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은 제6대 군주로 재위기간은 981~997년이다. 벌써 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다.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에 소재한 청안초등학교 교정에는 천살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65호이다.

 

은행나무는 생명이 길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병충해가 없으며 잎을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을에 단풍이 들 때까지,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로수 등으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에는 용문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

 

잎이 없어도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압권인, 천살을 넘긴 청안초등학교 교정 안 은행나무. 나무의 높이는 17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7.4m이다. 동서로 뻗은 가지는 16.5m, 남북으로도 17.5m여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학교 교정 안에 우뚝 서 있다.

 

"아저씨 은행나무 찍으러 오셨어요?"

"그래."

"그거 왜 찍어요?“

"응, 신문에 내려고."

"그럼 교과서에도 실려요?"

"아니. 신문에만 실려."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천년을 넘게 살았잖아요. 이렇게 큰 나무는 교과서에 실어주어야 한데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들이 쫒아와 하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이 교정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린 마음에 천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다. 비록 잎을 다 떨어뜨리고 있기는 하나, 천년 세월을 살아 온 은행나무답게 당당하다.

 

성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징

 

고려 성종 때 이곳의 성주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성내에 연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청당(淸塘)'이라는 못을 파고 그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들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 현재 청안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라는 것이다.

 

괴산군은 고려 성종 14년인 995년 지방제도 정비 후에, 충주, 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中原道)에 속했다. 이후 현종 때 괴산지역은 충주목의 속군인 괴주군과 청주목의 속현인 청천현, 청안현, 청당현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이 청당현이 연못이 있는 이 지역을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은행나무는,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다고 한다. 더욱 학교 교정 안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아이들에게도 큰 자랑거리이다.

 

귀 달린 흰 뱀이 사는 은행나무

 

청안 읍내리 은행나무 속에는 귀 달린 흰 뱀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를 해하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나무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무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수술을 한 자욱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는 밑동서부터 잔 가지들이 무수히 솟아나 있다. 그리고 중간에도 잔가지들이 솟아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고려 성종 때 이 나무를 심은 성주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저 나무가 성주라면, 그 숱하게 자라나고 있는 가지들은 백성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천년 넘은 세월을 그렇게 마을 주민들에게 상징처럼 살아온 은행나무. 2월 찬 날에 아직 밑에는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있지만, 그 자태만큼이나 당당하다. 앞으로 또 천년을 저리 살아간다면, 그 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잎이 무성한 날,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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