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에서 충주로 3번 도로를 타고 나오다가 보면, 우측 길 밑에 고택이 있다.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 428-1에 소재한 충북유형문화재 제87호인 최함월 고택은, 안채와 행랑채, 서재, 광채, 정자, 사당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인 함월 최응성이 거처하던 곳으로, 원래는 살미면 무릉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1983년도에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인근의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옮길 때, 이 가옥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최응성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인보(仁甫), 호는 함월(涵月)이다. 아우 최응건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집 앞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권상하는 이를 칭찬하며 정자 이름을 '함월정'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의 이름을 따서 최응성이 호를 함월이라 했다고 한다.

 

정자 함월정과 안마당의 강돌 우물이 아름다운 집


 

 

고택의 앞에는 연못 뒤에 작은 정자가 서 있다. '함월정(涵月亭)'이란 현판이 걸린 이 정자는, 최응성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과 측면이 한 칸 정도로 꾸몄으며, 가운에 방을 드리고, 주변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방은 3면에 창호를 내고 한 벽만 담으로 쌓았다. 작은 정자지만 앞에 판 연못과 함께 어우러져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이 정자의 특이함은 바로 주춧돌이다. 밑은 사각형으로 하고, 그 위에 둥그렇게 제작을 해 기둥을 놓았다. 삼면의 창호는 모두 네 짝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정자와 함께 최함월 고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안마당에 있는 우물이다. 둥근 우물은 위로 올라 온 부분에 강돌을 붙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고택 자체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독창적인 면이 돋보이고 있는 데는, 이러한 정자와 우물이 일조를 하고 있다.

 

함월의 서재인 염선재와 행랑채

 

 

염선재는 사랑의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이 함월재는 대문 좌측에 l 자로 형성되어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함월재는 밖을 향해 툇마루를 놓고, 좌측에는 뒤편 툇마루로 들어가는 문을 냈으며, 한 칸의 방을 두 짝 문과 한 짝 문으로 꾸며놓았다. 뒤편으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대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조성된 염선재. 앞쪽으로는 마루를 놓았으며, 마루 뒤편에도 방을 드리고, 끝에 두 칸의 방을 드렸다. 두 칸의 방 앞에도 좁은 툇마루가 길게 놓여있어, 이동을 편하게 하였다. 집의 구조는 땅을 밟지 않고, 염선재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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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그 옆으로 문을 내어 대문을 열고 닫기 수월하게 하였다. 집안 식구들의 이동하는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여놓은 주인의 마음이 보인다. 행랑채는 대문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칸으로 꾸몄다. 행랑채는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으며, 방과 광, 부엌 등으로 꾸며놓았다. 바깥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행랑채는 광은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였으며, 한 칸짜리 방 세 개를 나란히 놓았다.

 

ㄱ 자형의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형태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평면형식인 ㄱ자형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중앙 부분에 두 칸의 넓은 대청을 만들고 있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그중 반을 막아놓았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측으로는 건넌방과 칸 반의 부엌, 그리고 두 칸의 고방을 두었다. 부엌의 위쪽은 다락을 내었으며, 밑으로는 까치구멍을 냈다.

 

부엌문은 투박한 판자문으로 구성하였으며, 고방의 문도 역시 투박하다. 부엌문보다 더 크게 만든 고방의 문은, 물건을 넣고 뺄 때 편안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방 문 옆에는 이단으로 낸 폭 넓은 끼치구멍이 있는데, 이도 막아 놓았다. 대청을 건너 꺾이는 부분에는 윗방과 안방, 그리고 부엌을 드렸다.

 

대청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또 하나의 문을 벽 중간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부엌 위에는 다락을 꾸몄는데, 이곳에도 통풍을 위한 작은 창호를 내었다. 다락의 밑으로는 기둥에 붙여 또 하나의 문을 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서재인 사랑채는 큰 ㅁ자 형으로 놓여 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을 갖는 함월 고택이다.

 

판자벽을 두른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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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담을 외곽으로 두른 최함월 고택은, 안채 안방 부엌의 뒤편에 판자벽으로 두른 광채가 있다. 광채는 ㄱ자 형으로 하였는데, 전체를 판자벽으로 마감하였다. 문은 꺾인 양편에 한 곳씩 내었으며, 자연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이 광채를 지나면 일각문이 있고, 그 일각문을 통하여 함월정과 사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함월정과 안마당의 우물이 아름다운 집. 최함월 고택은 평범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유학자의 집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충청도 양반가의 틀이 되는 최함월 고택. 함월정 앞 연못에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집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 있을 듯하다.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를 지나다 보면, 길가에 5층 석탑과 석불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의 낮은 산 쪽으로 쇠줄로 이어 만든 철렁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이 나타난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면, 강 쪽 밑으로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낙엽이 쌓이고 눈이 채 녹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강물로 처박힐 판이다. 강가로 내려서면 우측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이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아마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26일부터 3일간 벌어진 인근의 탄금대전투로 인해,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왜군과 탄금대에서 전투를 한 신립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전쟁에 패하게 되자 스스로 탄금대 앞 남한강으로 뛰어 들었다. 같이 이 전투에 참여했던 부장 김여물과 이종장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왜군은 충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결국 신립의 패전으로 인해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이 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할까? 그것은 아마 마을사람들의 염원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무장 신립의 마음을, 남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마애불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멀지 않은 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신립 장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는 이러한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때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전해지는 그 내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들의 끈끈한 정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낙엽과 눈이 쌓여 미끄럽다. 아래로는 남한강의 물이 보인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마애불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연 암벽에 조성을 한 이 마애불은 윗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처리를 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낮은 돋을새김을 한 것이 선각처럼 보인다. 아래는 생략이 된 듯한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에 속한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이 자애로움보다는 근엄함을 엿보게 한다. 흡사 근엄한 장수상의 상호다. 그래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지. 법의는 통견으로 그려냈는데, 구불구불한 선을 어찌 저리도 부드럽게 처리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절벽에 그려낸 마애불의 법의 자락이 바람이라도 불면 너풀거릴 것만 같다. 11세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동 마애불. 어찌 보면 투박하기 만한 이 마애불이 오히려 정감이 드는 것은, 토속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 보다.

 


마애불의 윗부분은 돋을 새김을 하였다. 찢어진 눈꼬리와 뭉뚝하고 큰 코가 위엄있게 보인다. 그래서 신립의 자화상이라고 했을까?


통견으로된 법의. 선각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돋을새김을 한 것이다. 법의의 굴곡된 주름이 자연스럽게 너풀거리는 듯 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조성을 한 것일까?

 

창동 마애불은 발목 밑의 부분이 생략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생략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한 밑 부분의 바위가 아래쪽으로는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저 부분이 저렇게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만일 그 밑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그 부분에 발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크기로 보아 그 움푹한 곳이 바로 발목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단을 놓고 마애불의 앞쪽에도 난간을 둘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에는 강물이 발목까지 출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마애불은 산이나 들에 조성한다. 자연적인 절벽을 이용해 마애불을 조성하지만, 이렇게 강가에 조성을 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당시의 지형적인 여건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주변을 보면 이곳이 물에 잠기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밧줄이라도 타고 내려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마애불의 밑을 보면 움푹 들어가 있다. 저 곳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면 발이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창동 마애불.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문화재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화재라고 해도, 그것을 만든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이 오래도록 문화재를 지켜 온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노력과 땀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2010년도에 발행했던 글입니다.
문화재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가끔 옛 기사들을 하나씩 재송고 하려고 합니다. 이점 유념해 주시고 오해 없으시기 비립니다. 

 

사람들은 절이 있는 곳은 잘 찾아가지만 사지를 찾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런 사지를 찾아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소중한 문화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철안마을. 청룡사지 입구에 도착하면 주차장이 있고, 우측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청룡사가 있다. 이곳이 예전 청룡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인가는 확실치가 않다. 청룡사는 고려 말 청계산 중턱에 작은 암자가 있던 것을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국사인 보각국사가 은거하였으므로, 태조가 큰 사찰을 세우도록 했다고 한다.

 


사찰은 간곳없고 문화재만 나란히

주차장에서 앞으로 난 개울가를 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문화재들이 있는 청룡사지를 만나게 된다. 당시의 웅장했다고 전하는 청룡사는 사라지고 이곳에는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의 부도탑인 정혜원융탑과 보물 제656호인 석등, 그리고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 등이 남아 있다.

석등과 사리탑, 그리고 탑비가 나란히 서 있는 청룡사지. 국보 제197호인 청룡사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이다. 보각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이라고 하였다. 이 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청룡사지에 자리한 보물 제656호 사자석등과 보물 제658호 정혜원융탑비

 

흔히 장명등이라고 하는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보물 제656호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전사자석등’이란 긴 명칭을 갖고 있는 이 석등은 사리탑에 있는 보각국사의 사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조성이 된 듯하다. 석등은 조선시대 석등의 기본형인 평면정사각형으로, 아랫부분에 한 마리 사자가 힘찬 모습으로 조성이 되어있어 사자석등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658호인 정혜원융탑비는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고려 우왕 9년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기린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융탑 뒤편에 자리한 이 탑비는 윗부분의 장식물인 지붕돌인 개석이 없는 대신에,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보 융탑의 조각 솜씨를 보고 숨이 멎다.

 

국보 제197호 청룡사지보각국사정혜원융탑. 크지 않은 그 탑을 보고 숨이 막힌다. 아래 기단을 부풀려 놓고 그 위에 몸돌을 올려놓았다.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용머리와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이 융탑의 몸돌은 항아리처럼 부풀려 있는데, 팔각의 몸돌을 이용해 많은 조각들을 해 놓았다. 모서리에는 기둥을 놓고 그 기둥마다 용이 기어오르고 있는 형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사천왕을 새겨 넣어 이 탑이 특이함을 보인다. 사천왕의 모습은 힘이 있고, 금방이라도 돌을 박차고 튀어나올 듯한 기세다. 조선 초기 석조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도 이러한 조각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이 융탑은 몸돌 뒤편에 사리공이 있어 이곳에 사리 및 옥촛대, 금망아지, 금관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 때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많은 문화재들을 수탈을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수난이 거듭되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언제나 온전하게 이 땅에서 지켜질 수가 있으려는지. 절로 한 숨이 나온다.

 

충북 충주시 단월동 455에 소재한 단호사. 단호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단호사 경내 대웅전 앞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이며, 1층 기단 위에 탑신부가 놓여 있다.

 

단호사 삼층석탑은 늙은 노송 아래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 540년 정도가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8.5m에 나무둘레는 210cm 정도이다. 현재 충청북도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옆으로 뻗어 많은 지줏대를 설치해 놓았으며, 한 겨울에 만난 노송은 가지에 눈이 쌓여 그 멋을 더하고 있다.

 

득남을 하게 한 단호사 소나무

 

단호사의 소나무는 전설이 있다. 이 소나무는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이다. 수령이 540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히 조선 초기에 심어졌을 것이다. 강원도 지방에 문약국을 경영하던 사람이 재산은 많은데 슬하에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손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충주 단호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손을 바라던 이 사람은 단호사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고 살다가 적적하여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불공을 드리면서 소나무를 지극정성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고향 집 마당에다 소나무를 심고 안방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꿈을 꾸었다는 것.

 

더욱 기이한 것은 고향에 있는 부인도 꿈을 꾸었는데 단호사 법당이 자기집 안방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부인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같은 꿈을 꾼 것은 서로 모여 살라는 부처님의 뜻으로 생각이 들어 강원도의 재산을 정리해 단호사로 법당 옆에 살림을 차렸다. 그 후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소원성취를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

 

소나무의 가지가 덮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에는 양우주가 가운데에는 탱주의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이 탑은 일부가 약가 부서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새겼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직하며, 4층 몸돌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충실히 갖춘 안정감이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답사 힘든 여정의 연속

 

단호사는 큰 절은 아니다. 하지만 대웅전에는 보물 제512호인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 단호사는 처음 고려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하는 소나무 전설에 보아도 이미 이곳에 조선 초기에 절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 날 찾아간 충주 단호사. 비록 화려하거나 많은 전각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방색이 강한 철불 등으로 보아, 철불과 석탑이 모두 옛 자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길은 늘 험난하다. 어느 곳 하나 편안하게 문화재를 만나지 못한다. 더울 때는 몸에서 쉰내가 나게 걸어야 하고, 땀을 비오 듯 흘려야한다. 겨울에는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장마철이 되면 카메라라도 젖을까 걱정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사시사철 고된 여정이다.

 

하지만 그런 고된 여정을 스스로가 택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몇 사람만 더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우리 소중한 문화재들이 지금보다는 더 보전이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조성한 간결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은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과 버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한 겨울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미륵대원지. 그곳에서 만난 석등은 그저 아무런 밀도 없이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 , 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받침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위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대원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오측석탑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석등이 서 있다.

 

 

이 두 개의 석등은 사각 석등과 팔각 석등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를 처음 석굴사원으로 보성할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석등은 간결하지만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석등에 쌓인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사계절을 다 돌아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문화재는 여름철에 더 아름답고, 또 어느 문화재는 겨울철에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미륵대원지야 말로 겨울철에 가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 겨울에 눈 속이 묻힌 석등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봄철에 이곳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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