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곳은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리 사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으로는 지릅재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절터.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터에는 현재 미륵리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미륵리 사지. 현재는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중창 중에 있는데, 본존불인 석불입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커다란 귀부가 하나 놓여있다. 그 귀부의 크기로 보아, 이곳으로 운반을 하는 데만도 대단한 역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미륵리 사지에 소재한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이 귀부는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나 된다. 그 모습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과연 귀부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귀부는 머리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귀부의 형태는 거북이 등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의 경우는 거북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우선 등에는 거북등에 있는 육각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쪽 왼편 등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타고 오르듯 양각되어 있다. 그것도 주변을 파내고 양각을 한 형태이다. 등을 보면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올라있다. 이 형태도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다. 머리는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길게 - 자형으로 판 입과 그 위에 작은 콧구멍, 그리고 양 옆에 동그랗게 표시한 눈 등이 사실적 표현을 했다. 앞발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다.


거북이 등에 파 놓은 비좌는 거북 모양에 비해 크지가 않다. 1970년대부터 발굴을 시작한 미륵리 사지에서, 수차례 발굴을 했으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귀부 위에 올려 질 비의 몸돌은 조성되지가 않았다는 것인지. 이 미륵리 사지에 이러한 귀부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완성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미륵리 사지에 있는 귀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생긴다. 그 첫째는 바로 이 귀부를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더구나 이렇게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있는 그 앞에 자리한 귀부. 등에 내 놓은 비좌로 보아서는 귀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등에 파 놓은 홈이 과연 비좌일까 하는 점이다.



비좌로 보기에는 형평에 맞지가 않는다. 적어도 이만한 귀부에 올릴 비문이라면 그 비의 몸돌 역시 상당히 클 것이다. 그런 큰 비문의 몸돌을 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를 올리는 비의 받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이것이 비를 받치는 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시대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등에 새기는 문양이나, 거북이 몸에 용머리 등,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미륵리 사지의 귀부는 단순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 거북이 형태로 다듬어 놓은 귀부의 뒤편 우측 꼬리 부분이다. 꼬리 부분에는 돌을 쪼아 내려는 듯 여러 개 구멍이 나 있다. 이렇게 일렬로 나 있는 구멍으로 보아, 이 귀부는 미완성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귀부라면 이해가 간다. 귀부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각을 하는 도중에, 중단이 되어 그대로 방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석굴식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 등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 절에서, 왜 유독 이 귀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륵리 귀부가 주는 의문점

미륵리 사지에는 현재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첫째는 하늘재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 탑이다. 그리고 본존불인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충청도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식 법당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사이에는 석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 역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경내에는 당간지주와 불좌대 등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이 미륵리 사지의 창건 당시의 사격이 어느 정도였는가 가늠이 간다.



이 몇 기의 문화재의 연대가 모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밝혀져, 미륵리 사지는 고려 초기에 있던 미륵대원이라는 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불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북녘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부는 언제 조성이 된 것이며, 무슨 연유로 이렇게 거대한 돌 거북을 조각한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이 거북의 머리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본존불인 석불입상과 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에서 조성이 되었다면, 이것을 귀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인근의 사지인 원주 부론의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와,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도 같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도 비가 서 있으며 이 비의 귀부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때 미륵리 사지의 귀부가 과연 귀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등에 새겨지는 문양이 없다는 점. 필요이상으로 크기가 크다는 점,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귀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석조물은 아니었을까?

거북이 등에 새겨진 두 마리 작은 거북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귀부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 쌓인 미륵리 사지를 오랜 시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귀부가 눈에서 떠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56번지에 소재한 <충주조동리지석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이 지석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충주 조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불교와의 접목으로 탑과 같은 형태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고인돌은 3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여러 개의 자연석을 고임돌로 사용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동리 고인돌은 인근에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조동리 선사시대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중원지방의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모습은 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디른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지방의 고인돌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3층의 탑과 같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조동리 지적묘.



아랫단의 덮개석은 그 크기가 450×350×100cm의 커다란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굄돌을 이용하고 또 다시 2층을 더 올려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시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워

조동리 지석묘가 언제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는 정확히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탑골’ 또는 ‘탑평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도 이 고인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3층 구조의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는 조동리 고인돌.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처럼 3층으로 올려쌓은 특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탑골마을 고인돌. 문화재답사는 이런 재미가 있어, 늘 설레게 만든다.

충북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에 소재한 사적 제445호 숭선사지.고려시대부터 이곳에 자리했다는 숭선사지, 이 거대한 절이 언제 사라졌는지 알길은 없다. 폐허가 되어 옛 영화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절터 안에 널린 석조물로 보아 예전의 그 규모를 가늠할 수가 있다. 밤나무 아래 커다랗게 쌓아올린 와편 더미. 그 하나만으로도 오래전 영화를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숭선사는 고려 광종 5년인 954년에 광종의 모후인 신명숭선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원찰이라고 전한다. 숭선사는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확인된 고려시대 원찰이라는 것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절 곳곳에 들어난 석조물, 그것만으로도 대단해

숭선사지를 찾아가 보았다. 마을의 안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낮은 산길을 조금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널려있는 석조물들을 보아도 예전의 그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 이렇게 거대한 사찰이 어떻게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보아도 상당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금당터와 배수로, 남문지, 담장터 등이 확인이 되었다는 숭선사지. 사지 안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옛날의 화려했던 흔적이 그려진다. 더욱 왕의 모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창건하였으니 그 규모가 어떠했을까?



1980년 초 절터 아래 형성한 숭선마을에서 <숭선사>명 기와가 발견이 된 후 주목을 받은 숭선사지. 그 곳에서 금동보살두, 분청사기 장군 등 많은 유물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널려있는 수많은 석재들을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하다. 절터 곳곳을 돌아보다가 보니 머릿 속에 숭선사의 옛 모습이 조금은 그려지는 듯도 하다.

조선 성종 10년인
1497년과 명종 6년인  1551년, 그리고 선조 12년인 1579년에 중창을 한 것으로 밝혀진 숭선사지는 조선조까지도 그 대 가람으로서의 웅장한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렀다고 해도 그 폐사지가 된 절터 안에 남아있는 석조물들. 그리고 와편더미. 그런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숭선사지의 옛 영화를 그려보는데 부족함이 없다.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보는 옛 절터 하나하나가 소중하개 다가오는 것은 바로 남아있는 옛 흔적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있어 나그네의 발길은 더욱 빨라지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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