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사는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하원리 천축산에 있는 고찰이다. 불국사의 말사인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 의상이 세웠다고 전하는데, 의상은 이곳의 산세가 부처님이 계신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천축산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의 연못에는 9마리의 독룡이 살았는데, 이들을 주문으로 쫓아낸 뒤 구룡사라 하였단다.

 

그 뒤 서쪽 산 위에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춰 불영사라 개칭을 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당시 이곳 연못 위에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거기 살던 용을 쫓아낸 뒤 절을 지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불영사는 명승 제6호로 지정된 불영계곡을 끼고 조성된 아름다운 절이다.

 

많은 수난을 당한 불영사

 

불영사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많은 아픔을 당한 절이다. 조선 태조 6년인 1397년에는 나한전만 남긴 채 화재로 모두 불에 타 버린 것을 이듬해 소운대사가 연산군 6년인 1500년에도 다시 소실된 것을 양성법사가 중건하였으며, 선조41년인 1608, 경종 4년인 1742, 고종 3년인 1899년에도 중건을 하였다.

 

불영사 경내에는 보물 제730호인 응진전, 보물 제1201호인 불영사 대웅보전, 보물 제1272호인 불영사 영산회상도와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된 삼층석탑과 불영사 부도 등이 있다. 불영사 대웅보전은 기단 밑에 거북 돌을 받쳐 건물을 받들게 하였는데, 이는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이어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고른 균형을 보이는 삼층석탑

 

이 불영사 대웅보전 앞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3.21m의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크지는 않지만 고른 균형을 보이는 탑으로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불영사 삼층석탑의 아래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에 양우주를, 가운데에는 탱주인 기둥을 새겼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올렸으며, 몸돌의 각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한 양우주를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그런데 이 불영사 삼층석탑의 지붕돌의 형태는 2층 지붕돌의 낙수면의 기울기 등이 1층과 3층에 비해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상륜부인 꼭대기에는 머리장식 받침인 노반을 놓고, 위로 엎어놓은 그릇모양인 복발과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을 한 앙화가 놓여 있다. 불영사의 삼층석탑은 아담하지만 전체적으로 고른 균형을 이루고 탑으로, 기단의 조각수법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죽어서도 서원을 이루는 굴참나무

 

불영사를 들어가다가 보면 우측에 돌을 가득 쌓아올린 나무 그루터기가 보인다. 이 고목이 되어 쓰러진 나무는 한 때 천연기념물 제157호로 지정이 되어있던 불영사 굴참나무이다. 살아있을 때는 수령이 1,300여 년에 수고는 35m, 둘레가 6.2m에 이르던 거목이었으나 고사로 인해 지정 해제가 되었다.

 

 

이 굴참나무는 신라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 의상대사가 불영사를 창건한 기념으로 심은 나무였다고 한다. 천연기념물이었던 이 굴참나무는 썩은 몸통만 남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 서원을 한 돌을 올려놓았다. 죽어서도 사람들의 서원을 들어줄 수 있는 천연기념물. 불영사 굴참나무는 비록 고사를 했지만, 그 의미는 세월이 지나도 달라질 것이 없는가 보다.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말 무염선사가 중수하고, 고려 고종 때 중창을 하여 요사채 3-여 동과 산내 12개의 부속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조선 인조 때 대중창을 하였으며, 1872년 원영화상이 중창을 해 오늘에 이른다.

 

천년 고찰인 무량사에는 보물 5점과 충남 지방문화재 8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2층으로 조성된 극락전 앞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이런 사찰의 배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배치형식이다. 백제불교의 혼을 지니고 있다는 무량사. 눈이 쌓인 무량사는 정취가 남다르다.

 

선이 고운 무량사 석등

 

극락전 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그 앞에 자리한 보물 제233호로 지정된 무량사 석등이 석등을 볼 때마다 참 선이 곱다는 생각이 든다. 지붕돌인 보개석 위에 눈이 한 편에 쌓인 석등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답다. 이 석등을 볼 때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의 버선코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석등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를 밝혀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 앞에 조성한 석등의 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량사 석등은 아래 받침돌 위에 기단부를 놓고 그 위에 간주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그리고 맨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부여 무량사 석등은 화려하지가 않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오는 시기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이는 석등은, 한 마디로 단아한 형태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있는 이 석등은 간결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이 석등을 만날 때마다 기품있는 반가의 새색시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간결한 연꽃이 기품을 더해 

 

무량사 석등의 기단부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간주석은 팔각의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을 놓았다. 윗받침돌인 상대석과 아래받침돌인 하대석에 새긴 연꽃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간결한 조형에 비추어 풍성한 느낌을 주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좀 좁은 편이지만 간주석인 팔각기둥이 짧은 편으로,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고 날렵함을 표현하였다. 팔각으로 조형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게 했다. 화사석의 8면 중 넓은 4면에 화창을 내어, 전체적으로 조형미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마의 경사가 버선코를 닮아

 

화사석 위에 얹은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추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린다. 이렇게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올려진 귀퉁이의 선이 새색시의 버선코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올린 작은 연꽃봉오리모양의 보주 또한 단아함의 극치이다. 많은 상륜부가 없는 것이 오히여 이 석등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듯하다.

 

눈이 쌓인 날 찾아간 부여 무량사. 그곳에서 만난 석등 한 기가 발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단아하고 기품있는 석등을 본 적이 있었던가?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긴 하지만.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연꽃 문양 역시 신라시대의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만 같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성주사지. 딴 곳의 사지보다 석탑이 유별나게 많은 절터이다. 이곳에 보물로 지정된 금당터 앞 오층석탑 외에도, 금당터 뒤편으로 나란히 3기의 석탑이 서 있다. 이곳에서 조성된 탑이 아닌 딴 곳에서 옮겨온 이 탑들은, 동 삼층석탑, 중앙 삼층석탑, 그리고 서 삼층석탑이다.

 

보물 제47호로 지정이 된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은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을 말한다. 성주사는 처음에는 백제 때 세워졌다가 후에 낭혜화상에 의해 번창이 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탑 외에도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는 곳이다.

 

탑에 웬 구멍이 이렇게 많을까?

 

서 삼층석탑은 기존의 석탑과는 다르다. 물론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 위부분에는 1층 탑의 몸돌인 탑신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었다. 이는 통일신라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3층으로 조성한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지만,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이 놓여 있다. 이 탑은 조형미가 뛰어나며, 상하 비율이 잘 맞아 균형미가 돋보인다.

 

 

그런데 이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에는 많은 구멍들이 보인다. 위층 기단의 옥개석과 삼층석탑의 머릿돌인 옥개석까지 작은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사면으로 돌아가면서 옥개석에 뚫린 구멍은 양측으로 아래위로 3개씩을 뚫어놓았다. 옥개석 한 면에 12개씩의 구멍을 뚫은 셈이다.

 

금동판과 장식품으로 치장을 한 화려한 석탑

 

이 서 삼층석탑의 옥개석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들은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 금동판이나 장식 등을 매달아 두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옥개석에 가득 달린 금동판이나 장식품들이 바람에 날려 소리를 내거나, 바람에 날리는 모습들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 화려함으로 친다면 세상 그 어느 탑이 이 탑을 따를 수가 있을 것인가?

 

 

이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은 높이 443cm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면석과 탑신석인 몸돌에는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석탑이다. 기단석과 몸돌의 비례, 층급받침이 4단으로 조성한 것, 옥개석 처마가 날렵하게 위로 솟아오른 점 등을 보면 전형적인 9세기의 신라석탑이다.

 

사리공을 도굴 당한 석탑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은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사리공 안에 있는 복장물이 모두 도굴을 당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복장물들이 도굴을 당해 사라졌다.

 

문화재보호법이 솜방망이로 먼지 터는 격밖에는 되지 않는 대한민국. 문화재란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문화재를 훼손할 시에는 엄한 처벌로 다시는 이러한 폄훼 등이 없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종교가 다르다고, 혹은 그 것을 훔쳐다가 돈을 만들기 위한 이런 몰염치한 인간들은 단죄를 해야 한다.

 

성주사지 금당 터 후면에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서 삼층석탑. 1130일 눈이 내린 성주사지 인근에는,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 흔한 CCTV 한 대 눈에 띠는 것이 없었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에 소재한 성주사지. 이곳 금당 터로 추측되는 뒤편에 자리한 3기의 석탑 중 중앙에 위치한 보물 제20호인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인 몸돌을 올리고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사세를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단아한 형태로 서 있는 3층 석탑

 

중앙 3층 석탑의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양 우주와 중앙 탱주를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 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 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이 문짝 모양 안에는 자물쇠 모양을 가운데에 조각을 하고,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다. 나머지 공간을 못의 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훼손은 되었어도 기품은 그대로

 

1층 탑 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10월 초에 성주사지를 다녀왔으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이렇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급할 것이 없는 것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탑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느긋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10월 초라고는 해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쌀쌀한 날씨에 찾아간 상주사지.

 

신라는 3국을 통일하고 난 뒤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기 위해, 통일신라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이층 기단을 가진 3층 석탑을 세웠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로 가면서 3층 석탑의 규모는 점차로 작아지는 느낌이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규모는 좀 작아지기는 했어도, 이층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탑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기품이 엿보이는 탑이다. 한 마디로 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려는 듯, 짜임새가 돋보이는 탑이다. 반려암으로 조성한 3층 석탑은 높이는 410cm이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갈 때마다 한숨만 내 쉬는 성주사지

 

몸돌의 위에 올려진 지붕돌은 끝이 날카롭게 표현을 하였다. 3층 석탑은 부도탑으로도 추정이 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정광, 가섭, 약사여래 사리탑 중 하나로 적혀졌다. 이 성주사지 중앙 3층 석탑은 이곳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고,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주사지, 국보와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하고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 터. 성주사지를 찾으면 늘 마음이 아프다. 한 때는 백제의 사찰로써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던 오합사가, 백제가 신라에 망하고 난 뒤 통일신라의 강력한 국권을 상징하기 위한 절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벌써 성주사지를 5회 이상을 찾아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이곳은 사람들의 인적이 없었다. 그것은 대천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보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 성주사지를 찾아오는 발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극히 저조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을 갈 때마다 깊은 한숨만 나온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에 소재한 보물 제19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성주사지 중문지를 지나 석등과 오층석탑, 금당지가 일렬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한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는 성주사를 지난 106일에 찾아보았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빗방울도 뿌리는 날 찾아간 성주사는, 인적도 없이 고요함뿐이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이 절의 금당 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다. 금당 터 뒤로는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에 양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는 탱주를 새겨넣었다.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평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도 기둥 모양인 양 우주를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 가서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우아한 모습의 오층석탑

 

성주사지 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목개석, 몸돌 등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으로 균형미가 돋보인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 두었으며,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다.

 

대개 신라의 석탑은 기단부 위에 삼층의 몸돌을 올리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곳이 옛 백제의 지역이므로 신라와 백제의 석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이 시기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이므로, 새로운 양식의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형태로도 보인다. 현재는 상륜부가 사라진 오층석탑은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문화재 보호는 개인이 할 수 없어

 

전국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은 어느 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문화재 보호란 해당관청은 물론이려니와,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등 모든 분야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 하지만 언론이나 그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것을 종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포털 사이트 등은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재보호, 참으로 소중하고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늘 문화재보호 운운하는 그런 속보이는 짓거리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정한 문화재보호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의 정신세계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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