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일부터 수원컨벤션센터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전시

 

맥간공예작가 이수진. 그녀를 보면 저 조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대단한 작품이 창출될까?’라고 생각한다. 몇 번인가 전시회도 찾아보고 작업을 하는 공방을 방문한 적도 있지만, 늘 고민하면서 작품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든다. 103일 카톡으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1022일부터 일주일 간 수원컨벤션센터 아트스페이스 광교에서 彩雨(채우) - 색깔 있는 비전을 연다는 내용이다.

 

마침 오전에 시간이 나기에 작가를 만나보았다. 언제나 보아도 기분좋게 만드는 웃음을 띤다. 이번에 전시가 벌써 몇 번째인지. 여러 곳에서 회원전 등을 열 때마다 찾아가 관람을 했지만 순전히 자신의 작품만으로 전시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이번에 전시를 열 수원컨벤션센터 아트스페이스 광교 전시실은 넓어서 작품준비도 소품을 합해 60점 정도 필요할 것 같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작가의 열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시회 전에 전시작품을 완성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번 전시에 대해 물으니 그동안 저도 작품을 만들 때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보리대만 갖고 작품을 했는데 이제는 보릿대를 전통적인 염색기법으로 채색을 해서 작품을 만들어요. 그래서 전시명칭도 彩雨(채우) - 색깔 있는 비라고 붙였고요

 

 

보리줄기를 이용해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맥간공예

 

맥간공예란 자연 고유의 소재인 맥간(麥稈·보리줄기)을 이용해, 모자이크 기법과 목칠공예기법을 도입해 만드는 독특한 예술장르이다. 맥간공예를 처음으로 시작한 곳은 수원이다. 맥간공예를 우연히 전수받은 이수진 작가는 독창적인 자신만의 기법으로 맥간공예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사람들은 언뜻 이 맥간공예 기법을 이용한 금박공예를 나전칠기로 착각하기도 한다. 맥간공예는 보릿대를 평평하게 펴서 이를 모자이크 방식으로 붙인 뒤 목칠공예로 마무리기 때문에 그 공정과정은 더 섬세함을 요구하고 있으며, 수많은 손질을 해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섬세한 작업을 해야 하는 맥간공예. 이수진 작가는 벌써 27년 째 맥간공예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는 삼성전자를 다니면서 동아리 활동으로 처음 맥간공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벌써 27년 째 맥간공예 작품을 만들고 있는 작가는 처음에는 단순한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했으나, 배우기 시작한지 2년이 지나 다니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어렵고 힘든 전문 맥간아트 작가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청춘을 보릿대와 함께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동안 보아오던 작품이 채색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해

 

지난 27년간을 꼬박 보리아트에 빠져 살았습니다, 마치 내 인생에 다른 것은 전혀 없는 듯 말이죠. 오로지 이 길만이 내 인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주 재료인 보릿대와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품들을 만들어 내기위해 애썼던 지난세월, 하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오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인 듯합니다

 

이수진 작가는 그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창의성과 독창성에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작가는 맥간공예가 단순히 모자이크 기법으로 보릿대를 오려붙이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작업의 틀을 까자고 생각한 이수진 작가는 보리아트의 배경이 되는 판이나 프레임에 색을 입혀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리줄기라는 독창적인 재료가 오브제로 회화작품서 사용되었을 때 그 가치가 얼마나 극대화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수진 작가는 시각예술 재료로서 보리줄기가 ‘, ’패턴‘, ’디자인등으로 활용된 작품을 유형별로 분류해, 향후 전통공예가 아닌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산130-1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석산리마애여래좌상(石山里磨崖如來坐像)’ 이 마애불은 이번이 두 번째 답사이다. 첫 번째는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일몰 시간이 다 되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이 마애불은 적성면의 선돌마을을 지나, 도왕마을 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와서인가, 늘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이곳을 택해 답사 길을 잡았다. 6월 18일 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오늘도 어지간히 날이 찔 모양이다. 마애불이 500m 전방에 있다는 곳부터 걸어야 한다. 마애불로 인해 500m의 아픔이 있는 나이다. 예전에 500m 산 중턱에 마애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올랐다가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나서이다.


산길을 접어드니 마음만 바빠 오고

마애불은 대개가 깊은 산중에 있다. 요즈음은 교통이 좋아 차가 들어가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마애불은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석산리마애여래좌상도 산을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의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아무리 숲길이라고 해도 30도를 넘는 기온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목이 탄다. 그런데 물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참고 오르는 수밖에. 누군가 나무계단을 놓았다.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오르다보니, 불과 얼마 오르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이 난다. 그리고 가파른 암벽 위로 길이 나 있다. 쌓인 낙엽에 미끄러져 한 발만 실수를 해도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하다.



조심조심 바위를 지나고 보니 좌측으로 누군가 이곳에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돌 축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산죽이 자라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모기는 땀 냄새를 맡았는지 어지간히 달라붙는다. 산죽덤불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바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

바위는 약 2.5m 정도가 되는 듯하다. 몇 덩이로 나뉜 바위를 바라보니 좌측에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은 오른쪽 대좌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직으로 선 평평한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 불신, 대좌 등을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를 덮고 있어, 그 오랜 시간을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이다.



석산리 마애불의 머리 부분은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민머리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묘사하였다. 얼굴은 큼지막하게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큼직한 코와 두툼한 입술 등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입술은 가장자리는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왜 채색을 한 것일까?

삼도는 목이 짧아 몸의 상단에 걸쳐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얼굴에 비하여 유난히 작게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는 편이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왼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걸친 우견편단식 옷차림이다. 법의 자락은 배 부근에서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로 가는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대좌는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신광 안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광배의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선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두 번째 찾아가 만난 순창 석산리마애여래좌상.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얼굴 표현, 그리고 평행밀집형의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의 불신에는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상 조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마애불을 조성하고 채색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합장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말한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마애불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시원한 산바람이 산죽 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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