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 계향산 산33-5에 소재한 미암사에는. 거대 와불과 함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1호인 부여 저동리 쌀바위가 소재한다. 쌀 바위는 산중턱에 있는 높이 30m의 거대한 자연석 바위를 말하는 것으로, 암반의 표면이 하얗다. 이 쌀바위가 있어 절 이름도 미암사(米巖寺)로 부른 듯하다.

 

미암사를 들린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겠지만, 그 당시 쌀바위 보다도 절 경내에 누워있는 와불에 더 놀랐다. 얼마나 와불이 컸으면, 그 좌대 아래에 법당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세계최대 와불을 조성한 미암사

 

와불은 흔히 열반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을 하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신불 8불 중에 하나인 와불은 부처님이 입멸하는 상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80년간 중생을 교화하고 인연이 다하여, 중인도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에서 하루 낮 하루 밤을 대열반경의 설법을 마치셨다.

 

대열반경을 마치신 후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입멸을 하셨다. 미암사의 와불은 그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길이 27m에 높이 6m, 6m나 되는 거대 와불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바닥에는 전륜과 음자 1만 팔천여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이 와불을 조성하는 동안 동지섣달인데도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피어있었다고 한다.

 

 

쌀바위에 얽힌 전설

 

백제의 역사와 함께 유원한 내력을 지닌 미암사쌀바위는 많은 전설과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일명 음겨석, 촛대바위, 부처바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형태를 비유하여 붙여진 듯하다. 미암사 경내에 높다랗게 솟아있는 쌀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한 노파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하여, 절에 찾아와 식음을 잊고 불공을 드렸다. 오직 손자가 잘 되기만을 바란 노파가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고 있자니,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현몽을 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노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어 바위에 심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바위에서 하루에 세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니, 아침과 점심, 저녁을 지을 때 이 쌀을 가져다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노파서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바위에서 쌀이 나오고, 그 쌀로 밥을 지어 손자에게 먹일 수 있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욕심 많은 노파가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벼 팠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전국에 산재해 나타나는 쌀바위의 전설과 공통적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그 행위를 한 인물이 다를 뿐이다. 금강산 화암사 입구에 있는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를 쌀바위라 하는데, 이곳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암사는 노파가, 화암사는 스님이란 존재가 다를 뿐이다.

 

이러한 쌀바위에 대한 전설은 인간의 욕심에 대해 경계를 하라고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고, 온전한 생활을 하라는 쌀바위의 전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이 된 윤황 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을 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ㄱ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 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를 할 수 있는 윤황 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 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단아함

 

윤황 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ㄱ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를 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재 한편에는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 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 선생 고택의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은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 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배꽃재’라고도 하고, ‘배꽃고개’ 혹은 ‘배티재’라고도 했다. ‘이치재’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대둔산 옆 자락을 끼고 넘는 도로의 정상에 있는 고개마루턱이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을 연결하는 고개를 말한다.

이 이치재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지의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그리고 이치대첩을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이치전투는 그럴 만큼 적을 완전 섬멸한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황진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는 곳

그 고개마루의 휴게소 앞이 바로 임진와란 때 대승을 거둔 뜻 깊은 장소이다. 지금은 그저 이치대첩지란 비가 서 있고, 후에 세운 ‘황진장군의 이치대첩비’ 가 있다. 그곳에서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왜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당시 왜병의 시체가 수 십리에 즐비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만하다.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수만의 왜병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라는 전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하동을 거쳐 올라온 왜병들과 연합으로 전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북현감 황진장군은 남원진에서 급히 전주로 올라와, 안덕원까지 침입한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바로 이치로 자리를 옮겨 휘하의 장수인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금산군 진산면의 어르신들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아군들의 치는 징 소리가 골짜기를 울려, 떠날 갈 듯 했다는 것이다.

계룡산과 지리산의 산신들의 각축장이 된 대둔산의 전설

예전에 대전KBS에서 방송을 할 때, 책을 내기 위해 이치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라북도 완주를 거쳐 금산으로 넘어오다가 진산면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치재에서 대둔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전라도 쪽은 기암괴석으로 되어있고, 충청도 쪽은 밋밋한 산이기 때문이다.


왜 대둔산의 형태가 양편이 그리 달라진 것일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양도의 산이 달라진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주신 대둔산의 전설

옛날에 지리산 산신과 계룡산 산신이 만났어. 바로 이 대둔산이 양산의 중간쯤이 되거든. 그래서 두 산신이 음식을 준비해서 이곳에서 만났는데, 지리산과 계룡산의 산신이 둘 다 여자였던 거야. 두 산신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언니, 동생을 정하기로 했지. 그래서 내기를 해서 언지 동생을 정하기로 한거야.

두 산신은 하나, 둘, 셋을 세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둔산에 있는 돌들을 바람으로 날려 상대 쪽으로 많이 날려 보내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했지. 다음날 아침 두 산신이 하나, 둘을 세었는데, 그런데 계룡산 산신이 셋을 세기 전에 미리 바람을 불어버린 것이야. 그래서 충청도 쪽 돌들이 모두 날아가 전라도 쪽에 쌓였다고 전하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듯도 하다. 9월 4일 늦게 도착한 대둔산 이치재. 주말 이치재를 넘는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지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탱자나무의 수령이 550년이라면 ‘엄청 나네.’라고 말할까? 아니면 ‘꽤 오래 되었네’라고 말을 할까? 그러나 탱자나무가 55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수령이 400년, 제79호인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가 400년인 점을 보면, 천안향교 앞의 탱자나무는 그 수령상으로는 으뜸 일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탱자나무가 주로 영, 호남지방에 많이 분포하며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탱자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된다. 탱자나무의 줄기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아 있어, 과수원의 울타리용 등으로 적합하다.


탱자나무 하나로 글을...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딴 분들은 여러 가지를 엮어 한 개의 글을 올리는데, 왜 꼭 하나만을 갖고 글을 쓰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웃고 말았다. 내 딴에는 꼼수일 수도 있다. 물론 주변에 많은 것을 엮어 글을 쓰면, 나도 편해서 좋기는 하다. 그만큼 글을 쓸 소재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란 생각이, 하나만 갖고도 소개를 하자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작 한 가지 소재로 글을 쓰는 이유는, 현장을 다녀야 하는 나로서는 묶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답사를 나가 1박 2일이나 2박 3일을 돌아다니면서 들고 온 자료가, 며칠 만에 밑천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다음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보호수로 지정딘 탱자나무. 밑동을 보니 이 나무의 수령이 보인다.

550년 한결같은 탱자나무

수령이 550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 온 나무는, 천안시 유량동 190에 소재한 충남 기념물 제110호인 천안향교 입구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인 탱자나무들은 그 높이가 3m 정도인데 비해, 이 나무는 높이가 7.5m에 둘레가 1.3m나 되는 거목이다. 현재 충남 도지정 제110호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향교를 찾아갔다가 문이 닫혀있어, 담 밖을 맴돌다가 우연히 만난 탱자나무다. 이럴 때 ‘수지맞았다’라고 하는 것인지. 나무의 밑동을 보니 나무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쇠기둥을 받쳐 놓은 것은 그만큼 가지가 넓게 퍼졌기 때문이다. 550년이란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열매를 많이 달고 있다. 간수를 잘했는지 잎과 열매가 튼실해 보인다.



굵은 가지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잔가지들은 춤을 추는 듯하다. 세월의 춤을...

제멋대로 퍼져나간 줄기는 오랜 연륜을 말하는 듯, 여기저기 굵은 홈이 파여져 있다. 구불거리면서 자란 줄기가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나무 스스로가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나 않았을까? 그 앞에 서보니 한낱 인간이라고 떠들어 댄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탱자나무에게서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는 무엇일까? 아마 변함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는 인간들을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구불거리는 가지들이 마구 웃는 것만 같다. ‘자연을 섬기지 못하는 인간들이 가소롭다’는 그런 웃음을. 오늘 이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거친 풍파를 다 이겨내는 것만이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을 지냈으면서도 아직도 많은 열매를 달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나간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