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가 뿌리는 8월에 찾아간 양평 용문사. 그저 바쁠 일이 없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넓지 않은 길을 걷는다.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은, 비로 인해 그 많던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은 뜸하기 때문이다. 8월 우중에 걷는 산길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 바로 사찰기행이 아이겠는가? 거기다가 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함께이니.

 

 

대장경을 봉안했던 용문사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빗길에 만난 한 여름의 용문사

 

용문산용문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만한 길을 사람들이 걷는다. 차 한 대가 뒤에서 빵빵거린다. 길이 좁으니 조심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갈 길이 바쁘니 얼른 비켜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이 좁은 길을 굳이 차를 몰고 들어와야 하는 것일까? 괜히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절을 찾아갈 때는 가급적이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걷는 편이다. 굳이 차를 절 경내까지 차고 들어가기를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구도를 원칙으로 하는 도량이라면, 그리고 그곳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사고는 언제나 짜증만 유발시킨다.

 

비는 오락가락한다. 몇 번이고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전통다원 앞에 도착을 했다. 그 전서부터 높이 42m11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는 전화에도 불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냈다고 하니, 나름 신령한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은행나무 앞에서 잠시 경의를 표한 후 경내로 접어든다.

 

기품 있는 사찰 용문산용문사

 

용문산 용문사는 그리 크지는 않은 절이다. 하지만 천년고찰인 용문사는 기품이 있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여름 날 만나는 용문사는 왠지 기품이 있어 보인다. 넓은 마당을 두고 여기저기 둘러 서있는 전각들 때문일까? 늘 용문사를 들릴 때마다 느끼게 되는 생각이다.

 

 

먼저 보물 제5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정지국사 부도 및 비를 돌아보고 다시 경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전각들을 찾아다니면서 젖은 몸이긴 하지만 참례를 한다.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과 삼성각을 들린 후, 차라도 한 반 하고 싶어 경내를 벗어난다. 그렇게 다니고 있는 동안 비가 그쳤다. 다원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은 잊었다. 8월의 산속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절집이 좋아 절을 찾는다. 그리고 그 절 안에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또 다시 절을 찾는다. 8월에 만난 양평 용문산 용문사. 그 안에서 천년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상·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하 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비천도(飛天圖).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돌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돌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은 그린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을 찬탄한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에 새겨진 비천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 온 비천상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 용주사 보물 범종에 새진잰 비천인

비천상은 나름대로 중요한 우리 미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느 절을 찾아가도 비천도는 쉽게 접할 수 있는 불화 중의 하나다. 이 비천도가 요즈음에는 현대적인 것과 우리 전통예술과 접목이 되면서 나날이 변화를 하고 있다. 요즈음에 그려지는 비천도는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동종에 새겨진 비천도를 보고 반해

아름다운 천인을 그려내는 비천도는 불교미술에서는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야 미술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어디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이야 있겠는가? 그저 보고 느낀 바를 적는 것이다. 내가 비천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상원사 동종 등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호 동종에 나타나는 비천도를 보고나서 부터이다.

작가 김선옥의 그림 비천인(2007년 작)

그 다음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인 아닌지 모르겠다.


비천도를 보며 마음은 불국토를 향해

비천도 그 자체만 보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표대를 바람에 날리며 때로는 앉아있기도 하고, 때로는 날아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 비천상이 주는 느낌은 볼 때마다 달라진다. 어느 때는 그 비천상을 바라보며 함께 하늘을 날기도 하고, 어느 때는 비천인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가을바람에 실려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려니.(위 사진은 고기와에 그려진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 김선옥 작 2007년)

이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다양한 문화재에 관련된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에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답사를 나가보았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소개하는 <러브人 문화유산>이라는 코너에, 소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문화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라고 곧잘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 ‘미쳤다’ 라는 표현이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적 파사성 / 2009, 10, 18 답사

‘힘들다’ 느낄 때에 채찍질이 되다

사실 요즈음은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여건이 점점 그렇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진다. 역시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은 ‘팔팔한 청춘’이라고 말은 하지만, 남몰래 저려오는 팔다리는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촬영 중에 프로듀서가 묻는다. ‘왜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인가?’를. 그렇게 질문을 하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왜? 라는 질문이 참 낯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왜’가 아닌, ‘당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적부터 그렇게 당연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일상이요, 당연이다. 답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조급하다.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에 찾아간 수옥폭포 / 2010, 2, 15 답사

나는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문화재 답사란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불이며, 탑, 마애불 등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그리고 나무들과 스스로 대화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답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왜'가 아닌 '당연'이라는 해답을 찾는다.

내가 선조들에게 묻는 것이 바로 ‘왜?’이다. 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조성하였을까? 왜?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피땀을 흘린 것일까? ‘왜’는 바로 내가 만난 문화재에게, 그리고 그것을 조성한 낯모르고 이름 모를 선조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 왜는 때로는 엉뚱한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서 왜? 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재는 바로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

문화국가, 문화재사랑. 참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문화재를 소중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나 과연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아마 다만 몇 사람만 있어도, 그 마음들이 모아지면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란 생각이다.

단종이 귀향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여주 골프장 안에 있다) / 2009, 11, 11 답사 

문화재가 국가소유, 지자체소유, 아니면 개인소유일까? 아니다. 그것이 비록 법적인 주인은 국가나 지자체, 혹은 개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혹 우리 것이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 우리 것이기에 소중히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 아마 그런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도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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