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광교산 89개소 암자의 본사 노릇을 하던 절이 있었다. 바로 진각국사(1307~1376)가 광교산에 창건한 창성사라는 절이다. 이 절을 건립하고 난 뒤 수많은 사람들이 광교산으로 모여들었다. 광교산(光敎山)고려야사에 의하면 원래 이름이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고.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으며, 그 뒤 이 산에 수많은 사암(寺庵)들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구름에 쌓인 광교산 청련암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더니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걸망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기로 했던 날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뿌리는 빗방울이 영 길을 떠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무료하게 맥을 놓고 있자니 그도 답답하다. 산을 오르자니 길이 많이 젖어 잇을 것 같아 청련암으로 향했다.

 

광교산 청련암.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청련암은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산 중에 들어선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절이다. 진각국사가 광교산에 창성사를 창건하면서 청련암은 창성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그러한 청련암이 퇴락하여 빈 터만 남아있던 것을 비구니 창건주인 청련스님이 정조 1년인 1777년 절을 짓고 청련암으로 사명을 붙였다.

 

 

영친왕 이은을 잉태하게 만든 절 청련암

 

청련암이 유명한 것은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가 이곳 청련암 봉향각 건물에서 기거하면서 칠성각에 기도하여 영친왕 이은을 잉태한 곳이기 때문이다. 영친왕 이은은 조선의 마지막 황테자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 청련암을 새롭게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6일 아침 일찌감치 청련암을 찾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날이 잔뜩 흐리다. 일주문을 들어서 환희루 계단을 오른다. 환희루는 범종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우란분절에 사용할 영가 등이 걸려있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후 종무소를 찾아들었다. 절에 모셔진 탱화를 촬영하고 싶어서였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려본다고 하더니 허락을 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실내는 촬영을 금한다고 하여 전각의 외부만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지만, 주변으로는 아파트와 주거 밀집 지역이다.

 

비안개에 쌓인 청련암을 돌아보다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청년암은 경내에 숨죽인 고요함이 발소리조차 조심하게 만든다. 귀비 엄씨가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칠성각 앞으로 다가선다. 손을 모아 합장을 한 후 생각을 해본다. 이곳 청련암도 어찌 보면 역사의 아픈 현장인지도 모르겠다.

 

 

나라가 더 오래 지속이 되었다면 영친왕 이은이 왕위에 올랐을 태고, 그렇다면 청련암을 지금보다 몇 배 더 큰 사찰로 중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저 역사란 지금 이대로 떡 그만큼만 만드는 것인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광교에서 올랐던 창성사지가 그랬고, 광교산 여기저기에 곳곳에 찾아볼 수 있는 절터들이 그랬다. 한세상을 풍미하던 많은 선사들이 기거를 했지만,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많은 암자들. 세상이란 내로랄 것도 없고, 집착을 할 것도 없는 곳이라고 했던가? 내일은 광교산 창성사지를 다시 올라보아야겠다.


남원 선원사에는 약사전 뒤편으로 조금 비켜선 곳에 자리한 칠성각. 칠성각에 모신 칠성은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보통 아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칠성은 원래 도교에서 발달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불교와 습합이 되면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성각은 대개 경내의 위편에 자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신, 칠성, 독성(혹은 용왕)을 모신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호법신의 일종으로 대부분 칠성각을 건립한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두고 칠원성군을 그 아래에 둔다. 혹은 칠여래를 함께 모신 탱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선원사 칠성각 문 위에 조각된 거북이와 토끼

가신신앙에서도 중요한 칠성

우리 무속에서도 칠성은 중심적인 신격 중의 하나이다. 굿거리에는 칠성굿이 있으며, ‘칠성풀이’나 ‘칠성본풀이’ 등의 무가가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주부가 주체가 되어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칠월칠석날 밤에 집 뒤편의 장독대에 백설기와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밝힌 다음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하며 비손을 한다.

이렇게 비는 이유는 집안에 자손들이 병이 없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장수를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칠성이기 때문에 절 안에 자리한 칠성각에는 항상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집이나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자식이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원사 칠성각은 세 칸 팔작집으로 150~200년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 칠성각에는 왜 별주부가 있을까?

선원사 칠성각은 건축을 한지가 150 ~ 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칠성각 양편 문 위에 보면 이상한 것이 보인다. 벽 밖으로 무엇인가 돌출이 된 것이 있다. 다가가 보니 밑에는 자라가 있고, 그 위에 토끼가 타고 있는 형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칠성각 문 위에 있는 것일까? 양편에 똑 같이 만들어 놓았다.

주지스님께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칠성각에 별주부가 왜 있는 것일까? 자라를 거북이로 생각한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수명장수를 비는 칠성각에 장수동물인 거북이를 표현하였을 것이다. 십장생인 해와 달, 산과 물 그리고 돌과 소나무, 불로초와 거북, 학과 사슴 중에는 거북이가 포함된다.

문제는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토끼의 존재다. 그 토끼가 왜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칠성각에 거북을 형상화해서 벽에 올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끼가 그 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토끼는 장수동물도 아니고, 칠성각과 뚜렷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문 위 문틀에 붙인 거북이와 흙벽에 돌출된 토끼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혹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 남원은 명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봉에서는 가왕이라는 송흥록이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송광록, 송만갑 등 명창과 여류명창인 박초월 등이 바로 남원출신이다. 그런 명창들 때문에 남원은 어디서나 소리 한 대목을 들을 수 있었을 테고, 그 소리를 들은 대목이 칠성각을 짓다가, 수궁가(별주부전)에 나오는 한 대목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선원사는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꺼리를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절집을 찾아 문화재 외에도 이런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이런 재미에 절집을 찾아들어가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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