이 비치는 마애불의 모습이 유난히 자비로워 보인다. 인간세상 고통을 지금이라도 다 가져갈 듯한 미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것인지.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향이 연기를 허공에 퍼트리고 있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석조여래입상을 찾은 날, 한 여인이 쉬지 않고 합장을 하고 석조여래입상의 전각을 돌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 빌고 있는 것인지. 하기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으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원이든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후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청풍 석조여래입상은 얼굴 모양이 풍부하고 자비로운 상이다.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코는 한편이 마모가 되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되었으며, 콧방울이 무너져 내렸다. 인중이 뚜렷하고, 양 볼은 두툼하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양 어깨까지 내려져 있다.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상이다. 그러한 석조여래입상의 주위를 그렇게 오랜 시간, 쉬지도 않고 도는 이유는 무엇인지.

 

"날이 많이 차네요."

"예."

"무슨 소원을 그렇게 비세요."

"아이 아빠가 많이 아파서요."

"그래요. 그렇게 열심히 빌면 좋아지실 겁니다."

"예,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여기 와서 이렇게 빌고 갈 때마다 많이 나아지는 듯해요."

"다행입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보물 제546호 청풍 석조여래입상. 높이 3,41m의 이 여래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더 이상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정성을 다해 남편이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분에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다. 석불에 정성을 드린다고 정말로 나아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란다면, 무슨 소원인들 이루어지지 않을까. 아마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투박한 모습에서 전해지는 정다움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목이 두툼하여 자칫 비대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석조여래입상. 법의는 앙 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걸치고, 안에는 내의를 받쳐 입었다. 배에서 매듭을 지어 V 자 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두발은 발가락까지 표현을 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밑에는 대좌를 밟고 있다. 전체가 일석으로 조성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입상이다. 누군가 단주 하나를 발 등에 올려놓았다. 아마 저렇게 단주를 놓고 간 사람도, 마음속에 간절히 비는바가 있었을 것이다.

 

청풍 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석조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는 투박하다. 그럼에도 그 안에 자애로움이 있다. 생명이 없는 돌로 조성한 석불에서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장인의 정성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읍리에 서 있던 것을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전각을 조성하고 복원을 한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너무 깊고 굵게 표현이 되어 비대한 감마져 있다

통견으로된 법의는 v 자형으로 발목까지 덮고 있다.

누군가 발들 위에 단주를 올려놓고 갔다.

 

사연도 많은 문화재

 

전국을 다니면서 불교문화재와 고택, 정자, 고분, 능원 등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다녔다. 벌써 그 시간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늘 밖으로 불러낸다. 자다가도 문화재 답사라면 벌떡 일어나 달려가고는 했다. 그 많은 문화재 안에는 정말 따듯한 이야기도 있었고, 가슴 시린 사연도 많이 있었다. 그 많은 사연을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어느 문화재는 일부러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어느 문화재는 파손된 부분을 보수를 하면서 엉망으로 해놓아, 헛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이 춥거나 덥거나 누군가 문화재를 정성스럽게 돌보는 사람들도 있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문화재를 찾아 길을 떠나지만, 이번 답사 길은 제발 마음 아픈 일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도 문화재의 인녕과 함께, 이 여인 제발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전히 비는 마음이다.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경내에 자리한다. 국보 제1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량수전 앞에 서 있다고 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라고 명명하였다.

 

석등은 흔히 ‘광명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석등은 절의 가장 중요한 곳인 대웅전 앞이나 탑과 같은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간주석과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단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문화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고 해도, 그 균형이 잘 맞는다고 느낄 정도이다. 4각으로 조성한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중인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간주석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인다.

 

간주석의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받침돌의 끝마다 조각한 귀꽃이 더 없이 아름답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이 보살상들은 금방이라도 불을 밝히고 석등을 빠져 나올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석등은 간결하면서도 조각 하나하나가 세련된 미를 자랑하고 있다.

 

뛰어난 균형미에 아름다운 선

 

지붕돌도 역시 8각이다. 지붕돌은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 부석사 석등은 그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무량수전 측면에서 석등을 바라본다. 하늘 끝과 맞닿은 안양루와 석등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아마도 이런 멋진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석등이 가장 아름답다고 표현을 하는가 보다. 그 앞에서 걸음을 땔 수가 없다. 언제 또 이곳을 들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재를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이렇게 문화재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내가 답사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지를 않았다면 생활은 좀 더 편했겠지만, 우리 문화재에 대한 고마움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례석의 조화로움

 

자칫 석등에 빠져 그 앞에 놓인 배례석을 놓칠 수도 있다. 석등 앞에 놓인 배례석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네모난 일석으로 조성을 한 배례석은 윗면에 커다란 연꽃 한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그 밑으로는 조금 층지게 파 들어가서 둘레를 안상을 새겨 넣었다. 밑 부분은 밋밋하게 표현을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다.

 

영주 부석사에서 만난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석등. 크지 않은 석등이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수많은 석등보다 월등히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늘 길 위에 서 있는 것이지만.

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몸은 늙어가고, 답사는 끝이 안보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상상 외의 것들을 만날 수가 있다. 가끔은 그런 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당황한다. 한 마디로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 그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경주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 옆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면, 뒷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산은 선도산으로 오르는 길인데, 마을 끝에서 우측 길로 보면 고분이 몇 기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삼층석탑이 보이는데, 일반적인 탑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주사위 모양의 돌로 쌓은 기단

 

서악동 산 92-1에 소재한 보물 제65호 서악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축조된 이 탑은 일반적인 형태의 탑과는 다르게 모전석탑형이다. 밑에 있는 바닥 돌 위에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만든 커다란 돌 8개를 이층으로 엇갈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어놓았다.

 

서악리 삼층석탑의 기단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는 1층의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의 불상을 모셔두는 감실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그 위에는 3단의 몸체를 쌓았는데, 1층 몸돌 남쪽 문틀 양편에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인왕상은 그 동안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올린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기단에 비해 몸돌이 갑자기 작아져 있는 형태이다. 석탑의 부분은 그동안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퇴화하는 석탑

 

높이 5.07m, 기단 폭이 2.34m인 서악리 삼층석탑은 돌을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의 형태로, 이런 유형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교적 투박하게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탑으로, 색다른 느낌을 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제대로 공부도 못했는데, 몸은 늙어가

 

그동안 매번 이야기를 하는 것이, 벌써 20년 넘는 세월을 답사를 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20년 동안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는 이제 겨우 20% 정도일 것으로 추산한다. 아직 보고 싶은 것들도 많고, 가고 싶은 곳들도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을 늘 탓하고 살아야만 한다.

 

 

 

오늘 서악산 삼층석탑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 부러운 것이 아니다. 천년 세월, 그렇게 변함없이 서 있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사람도 저렇게 버틸 수만 있다면, 좀 더 여유를 갖고 답사를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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