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갖고 구분을 짓는다.

 

탁자식이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바득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인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였다.

 

이 지석묘는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중앙을 손질하여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처음부터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처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고인돌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있는 고인돌을 찾아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멀리 장거리 답사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편이다. 외삼미동 안으로 들어가 북오산IC 입구로 가다보니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런데 거리는 적혀있지 않고 앞으로 가라는 화살표만이 보인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다음에 안내판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지만, 화성 동탄 끝까지 갔는데도 어느 곳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는다. 오산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으로 굴다리가 있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내판이 없고, 굴다리 안에는 또다시 좌측으로 굴다리가 있는데도 안내판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이란 초행길인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랑 길가에 하나 서 있는 안내판. 화살표 하나로 문화재 안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 담당부서의 무책임한 처사에 울화가 치민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더 설치를 했다면, 20km정도를 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닌다. 내 고장의 자랑거리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쓴다. 무덤을 ‘유택(幽宅)’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에 영혼이 쉬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구조나 형태가 달라진다. 선사시대에는 고인돌이나 동굴 등에서도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도 초기 형태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무덤의 형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서 널무덤이 유행한다. 널무덤이란 땅을 판 후 그 안에 주검을 넣고 널을 덮는 형태이다. 여기서 말하는 널이란 돌로 된 것을 말한다. 널무덤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전해지며, 그 뒤에 고인돌과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무지무덤, 독무덤 등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묘의 형태인 고인돌

고인돌 등 돌을 이용해 무덤을 만든 형태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대규모 분묘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산청군에 소재한 전 구형왕릉의 묘처럼 많은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석묘 등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분묘의 역사는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무덤의 형태로 보인다.

그 이전의 묘의 형태인 ‘지석묘(支石墓)’라고 하는 고인돌은, 선사시대의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근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고인돌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이들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있다. 현재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한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육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을 보면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능지대나 바닷가 등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물을 사용해야 하는 인간들의 생활 때문에 이런 곳에서 주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물이 있는 곳에 인류가 집단으로 서식을 하였고, 그런 곳에 고인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형이라고도 한다. 커다란 돌을 양편에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돌을 덮는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삼면은 커다란 돌로 막고, 입구는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가벼운 돌을 쓴다고 한다. 전라북도 고창군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지역이다. 고창지역 고인돌은 2003년에 205개 군집에 1,665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이후 2005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1,327기의 고인돌이 조사되었으며, 2009년 군산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세계유산으로 등제된 고창고인돌유적을 제외한 174개 군집에 1,124기가 보고되었다. 따라서 최근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600여기이상이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고창 고인돌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작은 안내판에 ‘도산리 고인돌 1km’라고 적혀있다. 이 도산리고인돌은 특별하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좁은 농로를 따라 들어간 곳은 한창 주변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곳에 꽤나 거대한 탁자형 고인돌 한 기가 보인다. 이곳 고인돌은 아름답다고 하여, 많은 책에 소개가 되기도 했다.

‘망북단’이라는 슬픈 이름도 가져

이 도산리 고인돌은 석축 위에 놓여있으며 주변에는 커다란 돌들이 널려있다. 그 중 한기가 탁자형으로 서 있는데, 굄돌의 높이는 어른 키만하다. 그리고 위에 올린 탁자형의 덮개석은 길이가 3.5m 정도에, 정면 입구의 길이도 2.5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의 두께도 50cm나 되는 거대한 돌이다.

이 탁자형 고인돌이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한 이 고인돌을 ‘망북단’이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때 이 마을의 의병장인 송기상(1612 ~1667)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기상은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적을 향해 진군을 하던 중 삼전도의 굴욕적인 패배가 알려지자, 이곳으로 되돌아와 평생을 ‘망북통배’(임금이 계신 궁을 향해 날마다 곡을 했다는 뜻)를 했다는 것이다.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의 손길이로 짐작하시길... 

한 의병대장의 통한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도산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1981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고창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자, 사적 제391호로 승격이 되었다. 지난날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산리 고인돌. 주변 정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용인시 처인면 양지면 주북리 825에는, 경기도 문화재지료 제49호로 지정이 된 고인돌 한기가 소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을 찾아 몇 번을 주북리를 돌아다녔지만, 번번이 허탕을 치고는 했다. 그 이유는 이 고인돌이 집안에 있기 때문이다. 서너 차례를 답사 끝에 겨우 찾아 들어간 곳. 지석묘 앞에는 울타리 안인데도 몇 기의 무덤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이 집을 ‘별장집’이라고 부른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전역에 3만 기 정도가 남아있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로, 그 종류는 세 가지로 구분을 하고 있다. 고임돌을 지상에 세우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무덤의 방은 땅 속에 있으면서 받침돌에 덮개석을 올려놓는 바둑판식이 있다. 또 한 가지는 맨 땅에 덮개석이 놓인 개석식이다.


탁자식인 주북리 고인돌

주북리에 있는 고인돌을 보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 놓인 탁자에 몇 사람이 들러 앉아 있다. 고인돌을 좀 보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 저 안쪽에 있다고 알려준다. 입구에 묘가 있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니, 꽤 큼직한 고인돌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다.

주북리 고인돌은 양편에 고임돌과 한편을 막음돌이 땅에 절반 쯤 묻혀있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석을 올려놓았다. 탁자식인 이 고인돌은 화강암 질 편마암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덮개석으로 쓰였을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곳이 예전에는 많은 고인돌이 있었던 자리인 듯하다.


주북리 고인돌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이 되어있다

주북천 주변에 놓인 고인돌,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

이곳은 주북천이 가깝다. 그리고 이렇게 고인돌이 있었다는 것은, 이 주변에 물이 있어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북리 고인돌은 길이가 2,8m에 너비는 2,5m 정도이다. 두께는 45cm 정도가 된다. 돌에는 성혈 등은 보이지 않으며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1m 정도가 된다.

이 주북리 고인돌의 형태는 고임돌은 낮고, 덮개석이 크고 두터워 웅장한 느낌이 든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을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던 부족 중 그래도 상당한 위치에 있던 사람의 지석묘일 것으로 추정이 된다.



고임돌 위에 덮개석을 놓은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는 묘가 보인다.

탁자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이루고 있는 남부지역의 것에 비해서는 단 한 기 뿐이지만, 그래도 이 주변의 옛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소중한 문화재라는 생각이다. 주북리는 낮은 구릉지다. 양지에서 옛 도로를 따라 용인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지나, 주북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하기에 이렇게 넓고 낮은 구릉이라면,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치고 돌아서야만 했던 주북리 고인돌. 비록 한 기 밖에 남지 않은 고인돌이지만, 그 고인돌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마을이 있었다고 치면, 이 인근 어딘가에는 또 다른 고인돌이 있지나 않았을까? 그리고 그 마을은 언제 쯤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생활은 어떤 형태였을까? 한참이나 고인돌 앞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질문과 답을 스스로가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반복할지는 모르지만.

주변에는 덮개석으로 사용 되었을 돌들이 있어, 이곳에 몇 기의 고인돌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주변 주북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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