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무량사. 참 이곳은 아픈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어찌 보면 우리 판소리사에 가장 비극적인 일화 한 마디가 이곳에서 전하고 있으니.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고찰이다. 천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고난의 역사와 아픔의 문화를 속으로만 숨죽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눈이 내려 가득 쌓인 날 무량사를 찾았다. 미처 치우지 못한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길만 내놓았다. 만수산 무량사라고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석등과 오층석탑, 극락전이 나란히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보물 제356호인 극락전은 중층으로 지어진 전각으로, 밖에서는 2층이지만 안으로는 위아래가 통해 있는 독특한 건물양식으로 축조되었다.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무량사

 

무량사는 보물 제1497호로 지정된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를 모신 전각이 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남원 민복사지를 주무대로 한 <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로우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다. 서유영의 <배관기>에는 찌푸린 눈썹에 우수 띤 얼굴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어, 이 초상화와 같은 표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통의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표현들을 한다. 흔히 문화적 요소를 띤 요소들이 성공을 하지 못하는 영화계에서, 서편제라는 영화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흥행에 셩공을 했기 때문이다. 그 서편제에 제자들을 키우고 난 뒤 쓸쓸히 아편쟁이로 세상을 마감하는 한 인물이 있다.

 

 

극락전 뒤로 난 소로길을 따라가면 작은 전각 하나가 보인다.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고, 커다란 늙은 나무 한 그루가 풍취를 자아내게 한다. 삼성각(예전에는 산신각이었다)이다. 이 삼성각에 한 사람의 명창이 10년 세월을 피를 토하듯 소리공부에 전념하여 득음을 하였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조선조말 5대 명창이던 김창룡 명창의 동생인 김창진이었다.

 

비운의 소리꾼 김창진의 숨은 비사

 

김창룡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한 김성옥과 그의 아들 김정근(무숙이 타령의 대가), 그리고 김창룡과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3대의 명창 가문이다. 김성옥은 여산의 한 굴에 들어가 맛소리의 멋을 더하는 진양조를 창안한 본인이다. 굴 속에서 소리공부에만 전념한 김성옥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 박동진 명창이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에 출연하여 부여 무량사에서 김창진 명창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의 아들 김정근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천 장항 빗금내로 이주를 해서 살았다. 형인 김창룡에게는 소리를, 동생인 김창진에게는 북(고수)을 가르쳤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리꾼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천하게 대접을 항 때였다. 김창진은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지내다가, 큰 뜻을 품고 부여 무량사로 숨어들었다.

 

10년 세월, 당대 5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면서 명창들의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창진이기에 그 소리의 장점을 따서 만든 그의 소리는 원각사로 올라가 소리 한 판으로 5명창을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자신들의 판에 끼어든 김창진이 반가울 수가 없었을 명창들. 특히 친형인 김창룡명창이 가장 싫어했다는 것. 그런 고통을 잊고 싶어 내려온 곳이 서천 너더리(판교). 그곳에서 마지막 제자인 고 박동진 명창을 만났단다.(이 이야기는 KBS-TV 다큐멘터리 '중고제' 제작시 출연을 한 박동진 명창의 증언)

 

김창진 명창이 10년간 독공을 하여 득음을 했다는 무량사 산신각(현재는 삼성각)을 돌아보고 있는 다큐멘터리 화면속의 고 박동진 명창

 

그렇게 슬픈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하는 무량사다. 눈 쌓인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여기저기 자국을 남긴 발자국이 오히려 죄스럽기만 하다. 날씨가 춥긴 하지만 쉽게 무량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디선가 김창진 명창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의 초상화 3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왕을 제외하고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세 점이나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번암 채제공 한 사람뿐일 것이다. 채제공은 10여 년을 정조와 함께 했다. 홀로 재상의 지위에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하자 채제공은 그에 반대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이 채제공을 중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달 28일부터 20142월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개막을 한 번암 채제공전. 이곳에 가면 자신의 속한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 3점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초상화들은 3점 모두가 보물 제1477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채와 행낭을 든 시복본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에 그려진 것으로, 채제공이 73세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을 그렸다.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는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명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도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정조임금으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선물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시복본은 보물 제147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시복본 초상화는 120x79.8cm이며, 전체 크기는 173x90cm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금관조복본

 

보물 제1477-2호로 지정이 된 금관조복본1784년 작으로, 65세 때 그린 초상이다. 초상의 왼편에는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1743- ?)이 썼다. 이 금관조복본은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금관조복을 금박과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이 금관조복본은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화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 금관조복본 역시 당대의 화공인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조복본은 그림부분 145x78.5cm, 전체영정은 202.9x 91.6cm이다.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진 흑단령포본

 

보물 제1477-3호로 지정이 된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이다. 이 흑단령포본은 본래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이명기의 초상화법으로 보인다. 흑단령포본은 그림 크기 155.5x81.9cm이고, 전체길이는 210x94cm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그려진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조선후기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이 당대 최고임도 알 수 있다. 채제공의 3점의 영정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 초상화. 정조시 10년간이나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한 국권을 형성하기 위해 애쓴 정조를 도와 화성축성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