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고택만이 아니고, 각종 문화재나 먹거리, 심지어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길과 동, 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이렇게 무궁한 소재를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래도 문화재라는 것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택. 그것이 사적이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 간에, 그저 찾아가 보는 것보다는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이 한결 재미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소재한 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 우리 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본다.



함양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깉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다. 건축물을 볼 때 그 형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의 대지(아래)를 살펴보면 과거 그 집의 가세를 판단 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저택인 오담 고택

오담 정환필(1798~1859)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손이다. 선생은 종가에서 분가해 와 정여창 선생의 고택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두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자연석을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오담 고택은 종가에서 분리해 온 영남 양반집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담 고택은 최근 복원과 보수를 한 듯한데, 이런 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고택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1) 먼저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보자




집의 전체적은 구조란 와가인지 초가인지를 본다. 이런 형태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와가에도 팔작지붕, 맞배지붕, 합각지붕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위 오담 고택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벽에 달아낸 형태로 자칫 팔작지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가의 경우에도 그 이엉을 얶어 용마름을 앉는 방법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툇마루나 대청, 방의 꾸밈과 기단, 기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반 부정형의 돌을 사용했는지를 본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인지, 팔각이나 사각,혹은 원형기둥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의 구성고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고택에는 수 많은 집이 있다.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행랑채, 대문채, 아래채, 광채, 별당채 등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2) 집의 뒤편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고택에는 많은 문들이 있다. 대문을 비롯해 중문, 협문, 쪽문 등 큰 집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문에 10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하기에 그 문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용도로 사용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문의 경우에는 바깥 중문과 안 중문이 있고, 때로는 담에 쪽문을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기에 그 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알아보아야 한다.


오담 고택에는 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서 안채로 통하는 협문은 나무로 꾸몄다. 대문의 경우에는 소슬대문 옆에 쪽문을 달아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은 대개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의 식솔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 고택은 문 하나라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다. 문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에 따른 내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 뒤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개는 정면을 많이 보는데, 집 뒤편에는 굴뚝을 비롯해 벽의 형태, 배수로 등 볼 것이 많다. 또한 굴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3) 볼품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글이 된다.





고택을 둘러보면 가재도구가 있다. 실생활에 사용했을 이런 것들은 고택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툇돌은 어떻게 놓았는지, 마르 밑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부엌은 창문을 어떻게 내었으며, 환기를 돕는 까치구멍은 어떤 형태인지도 살펴보자. 그리고 시렁은 어디에 놓았는지, 시렁 위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많은 가구들과 문짝의 형태, 또는 난간은 어떻게 꾸며졌는지도 보아야 하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찾아보다가 보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대로 꾸민 집인지를 알아보자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도 그렇지만 복원을 하면서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복원이란 말 그대로 예전에 형태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복원이 되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면, 황당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오담 고택의 경우에 사랑채와 안채 중간 한편에 장독대를 마련하였다. 시멘트로 바른 것은 그렇다치고 장독대에 담장을 둘러 놓았다. 보기가 좋은 수도 있지만, 문화재란 항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담장을 둘러 놓은 것도 보기가 껄끄러운데, 사랑채 뒷방을 보면 앞쪽 방보다 방바닥이 낮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의 층 간격이 넓어 오르내리기도 버겁게 보인다. 원래 이런 형태였는가를 알아보니, 복원을 하면서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원형이 변형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그 소중함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문화재 답사는 단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쉽지 만은 않은 문화재 답사. 앞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답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우선 편안하게 옛 집 이야기를 끌어가려고 한다. 우리가 흔히 고택, 가옥, 생가, 생가지라는 용어를 써서 소개를 하는 집들은 조금씩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옛집 기행을 하면서 돌아본 바로는, 고택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지 않거나 집을 지은 일족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살 경우에 붙은 명칭이고, 가옥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명칭을 붙인다.

가옥의 경우 처음 그 집을 축조한 사람이 아닌, 현재 소유권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붙여 ‘○○○가옥’이란 명칭으로 사용한다. 생가는 그야말로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을 말하는 것이고, 생가지란 그 집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는데 집의 형태가 당시의 집이 아닐 때 붙이는 명칭으로 보인다. 그동안 전국의 가옥을 돌아다니면서 보니 이런 형태로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명칭을 어떻게 붙였는가는 정확히 가늠은 되지 않는다. 다만 오래도록 다니면서 본 결과 대개는 이런 형태로 명칭을 붙인 것 같다.


독립만세의 고장 천안

충남 천안은 독립만세의 고장이다.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구국전선에서 열정을 받쳤던 이동녕 선생이 목천에서 태어났다. 목천과 병천은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또 한 분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유석 조병옥은 병천면 봉두리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은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유석 조병옥(1894, 5, 21 천안 병천 ~ 1960, 2, 15 미국) 박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또한 정치가로 일생을 살았다. 부통령 출마와 대통령 출마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선거유세 중 병으로 인해 미국으로 급히 이송이 되어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 중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병옥은 일제 강점기에는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와 외무부장관 등을 거치기도 했다.



집안에 있는우물과(위) - 자형으로 꾸민 안채(가운데), 그리고 헛간채(아래)

조촐한 초가집, 그러나 쓰임새 있게 꾸며

유석 조병옥의 생가는 천안시 병천면 봉두리 261-6 도로변에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유관순의 생가가 있어, 두 곳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날따라 국지성 호우로 인해 길을 걷기도 힘든데, 다행히 답사를 하는 시간에는 비가 멈추어주었다.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조병옥의 생가는, 조병옥 박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조병옥 박사가 이 집에 살던 때는 초가였으나 와가로 변형되었던 것을, 문중의 고증을 받아 원형 그대로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였기 때문에 ‘생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 같다. 집은 - 자형의 초가로 지어졌다. 대지 550평에 안채가 15평, 헛간채가 7평 정도의 크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측으로 우물이 보인다.



좌측 끝에 툇마루를 달아내고(위) 정면으로는 반 칸 정도의 한데공간을 마련했다(가운데)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부엌을 놓았다(아래)


-자 형으로 꾸민 안채는 모두 네 칸으로 구성을 하였고, 동편으로 반 칸의 툇마루를 놓았다. 이곳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을 보면 우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툇마루가 달린 한 칸의 사랑으로 꾸며져 있다. 맨 끝에 툇마루가 달린 방에는 한데 부엌을 놓았으며, 정면에는 반 칸 정도의 빈 공간을 개방형으로 만들어 이동이 편리하게 하였다. 측면은 이러한 개방된 곳 때문에 칸 반 정도로 보인다.

헛간채는 모두 세 칸으로 광 한 칸을 두고 가운데는 헛간으로 꾸몄다. 그리고 끝에 한 칸은 마구간으로 사용을 하였으며, 처마를 길게 달아내 비에 젖지 않도록 한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특별한 것은 없는 초가집이다. 그러나 15평이라는 적은 공간을 아주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았다.



헛간채는 처마를 길게 빼어 눈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위) 여물통과 안채와 헛간채(아래)

지금은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어린 시절 조병옥은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뛰놀았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아간 조병옥의 생가.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는 이 집에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한 세대를 풍미한 인물이 태어나고 자란 것을 생각이니, 괜히 마음이 경건해진다. ‘사람은 죽어서 그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말처럼, 이 작은 초가집에서 그 이름을 남긴 역사의 인물이 살다가 갔다. 그래서 옛집의 순례는 의미가 있는가보다.


방안과 뒤뜰. 간소하게 꾸며진 이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석 조병옥 선생은 독립운동과,
나라의 민주주의의 꽃을피우기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