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 (定山鄕校)’가 소재한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향교 입구인 청아루

 

정산향교의 구성은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청아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현재는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정산향교의 특별한 구성은 입구에 있는 누각인 청아루이다. 목조건물로 된 향교 입구인 청아루는 아래로는 삼문을 내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이 청아루는 밖으로만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으로도 또 문이 있는 이중문으로 꾸며져 있다.

 

 

장맛비 속에 찾아간 정산향교

 

벌써 정산향교를 다녀온 지가 20여일이 지났다. 문화재 답사란 그 특성상 다녀왔다고 바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꽤 많은 양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종류가 다른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소개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결국 한 번 답사를 다녀오면, 누구 말마따나 곶감 빼 먹듯 할 수밖에.

 

7월 14일 돌아본 충남 청양군. 정산향교는 답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그런 날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정산향교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리 여름날이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일찍 날이 저문다. 오후 5시 경이었지만, 벌써 어둑한 기운이 감돈다.

 

 

향교는 대개 그 담장 외곽에 붙어있거나, 가까운 곳에 관리를 하는 집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럴만한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 빗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빗길에 멀리 달려온 향교가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담장 밖으로 돌아보는 수밖에.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에게 묻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면 대개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들은 향교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경내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산향교의 경우에는 주변 높은 곳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에 높이는 18m, 밑동의 둘레가 5.2m가 넘는 거목이다.

 

 

은행나무 쪽으로 올라가면 정산향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은행나무와 정산향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향교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밖에서나마 향교를 살펴보는 수밖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려니 자라난 풀들이 엄청나다. 풀 더미를 헤치고 담장 가까이 가서 향교를 살펴본다.

 

정산향교는 딴 곳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성전의 경우 외담 안에 다시 내담을 쌓아 놓았다. 또 측면 담벼락에도 격자창을 내어 놓았다. 다행히 향교의 관리자가 대성전 위편 담장 밖의 풀을 깎아놓아 주변을 돌아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청양 정산향교. 비록 안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돌면서도 향교의 곳곳을 살펴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향교 담장 밖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차에 오르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가을에 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 한 선생은 한 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 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이등박문

 

 

7월 14일 장마비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집에 대해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 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 ‘장곡사(長谷寺)’는,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리에 소재한다. 사지에 의하면 장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문성왕 12년인 850년에, 보조선사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장곡사는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는 절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찰이다.

 

7월 14일(일), 엄청나게 들이 붓는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장곡사. 경사진 산비탈에 여지저기 전각들이 서 있고, 산비탈에는 몇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서 있다. 그런 나무들만 보아도 장곡사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장곡사는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왜 두 개의 대웅전을 갖고 있을까?

 

장곡사 경내로 들어서면 운학루와 보물 제181호인 조선조에 지었다는 하대웅전을 만날 수가 있다. 하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보물 제33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에 조성한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하대웅전 뒤편으로 난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보물 제162호인 상대웅전을 만난다. 상대웅전의 전각 안에는 국보 제162호인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과 석조대좌, 그리고 보물 제174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대좌가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장곡사에는 대웅전이 두 개일까 하는 점이다. 구전이겠지만 2005년 장곡사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장곡사의 대웅전은 원래 상대웅전이다. 그런데 상대웅전에 모셔놓은 철조약사불좌상이 하도 영험해 이곳에 와서 병이 낫기를 바라고 불공을 드리는 사람은 모두 완치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약사불 한 분을 아래쪽에 하대웅전을 짓고 모셔놓았다.’는 이야기를.

 

그래서인가 장곡사 하대웅전에도 석가모니불을 모시지 않고, 금동약사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번에 장곡사를 답사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워낙 많이 쏟아지는 장맛비로 인해 여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미쳐 확인을 하지 못했다.

 

 

범종루에 있는 기물 두 가지

 

장곡사 경내에 들어서면 운학루 옆에 범종루가 자리하고 있다. 범종루는 종과 북, 운판과 목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이 범종루에 있는 네 가지를 ‘불전사물’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각에 있는 불전사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범종은 용뉴와 음통, 그리고 종 등으로 연결이 된다. 이 범종에서 걸 수 있도록 조성한 용뉴는 용왕의 아들인 ‘포뢰’를 상징하는 욤머리를 조각한다. 그리고 대개 몸통에 조각을 하는 보살상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목적이다. 즉 범종은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을 깨우치는 대자대비의 소리라고 볼 수 있다.

 

불전사물은 처음에 법고를 먼저 치고 나서, 그 다음에 종을 친다. 그리고 목어와 운판의 순으로 진행을 한다. 법고는 대개 범종루의 대들보 등에 매달거나, 법고좌라는 북의 받침에 올려놓기도 한다. 법고는 온 사바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법고는 소가죽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축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강하다.

 

 

목어는 나무로 물고기 형상을 조각하여 그 속을 파내고, 채로 속의 안면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목어는 바다 속에 살고 있는 생명들을 제도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운판은 청동으로 만든 금속판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이 운판은 뭉게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雲版)’이라고 했으며, 이는 대개 모든 것을 배불리 먹인다는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일설에는 중국 송나라 때 운판을 공양간에 매달아 놓고 대중들을 모이게 할 때 쳤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보면 운판은 모든 생명을 배불리 먹인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하다. 거기다가 공양간에 이 구름처럼 생긴 운판을 매달아 놓은 것은, 화재를 막기 위한 뜻도 있을 것이다. 구름이 비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장곡사 법고와 통나무 그릇

 

범종각 왼쪽에는 찢어진 큰 북 하나가 매달려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이 큰 북은, 오랜 옛날 장곡사에 있던 한 승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중생을 계도하는 뜻에서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북은 생김새가 지금의 북과는 다른 부정형으로 북통이 조형되어 있다. 앞 뒤편의 가죽은 모두 찢어졌으나, 북통은 그대로 보존을 하고 있다.

 

 

대북의 반대편 바닥에는 통나무 그릇 하나가 보인다. 이 통나무그릇은 오래전 장곡사 승려들이, 밥통 대신 사용하던 생활도구로 전해오고 있다는 것. 길이 7미터, 폭 1미터, 두께 10Cm인 이 통나무 그릇의 바닥 한 복판에는 물이 나갈 수 있는 배수구가 보인다. 도대체 장곡사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살았던 것일까?

 

장대비 속에서 만난 장곡사 범종각의 두 가지 기물. 대북과 통나무 그릇의 연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 갖고도 과거 장곡사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어찌 꼭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만 중요한 것일까? 이렇게 과거의 소중한 기물 하나가 주는 의미는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을.

 

마을의 입구나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나무나 돌을 조형 해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기록에 보인 장승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나 ‘수살목’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는 장승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비보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드는 재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장승나라 청양, '장승무덤'도 있네.

 

청양군 대치면 장곡사 입구에는 장승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장승공원은 칠갑산 주변 마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10여 개 마을에서 지내오는 장승제로 인해, 1999년 칠갑산 장승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조성한 전국 최대의 장승공원이다. 칠갑산 주변에는 대치리 한터마을을 비롯하여, 이화리, 대치리, 농소리, 정산면 용두리, 송학리, 천장리, 해남리, 대박리, 운곡면 위라리, 신대리 등에서 장승제가 전해지고 있다.

 

 

장승공원 안에는 장승체험관을 비롯하여 전국 최대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청양 마을의 장승과 각 지역별 장승, 시대별 장승, 창작 장승, 외국의 장승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약 300기가 넘는 장승공원에 서 잇는 장승들은, 그 수명을 다해 쓰러지면 ‘장승무덤’에 갖다가 놓는다.

 

이 많은 장승들, 비오는 날 더 괴이하네.

 

7월 14일 비가 쏟아지는 장마에 장곡사를 둘러보고 난 후, 장승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들고 작은 카메라를 지참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심하게 내리니 장승공원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편안하게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 있는 장승들을 만나본다.

 

 

왕방울 눈에 매부리 코, 듬성듬성한 이빨을 보이며 희죽이 웃고 있는 장승. 그런가하면 새치름한 표정으로 비가 싫다는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간 장승도 보인다. 허리가 휘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장승이 있는가 하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웃음보를 터트릴 것만 같은 장승도 보인다.

 

장승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별별 장승이 다 있다. 그 많은 장승들이 하나같이 모습들이 다 다르다. 장승은 깎는 사람의 모습과 마음을 닮는다고 했던가? 아마도 이 장승을 조성한 작가들의 심성이란 생각이다. 우중에 돌아 본 청양의 장승공원. 속으로 되놰 본다.

“이 많은 장승들이 서 있는데 청양에 무슨 일이 있겠어?”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