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5층 석탑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1987710일 지정되었다. 이 미륵대원지 내에는 보물 제95호인 5층 석탑과 제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그 외에도 충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 석탑 등이 남아있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보물 제95호로 지정된 충부 미륵리 오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대원 5층 석탑의 하층 기단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조성을 했다. 특별하게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 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은 1층 지붕돌인 옥개석만 2장일 뿐, 나머지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인 양우주를 모서리에 새겼다.

 

 

옥개석인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는 거의 위로 치켜져 있지 않다.

 

철간이 남아있는 미륵대원 5층 석탑

 

미륵대원 5층 석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인 복발이 남아 있다.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게 조성하였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 모양의 찰간이 남아있다.

 

5층 석탑은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비해,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을 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탑은 신라가 망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사 신라 석굴암을 따라 조성한 석굴불상으로 조성한 앞에 세운 고려 초기의 탑이라는 것에 비중을 둘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갔던 충주 미륵대원지. 눈이 쌓인 석조물들의 정취가 더 없이 고풍스러워 보인다. 한 겨울에 답사를 하는 이유는 여름철에는 볼 수 없는 이러한 또 다른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전하는 충주 미륵대원지. 아마도 그곳에서 마의태자는 망해버린 신라가 안타까워 모든 설음을 잊고자 미륵세계가 올 것을 간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는 충주미륵대원지이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 사원터로 밝혀졌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미륵대원지에는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 그리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당간지주, 삼층석탑, 귀부, 사각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각형으로 조형이 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이 된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이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와 화사석, 그리고 위에 올린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벌써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동안 이름도 바뀌고 비지정으로 남아있던 석조물들이 지정문화재로 바뀌기도 했다. 사각석등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아. 오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화형문양으로 장식을 한 간주석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을 장식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형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는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면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특이한 화사석의 결구수법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롭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사각석등에서 보이는 화사석의 결구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 현화사, 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든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비록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며 답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많은 문화재를 만났다는 행복이 더 깊었나보다. 남들이야 그 행복을 알 수 없겠지만, 30년 세월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보다 즐거움은 없을 듯하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28에 소재한 국립충주박물관. 국보인 중앙탑 앞쪽에 위치한 충부박물관의 야외에는 많은 석조물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곳에는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등 많은 불교관련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불사 석불좌상. 높이 98cm 정도인 이 석불좌상은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곳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하는 불신에 덧칠을 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도식화된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충주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이 석불좌상은 머리위에 상투 모양인 육계를 너무 과장되게 크게 조성했으며, 오른쪽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조상하였으며, 마모가 심해 눈, , 입 등의 윤곽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깨의 선은 당당하다. 이렇게 어깨의 선이 당당한 것으로 보거나 법의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아래에는 여러 개의 장식을 곁들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편견단이다.

 

법의는 평행사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는 도식화 되어있으며, 양 다리와 후면의 들 뒤에도 주름을 조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신체의 표현감각이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지방의 장인이 조성한 불상인 듯

 

이 성불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때 석조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듯하지만, 도식화 된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육계가 너무 크게 표현을 하는 바람에 마치 머리 위에 투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 그러나 신체의 비례는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배 아래편에 대고 있지만, 손의 형태가 떨어져 나간 듯 정확한 손의 형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편 무릎은 금이기고 쪼개진 것을 맞추어 놓았다.

 

등 뒤편에는 법의를 굵게 틀어 모아 세 줄을 만들었다. 그 중 두 줄은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사선으로 내려갔으며, 한 줄은 꼬듯이 모아 밑으로 처트렸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석불좌상이나 입상의 경우 광배가 있을 때는 뒤편에 이렇게 조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성불사 석불좌상은 뒤편에까지 조각을 해 놓았다.

 

육계가 필요이상으로 크게 조성이 되었다든가, 손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보아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불사 석불좌상. 비록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비지정 석조물이긴 하지만, 천 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 그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한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 앞으로는 현재의 답사 자료와 함께 오래 전에 답사를 했던 자료들을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27번지 내동 안골마을에는 햇골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기슭에서 약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는, 동쪽을 향해 바라다보이는 곳에 보물 제1401호인 봉황리마애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다. 5년 전에 찾아깄을 때는 보수 공사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돌아 섰던 곳이다.

 

지난 48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암벽의 높이 약 1.7m 정도 너비 5m 정도 되는 넓다란 바위암벽에 일렬로 불좌상 1구와 공양상, 반가상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마애불상군의 형태는 육안으로 쉽게 판별이 되지 않는다.

 

 

마애여래불과 화불을 알현하다

 

삼국시대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는 이 불상군은 육안으로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만큼 많이 훼손이 되어있다. 암벽의 석질이 약한 것인지 곳곳에 균열이 가고,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군은 정확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옆에 자세한 설명을 한 그림이라도 한 장 붙여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곳 마애불상군으로부터 남쪽으로 벼랑을 따라 50m쯤 가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한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 3.5m, 8m의 바위면에, 높이 2m정도 되게 돋을새김한 주존불인 마애여래좌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무릎도 큼직하게 표현을 해 안정감이 있고, 전체적으로 고식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의 두광에는 높이 34cm 정도의 화불 5구가 둘러서 조각이 되어있어 돋보인다. 앞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큰 내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이곳에서는 목조 가구의 흔적과 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이 되어, 어느 시기엔가 이곳에 전각을 세운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전파되다

 

이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자리한 위치의 선택은, 강을 따라 조형문화의 전파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1978121일에 발견된 것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33일 보물 제1401호로 조정이 되었다.

 

 

현재는 마애불상군이 있는 암벽으로 오르는 철계단을 조성하여 놓았다. 계단을 올라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애불상군은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각각의 크기는 1m 안팎의 이 불상군은, 공양상에서 보이는 고리장식과 띠 등은 삼국시대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이 마애불상들은 많은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이 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발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에도 창동 마애불이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절벽에 조각이 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훼손이 된 마애불의 경우도, 불교의 조형미술이 강을 따라 발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강변에 위치한 문화재들을 좀 더 심도있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주 점동면에서 삼합리 쪽으로 가는 길을 들어가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삼합리이다. 이 삼합리에서 충주 앙성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타난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오갑사지 석불좌상>이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이 표지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들어가는지, 거리가 적혀있지가 않다.

 

두 번이나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석불좌상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결국엔 찾지를 못하고 뒤돌아선 적이 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다. 두 번째 답사 길이다. 이번에는 앙성면 사무소를 찾아들어가 오갑사지 석불입상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약도까지 펼쳐 보이며 안내를 한다. 면사무소 직원이 적어주는 주소를 갖고, 번지를 찍어 보았다. 여주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한참을 가니 '동막마을'이라는 석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부터는 '대물낚시터'라는 저수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비게이션이 지난번에 들어왔던 곳을 도착하자, 찾는 곳의 근처에 왔다는 안내를 끝으로 멎어버렸다.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요즈음은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몇 집 되지도 않는 마을이라,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 그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았다. 마침 차가 한 대 나오기에 길을 막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한참 들어가야 한단다.

 

 

 

고개를 넘어 도로 같지도 않은 좁은 길을 들어섰지만, 마을회관이 보이지를 않는다. 차가 지나가면 서로 비켜주어야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재차 묻는다. 한참 가야 한단다. 이러니 내비게이션이 알려줄 수가 없었나보다. 길도 표시되지 않은 곳을 10여분을 가서야 겨우 마을회관을 찾았다.

 

파손이 심한 오갑사지 석불좌상

 

마을회관 집 뒤라고 알려준 대로,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아무 곳에도 석불좌상이 보이지를 않는다. 묶어 놓은 개 두 마리가 무슨 낮도둑이라도 되는 양 짖어댄다. 요즈음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개들하고 한창이나 실랑이를 해야 할 때가 많다. 마침 사람이 나오기에 재차 물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결국 두 번째 답사 길에서, 그것도 몇 바퀴를 돌면서 헤맨 끝에 만난 오갑사지 석불좌상. 한 마디로 너무 많은 훼손이 되어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파손이 되었다고 해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찾아온 여행자가 반갑기라도 한 듯, 석불좌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연꽃 문양을 한 대좌와 석불좌상

 

오갑사지 석불좌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작고 아담한 이 석불좌상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실주의적 기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연화대좌는 밑에 원형으로 받침을 만들고, 8각형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3단으로 조성이 된 대좌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한 면이 있다. 고려 석불에서 나타나는 대좌의 형식이다.

 

 

 

석불좌상은 얼굴과 머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손은 양팔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형태로 남아있어 정확한 수인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법의는 깊게 처리가 되어 있어, 조금은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은 얼굴 표정은 미소를 띠우고 있다. 발은 결가부좌를 해 발가락이 법의 밖으로 삐져나왔으며, 무릎도 파손이 된 것을 떼어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불균형적인 듯하지만, 조각 기법 등은 매우 우수하다.

 

오갑사의 주불상이었을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서는 '명창3년임자(明昌三年壬子)'라고 명문이 새겨진 기와와, '오갑사'라고 쓴 명문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명창 3년인 1192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보존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석불좌상의 뒷면까지 법의를 표현하였고, 다리를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도 조각을 하는 등,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중한 문화재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비록 높은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치는 수도 왕왕 있지만,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찾아나서는 길에 게으름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오갑사지 석불이 아무리 심한 훼손이 되었다고 해도, 그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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