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우만동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봉녕사. 비구니 사찰인 봉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광교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성창사라 하였고, 조선시대 1469년 혜각 국사가 중수하고 봉녕사라 하였다.

 

1971년 묘엄스님이 주석하신 이후, 40여 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74년도 봉녕사 강원(승가대학)을 개원하였으며, 19996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금강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하였다. 봉녕사는 승가교육과 율학연찬을 통한 수행도량으로서 사격을 갖추고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세계사찰음식 다 모여

 

이 비구니 가람인 봉녕사에서 매년 가을이 되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어 잔치를 벌인다. 바로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로 5회 째를 맞이하는 사찰음식 대향연은 4일과 5일 이틀 동안 봉녕사 경내에서 열린다.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의 웹툰에는 사찰음식에 관한 소개가 올라와 있다. 한 마디로 그럴 것이라고 공감이 간다.

절 행사가 고루하다는 편견, 사찰음식이 심심하다는 관념, 내 종교만 최고라는 이념, 머릿속 복잡한 상념, 요즘애들 부족한 개념, 다 떠나서 여기 천년고찰 봉녕사에서 자연이 준 감사한 먹거리에 전념이란 소개 글이다. 그 밑에는 오늘 하루는 치맥(치킨과 맥주)을 거두고, 내 몸에게 자연을 선물하자. 그것도 안되겠니?’라는 문구이다.

 

 

사찰음식이란?

 

모든 법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음식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중일아함경 중에서 부처님 말씀). ‘사찰음식은 기본에 충실한 음식이며, 그 기본이란 바로 자연과의 조화이다.’(묘엄스님)이라고 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나에게 오기까지 흙, , 햇볕, 바람, 농부의 노고 등 무수한 인연을 따른다는 것이다.

 

사찰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이러한 인연에 감사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생명존중사상을 실천하는 수행방편이다. 사찰음식은 자연의 입맛을 잃어버리고, 인스턴트와 가공식품으로 건강이 무너져가는 현대인들에게, 단순 종교음식이 아닌 대안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에는 이러한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외에도 베트남, 중국,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일본, 네팔, 티베트, 부탄 등 동남아 불교국가들의 음식도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부대행사도 눈길

 

축제 첫날인 4일애는 사찰음식 경연대회 시식, 평가회를 시작으로, 우관스님의 사찰음식 강의로 이어졌다. 또한 대적광전 앞에서는 수원의 여성으로 대표적인 인물인 나혜석이 즐겨먹던, 봉녕사 비빔밥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스님들의 수행식인 사찰음식은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며, 제철에 나는 음식재료를 활용해서 조리한다. 또한 동물성 식품이나 파·마늘·부추·달래·양파 등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아, 조리를 할 때 사용하는 원재료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사찰음식 대향연 장에서 만난 한아무개(, 45)

사찰음식이라고 해서 단순히 심심한 음식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다양한 음식을 보게 되어 즐겁다. 더구나 이곳 강원의 학승들과 외국인들, 우리나라의 사찰음식 연구가들이 만들어 전시를 해 놓은 음식들을 보니, 어떤 요리경연대회보다도 훨씬 좋다는 생각이다. 내 몸을 위해 앞으로 이런 사찰음식과 같은 요리를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둘째 날인 5일에는 지견스님의 부적강의와 비빔밥 퍼포먼스가 대적광전 앞 부스에서 열린다. 또한 일본과 중국, 스리랑카, 미얀마의 사찰음식 소개와, 봉녕사 사찰음식교육관 개관식, 산사음악회가 열릴 예정이다.

대원사는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이 지난 사찰이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는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였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소된 대원사를 중창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 이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집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다.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의 천왕사 성모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들린 대원사는, 한창 관람을 위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대원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방장산 대원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것을 둘러보고 싶어서인가 보다.

 

 

대원사와 인근 지리산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만큼 자연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새로 깔아 놓은 아스팔트가 발목을 마구 잡아끈다. 아마 너무 수려한 절경이라는 대원사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을 택해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내리는 잔비로 길이 푹푹 빠져버리니 이래저래 대원사를 찾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아름다운 계곡과 어우러진 대원사

 

절이 보이는 입구에 다다르니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이 보인다. 대원사의 계곡은 대원사입구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 약2km에 이르는데, 산이 높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뿜어내는 물과 괴암은 절경이다. 용이 100년간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소, 가락국 마지막 구형왕이 이곳으로 와서 소와 말의먹이를 먹였다고 하는 소막골 등이 위치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대원사 앞에 이르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짙은 신록을 자랑하고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소나기로 변했다. 우산도 없이 여정을 재촉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그래도 어찌하랴 다만 몇 장이라도 사진을 담아야겠다고 작정을 한다.

 

손으로 카메라는 덮고 사진을 몇 장 찍는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다. 빗방울이 금방 렌즈에 떨어져 얼룩이 져 버린다. 지난 번 대원사를 찾던 날도 봄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져 사진을 찍지 못하고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번에도 또 비가 온다. 대원사와 나와는 아무래도 비로 맺어진 인연인가 보다.

 

 

초겨울에 달려가고 싶은 대원사

 

대원사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담하고 가지런한 가람이다. 이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1,500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행승들이 이 절집을 찾았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거쳤겠는가? 지리산이라는 지명도 알고 보면 이곳에 머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대원(大源)이니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오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몇 장인가 더 사진을 찍은 후 대원사를 떠난다. 오늘 갑자기 방장산 대원사로 달려가고 싶다. 아마 그 절경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비로 인해 맺어졌던 인연이 또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이다.

경기도 화성시 북양동(주석로 80번길 139)에 소재한 비봉산 봉림사. 봉림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3) 때,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정확한 설은 아니나 만일 전하는 바대로라면, 봉림사는 1,500년이나 지난 고찰이 되는 셈이다.

 

‘비봉사’라는 절 이름도 궁궐에서 기르던 새 한 마리가 이 숲으로 날아들었다고 해서, 산 이름을 ‘비봉산(飛鳳山)’이라 불렀으며 절 이름은 ‘봉림사(鳳林寺)’리고 불렀다는 것이다. 11월 22일 찾아간 봉림사. 일주문을 지나면 양편으로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조금 오르다가 보면 새로 지은 듯한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은 2009년 12월 16일에 현판식을 가졌다.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 봉림사

 

아직 천왕문에는 아무런 조형물이 없다. 위로 조금 오르다가 보니 석물로 만든 금강역사가 계단에 양편으로 서 있다. 그 뒤편에는 아래층은 사천왕각이란 현판이 걸리고, 위편에는 범종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천왕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서 만나는 정면의 극락전은 정면 세 칸의 맞배지붕이다.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98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화성 봉림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 안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 목불좌상으로,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편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체구 역시 단정하면서 건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U자형으로 처리된 가슴에 젖가슴을 불룩하게 표현하고, 통견의 불의에는 띠 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 주름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고려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 뒷산에 보이는 섬뜩한 표시

 

극락전을 나와 좌측을 보니 소대가 아름답다. 소대를 촬영하려고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무엇인가 하여서 자세히 보니 이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지뢰제거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지뢰라는 삼각표시를 한 깃발이 달려있다. 제거는 했지만 완전히 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보니 절 뒤편 산 여러 곳에 이런 표시가 보인다.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봉림사 삼성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1988년 용상스님이 신축하였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렇게 표시를 해 놓아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겠지만, 왜 이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는지 궁금하다.(사진은 일부러 찍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동란 때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으로만 상륙한 것이 아니라, 화성 서신 앞바다로 진격한 UN군들과 이곳에서 접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지뢰를 매설한 것이 누구인가를 알만하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사천왕각을 지나서면 너른 극락전 앞마당에,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은 요사가 있고 우측에는 설법전이 자리한다. 설법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1979년에 조성한 사리를 모셔놓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사리는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을 할 때, 복장물로 나온 것이다. 복장물에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 전기 사이에 각종 경전 8종이 나와 보물 제1095호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1339년에 간행된 목판본인 금강경은 그 크기가 가로 7.3cm, 세로 4.5cm로 담배값보다 적은 크기이다. 이 목판본 금강경은 섬세한 필치로 변상도까지 갖춘 호신용 경전이다. 이 외에도 복장에서는 각종섬유와 곡물병, 사리병, 구슬 등이 함께 발견이 되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

 

 

 

뒷산의 안내표시는 그렇다고 쳐도 초겨울의 봉림사 경내는 그렇게 또 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보물을 안고 있는 천년고찰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뒷산에 대한 대대적인 지뢰제거를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 하나로 인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남원 천년 고찰 절집인 선원사에는 예쁜 녀석들이 지난 해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약 한 달 전에 귀여운 녀석들을 낳았다고 하네요. 이 녀석들 암 수 한 마리씩인데 아직 젖도 떼지 못했습니다. 엄마 곁을 따라다니다가 사람들이 오면 쫄쫄거리고 따라 나옵니다.


하얀 색이 솜털 같기만 한 포메라이안 두 녀석인데 엄마를 떨어져서도 곧잘 놉니다.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요. 두 녀석과 함께 있으면 걱정 근심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역시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끼들은 다 귀여운 것 같습니다. 이 녀석들 좀 보시죠.


  

이 녀석이 숫놈입니다. 그래도 으젓하죠.


두 녀석은 꼭 붙어 다니네요. 아직 어려서인지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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