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의 사랑채 굴둑. 전형적인 초가의 굴뚝이다. 제천시 금성면 소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위는 사적 제230호인 천안의 유관순 생가지의 굴뚝이다. 전형적인 민초들의 굴뚝 모습이다. 아래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38호인 청원 낭성 관정리민가의 굴뚝이다. 연도에서 솟은 연소통이 짧다. 이 집이 있던 곳은 바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가의 연소통치고는 너무 짧은 감이 있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초가집 굴뚝이다. 바람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담장에 연도를 집어 넣었다. 가운데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인 고창 신재효 생가의 굴뚝이다. 낮지만 연도를 길게 빼어 집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아래는 삼척시 도계의 신리 너와집 굴뚝이다.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는 수원 파장동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광주이씨 월곡댁의 굴뚝을 세우는 연도이다. 연도만 마련하고 연소통은 마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운에와 아래는 남원 운봉에 있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지에 세워진 집이다. 측면을 보고, 뒷면을 보아도 굴뚝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의병대장인 ‘신돌석장군’의 생가지가 있다. 이 생가지에는 작은 초가 한 동이 서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집과 같이 지어진 집이다. 집은 고택과 생가, 가옥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생가는 태어난 곳이고, 가옥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말한다.

생가지란 그 사람이 태어났으나 현재의 집은 태어날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덕에 있는 신돌석장군의 집도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그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에 그 집터에 지은 집일뿐이다. 하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그대로 지었으니,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가 없다.


의병장 신돌석은 누구인가?

신돌석(申乭石, 1878 ~ 1908년)은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당시의 의병장들이 대개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므로, 신돌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평민의병장이 된다. 영덕 축산면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본명은 신태호이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이 되자,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장군은 울진 등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 척 침몰시켰다.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과 경상북도의 내륙지방, 지금의 원주까지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였다.

신돌석장군의 이강년의 의병과 순흥(영주시)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곳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활약을 하였다. 경기도 여주 출신 이인영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자, 영남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이 되기도 했다.




신돌석장군에 대한 설화 한 토막

이렇게 전국적으로 전공을 세운 신돌석장군은 설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어려서 고래산에 나무를 하러 간 신돌석은 ‘천서(天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힘이 장사였으며 달리기를 잘해, 하룻밤 사이에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힘이 센 신돌석은 도둑을 잘 잡기도 했고,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출귀몰한 신돌석장군이 죽은 것은 왜군들의 치졸한 방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총을 쏘아도 죽지를 않는다고 전해지자, 왜병은 신돌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런 왜병의 속임수에 넘어간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 김상호와 함께 집에 찾아 온 신돌석장군에게 독주를 먹인 후 도끼로 살해를 했다고 한다. 이 삼형제는 신돌석장군의 머리를 잘라 왜병에게 가져갔으나, 산채로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출한 네 칸의 초가에서 영웅이 태어나

신돌석장군의 생가지에는 현재 네 칸짜리 초가가 한 채 있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독립의지를 꺾는다는 핑계로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을, 1942년에 기와로 복원을 하였으며, 1995년 8월 19일에 생가지 정비를 하면서 원래의 형태로 복원을 했다고 한다. 집은 동편에 부엌을 두고 방 한 칸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다.

집은 단출하며 부엌만 앞으로 돌출을 시켰고, 방과 마루는 앞으로 처마를 빼고 뒤로 물려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대청에는 마주보고 문을 내어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독은 부엌 뒤편에 놓았으며, 앞마당에 돌우물을 있다. 평범한 농민의 집인 이곳에서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보면 13도 총 의병대장이었던 이인영장군의 집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왜 의병장들의 생가는 이리 초라한 것인지.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명창의 마을이다. 일찍 우리 판소리사에 한 획을 그은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며, 여류 국창이라는 박초월 선생이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나셨다. 이 마을에는 현재 명창의 생가라는 두 채의 집이 10여 m도 안 되는 거리에 남아 있다.

운봉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 명창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일세를 풍미하는 명창들이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우리 판소리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들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을 찾아가 본다.



이웃하고 있는 두 분의 명창 생가

지금은 밖으로 초가대문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나온다. 소리를 하는 동상이 서 잇다.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의 형태이다. 이 뒤편으로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송흥록의 집은 정면 세 칸에 측면은 한 칸 반의 초가집이다. 한 칸은 부엌이고 가운데 한 칸은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 된다. 박초월의 집은 그 앞에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집과는 역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방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고, 뒤편에도 문을 내었다. 가운에 방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끝 방은 한편에 아궁이를 들였다. 경국 방의 넓이는 정면과 측면 모두 한 칸인 셈이다. 이 비좁은 집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것이다. 송흥록은 조선조 정조 초기인 1780년경에, 명창 권삼득의 고수인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생가. 세칸으로 된 초가에서 태어났다.

귀곡성의 대가 가왕 송흥록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를 했다는 송흥록명창. 중고제의 시조인 김성옥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김성옥이 여산 동굴로 들어가 동굴독공을 하다가 만들어진 진양조를, 송흥록에게 전해주고 찬 굴에서 얻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송흥록은 그 소리를 판소리에 접목을 시켜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조선말기 우리 판소리에 소리의 극치라는 계면조와 진양조가 송흥록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다.

박초월은 이곳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익히고,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김정문은 남원 출신의 명창이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소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긴 명창이다. 송만갑은 송흥록, 그의 동생 송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소리꾼의 집안이다.



명창 박초월의 생가. 송흥록명창 생가 앞에 있다.

결국 박초월은 송흥록과 같은 소리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박초월은 (사) 한국국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대를 거슬려 두 명의 명창이 태어난 이곳. 사람들은 그 내력을 잘 모르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걱정을 한다.

사는 집이 중요한 것일까? 그 좁은 초가 삼 칸 집에서 일세를 풍미하는 두 명의 명창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우리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운봉을 떠나면서 뒤로 들리는 소리가 발길을 붙들고 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 한 야산에 올라 북을 치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라는 말이. 그렇게 전국을 20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제를 알만하니 기운이 달린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판소리 이론가이면서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1884). 오위장을 지낸 신재효는 순조 1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질로 독공으로 소리명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위장을 지낸 뒤에 향리로 돌아온 신재효는 마흔 네 살부터 소리꾼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는 판소리를 정리하고 후계자를 키우는데 몰두하였다. 춘향가, 박타령, 토끼타령, 가루지기타령, 적벽가, 심청가의 여섯 마당을 오늘날 명창들이 부르는 바와 같이 정리하여 완성시켰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신재효가 고종 21년까지 살던 집이라고 전한다. 사랑채만 남아있는 이 집은 철종 1년인 1850년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며, 광무 3년인 1899년에 그의 아들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신재효의 집은 모양성 밖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요 민속자료 지정 전까지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였다.


원래의 집은 주변의 물을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 연못으로 들어가게 한 운치가 있는 집이었으나, 지금 건물은 많이 개조되고 변형된 것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6칸 집 곳곳에 남아있는 운치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一 자형 평면 초가로 지어진 이 집은 현재는 부엌 쪽에 초가 일각문을 두고 있다. 앞쪽에는 판소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담장 일부를 터놓았다. 왼쪽으로 부터 한 칸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대청 한 칸과 통 두 칸의 방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통 두 칸의 방에는 판소리를 하는 모습을 한 사람모양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 선 돌로 쌓은 우물이 보인다. 부엌은 까치구멍을 넓게 놓아 시원하게 보인다. 부엌과 방 사이에는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들었으며,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았다. 대청은 마루방으로 놓았으나, 밖에서 보면 대청이란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집은 단출하면서도 소박하다.

부엌을 뺀 다섯 칸의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도왔다. 여기저기 많은 부수적인 장치를 하지 않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에는 옹기 두 개를 올려놓은 낮은 굴뚝이 눈길을 끈다. 현재의 연못은 집 앞에서 배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차게 되어있다. 하지만 삭막하게 마른 연못은 왠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물이라도 좀 채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광대가의 산실 신재효 생가

거려천지 우리 행락 광대 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요

둘째는 사설치레 그다음 득음이요
그다음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구성지고 맵시 있고

경각에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중의 풍류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야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하략) / 판소리 단가 광대가 중





조선 고종 때 동리 신재효는 이집에서 광대가를 지었다. 광대가는 단가로 광대의 이론을 사설로 쓴 것인데, 광대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광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인물치례, 사설, 목소리, 너름새를 그 조건으로 들고 있다. 오래 전에 ‘중고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 집을 처음 찾은 후 벌써 몇 번째인지. 몇 번 보수를 한 것을 빼고는 처음 본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관람객들을 돕기 위해 판소리를 하고 있는 인형들을 전시했다는 것을 빼고는.



일생을 판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 동리 신재효. 고창에 많은 명창이 배출이 된 것도 신재효 선생의 그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집안을 돌아보면서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안내판이라도 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집을 돌아 나오는데 뒤편에서 판소리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광대가 한판이라도 좀 들을 수 있도록 시설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