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후줄근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정 반대다. 비만 오면 짐을 싸서 길을 나선다. 버릇치고는 참 희한한 버릇이다.

 

좋은 날은 방에 들어앉아 자료 정리를 하다가, 비만 오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는 이유. 이런 나를 보고 비만 오면 살짝 이상해지느냐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좋은 날 두고,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 돌아다니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 모악산 용각부도를 보라

 

모악산에는 천년고찰 대원사가 있다. 대원사는 진묵스님이 술을 보고 '곡차'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절이다. 모악산 중턱에 있는 대원사는 금산사의 말사다. 금산사는 모악산 북쪽 김제에 있는데 비해, 대원사는 모악산의 남쪽 완주군 구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진달래 화전축제>로 더 유명해진 절이다. 이 대원사 향적당 뒤편 산에는 부도 몇 기가 자리하고 있다.

 

 

평상시의 용각부도

 

그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부도가 한 기 있다. 용이 부도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예사 부도 같지가 않다. 고려 때의 부도로 추정하는 이 용각부도는 정확한 조성 시기는 모르지만,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용은 이 부도를 감고 있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있는 이 용은, 금방이라도 부도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비가 오는 날 승천하는 부도의 용

 

그런데 이 부도의 용 문양이 날이 좋은 날은 확실치가 않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이 발로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비가 오는 날 이 부도를 보면 전혀 다르다. 비늘 하나하나가 모두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용은 금방 승천을 할 듯한 기세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 되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달려 나가게 된다. 그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비가오는 날 용각부도

 

이 용각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섬세하게 조각을 한 용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나 보인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 힘차게 비상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하다. 용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고승의 부도로 보이는 이 용각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용각부도의 문양이 드러나 듯,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국보 진전사지탑도 비가 오면 부처님이 일어나신다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서는 까닭은 맑은 날 선명하게 볼 수 없던 탑이나 마애불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고 한다. 아무리 선명한 조각을 볼 수 있다고 비가 오는데 길을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더 섬세한 모습을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비도 어쩌지를 못한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신라시대의 절이었던 진전사지가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조성을 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그 조각 하나하나가 뛰어난 작품이다. 통일신라의 탑 중에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각 면에 한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하단에는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기단부 상단에는 팔부중상이 역동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높이가 5m인 이 탑은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돌을 이용한 조성한 신라시대의 탑. 그 조각 하나하나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만나면 돌을 박차고 뛰어 나올 것만 같다.

 

비가 오면 난 짐을 싼다. 그리로 문화재를 찾아 떠난다. 오늘 비가 오려나? 하늘에 가득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제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를 잘한 짐을 싸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 꼭 보아야 할 마애불이 있어서이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 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부도이기 보다는 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부도가 탑형이나 석종형 등으로 나타나는데 비해, 이 진전사지 부도는 아래에 탑처럼 이중의 기단부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부도를 놀려놓았다. 현재는 탑 옆에 진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진전사지 부도는 조성시기를 9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데, 신라 선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부도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몇 번이고 찾아간 부도탑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이 새롭다. 아마 이 부도의 생김이 여느 부도와 같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물 제439호 양양 진전사지 부도

진전사지 부도 기단부는 탑

이 진전사지 부도의 기단은 이중으로 조성을 하였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짜 4매를 붙여 놓았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어 석탑과 같은 형태이다. 갑석 역시 4매로 짜놓았다. 상층기단 중석은 2매로 조성을 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를 표현하였다. 갑석의 아랫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과 같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단부는 지금도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틈이 벌어졌을 뿐이다. 그만큼 진전사지 부도는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보인 진전사지 3층 석탑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당시에 이 진전사가 어느 정도 세를 갖고 있었는지 가늠이 된다.



앙련을 새긴 뛰어난 부도의 받침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탑신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탑신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다만 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이 굄돌에는 16연의 앙련이 돌려져 있어 뛰어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옥개석 역시 8각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처마가 날렵하게 표현이 되어 자칫 무거운 부도를 무게를 탈피하게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탑과 부도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진전사지 부도. 뛰어난 조각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부도를 특색 있게 꾸며놓았다. 탑 위에 올린 부도,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옥개석 등의 반전이 부도를 보는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옛 선인들의 놀라운 조형술

이 진전사지 부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절제된 미를 갖고 있으며, 그렇다고 밋밋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부도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탑과 부도를 합한 특색 있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이런 부도를 조성을 했다는 것에 대해, 옛 선인들의 뛰어난 조각술에 감탄을 한다.



부도탑을 돌아보는데 절에서 키우는 백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쫒아온다. 절에서 키우는 대개의 개들은 사람들에게 길이 들어 있는가보다. 낯선 사람이 와도 짖지를 읺고, 오히려 함께 놀아달라고 조르기가 일쑤다. 이 개도 부도탑 주위를 돌면서 영역표시라도 하는 듯 떠나지를 않는다. 무료한 문화재 답사에서 가끔은 이런 풍경이 있어,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지 부도.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떠나는 길에, 절집 백구가 배웅을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