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 이 집에 거주하는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은 18세에 내림을 받은 후 이곳에서 45년을 거주하고 있다.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 년에 봄·가을 두 차례씩 맞이굿을 올리고 있다. 힘들어도 봄 가을에 열리는 맞이굿은 거르지 않는다.

 

맞이굿이란 무격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무속신들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양부리들의 안녕을 위해 행해지는 가장 큰 굿판이다. 흔히 맞이굿을 진적굿이라고도 한다. 맞이굿이라 부르는 것은 굿거리 제차 중에서 천궁맞이라고 하여 모든 신령들을 굿판으로 청배하기 때문에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를 진적굿이라 하는 것은 맞이굿을 하는 날은 일반적인 굿보다 더 많은 제물을 진설하고 굿거리 제차 중에서 무격이 용사슬이라고 하여 물동이 위에 오르거나. 각종 제물을 이용해 사슬세우기를 하는데 이는 신령에게 온전히 받친다고 하여 진적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즉 모든 것을 신에게 받친다는 뜻이다.

 

 

110년을 가게로 전승된 경기안택굿

 

흔히 우리는 한양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에 많은 무격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고려 때는 도성 밖으로 50회나 무격들을 축줄했으며, 조선조 때도 무격들을 한양 성밖으로 내보냈다. 이들이 한양에서 쫓겨나면 만신들은 노량진인근 한강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노들만신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결국 한양굿이란 용어는 근대에 들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하며, 이들이 도성에서 축줄당해 주로 자리를 잡은 곳이 경기도 수원을 비롯해, 화성, 오산, 안성, 시흥, 안산, 이천 등지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가계를 형성해 자신의 굿을 전승시켰기 때문에 경기도 일대의 굿은 나름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왔다.

 

이중 고성주 명인은 유일하게 강신무이면서도 가계(家系)로 굿이 전승된 특별한 경우이다. 고성주 명인은 할머니를 거쳐 고모, 그리고 고모의 신딸인 최영옥 만신- 고성주로 이어지는 110년의 세월을 집안으로 경기도 전통굿이 전승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일 년에 두 차례씩 맞이굿을 열고 있는 것도 가계로 전해진 굿의 법제를 지켜가야 하기 때문이다.

 

 

질펀한 안택굿판, 모든 사람이 즐기는 축제

 

고성주 명인의 경기안택굿은 남다르다. 굿을 열린 축제라고 한다. 열린 축제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굿판이 바로 고성주 명인의 맞이굿판이다. 맞이굿을 열기 1주일 전부터 각종 기물을 정비하고 닦는다. 그리고 굿에 필요한 제물을 직접 집에서 준비한다. 맞이굿에 모이는 수백 명의 인원이 먹을 음식도 집에서 일일이 준비한다.

 

고성주 명인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을 지켜가고 있는 무격이다. 판이란 무격과 수양부리들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말한다. 즉 무격이 부모가 되고 수양부리들은 자식이 되는 정신적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신도들은 나이가 고성주 명인보다 더 많아도 모두가 아버님이라고 고성주 명인을 호칭하고, 고성주 명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양부리들에게도 아들이나 며느리라고 부른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수양부리들은 대개 할머니 - 고모 - 신어머니 때부터 전해지는 대물린 신도들이다.

 

 

3일 오전부터 시작된 ‘2019 경기안택굿 가을맞이’. 열린축제답게 꼭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굿판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와도 먹을 것을 한상 차려준디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굿판에 참여하면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복과 굿에서 사용한 제물을 나누어준다.

 

그리고 굿판 내내 먹을 것을 차린다. 더 달라고 해서 노여워하지 않는다. “집에 오는 이는 무조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고성주 명인의 철학이다. 하루 종일 굿이 열리고 중간에는 소리꾼과 춤꾼도 한 몫 거든다. 그야말로 종합적인 축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막판에는 모두가 전복을 입고 한바탕 뛰어논다. 이집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누구나 찾아와 먹고, 마시고 함께 즐기는 열린 축제의 장 경기안택굿. 하루빨리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온전한 전승이 되길 바란다.

 

수원의 명물이 있다. 명물이라고 하니 무슨 상품이나 장소 등을 생각해선 안된다. 그 명물은 바로 사람이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문로 58번길에 거주하는 고성주씨(, 60). 이 사람을 굳이 명물이라고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남자이면서도 여자가 하는 일을 한 가지도 못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여자들보다 더욱 여성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41일 오후. 고성주씨의 집안 마당이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보았더니 열심히 기름에 무엇인다를 튀기고 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약과란다. 집에서 약과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보던 약과와는 다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큰 행사가 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음식을 직접 준비해

 

고성주씨는 신을 모시는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단골들의 안녕을 빌러주는 굿이 있다. 비로 진적굿이다. ‘맞이굿이라고도 하는 이 진적굿은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하는 굿중에 가장 큰 굿이다. 보통 3년에 한차례씩 하지만, 고성주씨는 매년 봄, 가을로 이 굿을 한다. 그만큼 단골들에게 정성을 쏟아 붓는다.

 

이 약과도 그 맞이굿을 하는 날 상에 올릴 음식 중 하나이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하더니 기름을 튀겨내는 것으로 완성이 된다고 한다. 고성주씨는 큰일을 앞에 놓고 늘 이렇게 며칠씩이나 준비를 한다. 이 약과도 아침부터 몇 사람이 준비를 한 것이다.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가 궁금해 하는 방법을 물었다.

 

 

갖은 재료로 만들어 진설해

 

밀가루와 맵쌀가루를 섞어 만드는 약과는 모양새도 특이하다. 파는 것은 동그랗지만 이 집의 약과는 길에 반죽을 자르고 그 가운데에 칼집을 낸다. 그리고 양편을 가 칼집이 난 곳으로 집어넣어 뒤집는다.

 

처음에 내림을 받고나서 바로 이렇게 배웠어요. 10년간은 굿을 할 때 모든 굿거리 제차와 음식을 하는 방법 등을 배웠죠. 참 힘들게 배웠어요. 신을 모시는 사람이 신령께 음식을 올리면서 어떻게 사다가 할 수가 있어요. 하나같이 직접 준비를 해야죠. 그러다가 보니 며칠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요.”

 

 

기름에 약과를 튀겨내면서 하는 말이다. 그 방법은 약과를 만든 밀가루와 멥쌀가루를 섞어놓고 계란노른자. 생강, 기름, 조청, 정종 등을 적합한 비율로 집어넣고 반죽을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방망이로 밀어서 넓게 편 다음 길게 잘라 모양을 만든다는 것이다. 모양이 완성되면 기름에 튀겨낸다.

 

단골들이 다 챙겨간다는 약과

 

기름에 튀긴 것을 다시 조청에 담가 골고루 조청이 속에까지 배어날 수 있도록 놓아둔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뿌려 식히면 완성이 된다는 것. 준비하는 양이 워낙 많다보니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매달려 있다.

 

 

예전에는 색을 입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본 맛이 가시는 것 같아 올해는 색을 입히지 않았어요. 진적이 끝나고 나면 단골네들이 다 싸갖고 가세요. 그래서 많이 준비를 해야 돼요.”라고 한다. 함께 준비를 하고 있던 단골 한 사람은

정말 엄청난 양을 준비해요. 진적굿을 할 때는 단골네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거든요.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 이 날 오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까지도 일일이 다 준비를 하세요. 아마 보통 사람들 같으면 병이 날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손수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아요.”란다.

 

본인을 믿고 따르는 단골들이 잘 살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진적굿. 신령을 제대로 위해야 단골들이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면서 음식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사람이 못하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든다.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550-83에 소재한 애기씨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최남수(, 35). 작은 체구에 귀여움이 가득한 모습이다. 최남수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전수생이다. 10일 오전부터 시작한 맞이굿혹은 진적굿은 신령을 모시는 무속인이 자신들의 단골들을 위해 신령께 기원을 하는 굿이다.

 

굿은 먼저 최남수의 스승이기도 한 승경숙(, 58)씨가 앉은부정으로 굿판을 열었다. 앉은부정이란 부정무가를 불러 굿판을 정화시키고,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부정한 것을 물리쳐 굿이 더 신성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굿판에서는 한상 제일 먼저 부정으로 시작을 하는 것고, 모든 나쁜 기운을 가시게 하기 위함이다.

 

 

천궁맞이로 최남수의 굿이 시작하다.

 

이날 진적굿을 연 최남수는 이제 내림을 받은 지 고작 4년 정도가 되었다. 대개 맞이굿은 굿을 하는 당주인 무속인과, 함께 굿을 이끌어갈 초대된 무속인들이 함께 진행을 한다. 처음에 천궁맞이라고 하여서 집 밖에 천궁상을 차려놓고 그 곳에서 당주인 최남수가 시작을 한다. 이때는 용사슬이라고 하여서 동이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서 도약을 한다.

 

용사슬을 직접 본인이 사는 이유는, 자신 스스로기 제물이 되어 신령들께 많은 재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뜻이다. 더불어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온전하게 신령의 뜻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용사슬을 마친 최남수는 굿판 안으로 들어가 차레대로 신복을 갈아입으면서 굿을 진행한다.

 

 

오후 6시까지 9시간 정도 계속 된 이날 진적굿을 화보로 감상해 본다.

 

 

9일 오전부터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 60)씨의 집 앞에는 화환이 즐비하게 놓였다. 그리고 연신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 날은 매년 음력 3월과 107일에 행하는 진적굿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부르며, 단골이 자신을 따르는 수양 부리들을 위해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다. 봄에는 꽃맞이, 가을에는 단풍맞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진적굿이 계절에 따라 그만큼 큰굿이기 때문이다.

 

굿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무격들에게 있어서는 이 진적굿이 가장 장엄하고 큰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 보존회 고성주 회장의 전안(신령을 모셔놓은 신당)은 우리나라의 무격들의 집 가운데서도 가장 넓다고 한다. 그만큼 신령들을 위한 곳을 하기 위해 차려놓은 재물도 만만치가 않다. 진적굿을 올리기 며칠 전부터 직접 다식과 약과들을 직접 만든다.

 

 

널려놓은 굿 상만도 몇 개

 

신령들의 화분을 걸어놓은 앞에 상을 진설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산거리 상, 제석상, 천궁맞이 상과 뒷전 상까지 차려놓았다. 고성주 회장은 경기도의 전통 안택굿을 지켜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고 있다. 진적굿을 할 때마다 이 집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4대를 이어오면서 경기도의 굿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숱한 신문기사와 방송 등에 출연을 했지만, 정작 아직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고성주 회장의 굿을 아는 학자들은 늘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이제 4대째 집안으로 대물림을 한 경기도의 전통 안택굿이, 고회장이 제대로 전수를 시킬 수가 없으면 그 대가 끊어지질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문전 앞 지신밟기로 굿을 시작해

 

과거 경기도에서는 안택굿을 하기 전에 풍물패들이 문 앞에서 한바탕 마당굿을 펼쳤다. 이는 사람들에게 굿을 한다는 것을 알리는 효과도 있지만, 그보다는 풍물을 울려 신령들에게 감응을 해주십사 하는 의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문 앞에서 풍물을 치던 일행은 마당 안으로 들어가 천궁맞이 상 앞에서 한바탕 울리고 난 뒤 절을 하고 물러선다.

 

전안에서는 무녀 임영복(, 54)의 앉은부정이 시작되었다. 앉은부정은 무녀가 장구를 치면서 집안의 모든 부정과 사람들의 부정을 풀어내는 부정풀이 무가를 구송한다. 그리고 중간에 굿상의 부정을 가시기 위해 향물과 고춧가루를 푼물로 둘러낸다. 뒤이어 소지에 불을 붙여 굿상을 한 바퀴 들러내는데, 이는 모두 부정을 가시게 하는 의식이다.

 

 

고성주 회장의 굿을 보고 있노라면, 그 누구도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재주면 재주, 춤이면 춤, 소리면 소리, 그 어느 것 하나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18세에 내림을 받고 벌써 43년이라는 세월을 굿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경기도의 전통굿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굿은 축제이다. 특히 경기도의 굿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이다. 굿판에는 악사 4명과 무녀 5명이 동참을 했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모여 굿판을 함께 즐긴다. 안택굿이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기 위한 굿이기 때문이다. 굿을 열린축제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모두가 빈부의 구별이나 노소의 구별이 없이 함께 웃고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고성주의 질펀한 대감굿

 

바깥마당에서 하는 천궁맞이는 모든 신령들을 굿판으로 청하는 굿거리이다. 이때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의 옷을 차례로 입어가면서 축원을 한다. 대신할머니 거리에서는 자신의 점상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점을 보아주기도 한다. 이래저래 굿이 재미있어 진다. 이 집의 수양 부리들이 대물림 신도가 되는 것도, 이렇게 지극히 정성을 다해 봄가을로 진적굿을 열기 때문이다. 남들이 1년에 한 번 하는 것도 버거워 하기 때문이다.

 

안마당에서 천궁맞이를 마치고 난 다음, 진적굿을 하는 중간에 고성주의 문하생들이 추는 재인청 춤도 함께 곁들여졌다. 고성주 회장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재인청 춤을 어릴 적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 춤 역시 굿판에서 꼭 함께 무대를 만들어주고는 한다.

 

 

고성주 회장의 진적굿의 백미는 대감거리이다. 대감거리를 할 때는 신도들에게 술잔을 나누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각 신도들마다 대감시루를 받아간다. 진적굿을 하는 날이 되면 이른 새벽부터 각 신도들의 몸주대감(각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지키는 몸주가 있다고 한다)의 시루를 직접 찐다.

 

시루는 많은 때는 100여 개가 넘는다. 그리고 이 신도들은 모두 대감쾌자를 한 벌씩 준비를 해놓았다. 고성주 회장은 그 쾌자를 한 번씩 입어가면서 대감시루를 머리에 이고 놀린다. 그리도 그 시루를 신도들에게 모두 나누어준다. 신도들은 그 시루를 신주 모시듯 하는 것도, 자신의 몸주대감 시루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택굿을 지키고, 수양 부리들의 안녕을 위해 일 년에 봄가을로 두 차례씩 열리고 있는 고성주의 진적굿. 그 굿을 보고 있노라면 장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굿을 할 수 있을까? 굿판에 동참해 함께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장엄함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장엄함은 고성주 회장만이 할 수 있는 굿이었다.

9월 24일(월) 낮, 화령전 앞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피리를 불고, 장구와 제금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화령전 솟을삼문 앞 길 건너편 2층집 ‘용궁아씨당’이라는 간판을 건 무속인의 집에서 울리는 소리다. 굿판이 벌어졌다. 한 때 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내가 아니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들었다. 진적굿이 막 시작되었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하는데, 신을 모신 기자(祈子)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여 벌이는 잔치판이다. 봄에 하면 ‘꽃맞이 굿’이라고 하고, 가을에 하면 ‘단풍맞이 굿’이라고도 부른다.

 

 

 

유독 수원에 무속인이 많은 까닭은?

 

수원에는 유난히 신을 모신 무녀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렇게 수원에 무녀들이 많은 것은, 역사의 한 단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조선조 때는 유생들로 인해, 도성 안에 있는 많은 무녀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고는 했다. 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무녀(巫女)들은 노량진을 건너야 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던 악사 등 남자들은 뚝섬을 건너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노들만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한강을 건너 노들로 모여 든 도성의 만신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을 터. 이들은 몰려든 곳은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드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기에 이들은 화성 축성을 위해 수많은 노역자들이 몰리는 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마친 후에는 수원에는 장안문 밖인 영화역 인근과, 팔달문 앞에 커다란 장시가 형성이 된 것을 알고 수원 화성 인근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 매향동을 비롯하여, 지동, 매교동, 남수동 등 화성의 안과 밖에 이렇게 무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원에 큰만신들이 대거 포진한 것도, 이렇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과 장시는 함께 역사의 길을 걸었던 것.

 

“정조대왕 수위에서 놀구나가오”

 

“해동은 대한 국 수원이라 대목 안에 팔달산 내린 줄기 이 터전에 들었으니, 오늘 애동제자 단풍맞이 이 마전에 정조대왕 수위에서 정성 덕 입사와....”

 

스승인 승경숙 선생(여, 58세)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 용궁아씨 정현옥(여, 43세)이 천궁맞이 굿 상 앞에서 소리를 한다. 이렇게 신령을 위한 진적굿은 일 년에 한 번 , 혹은 3년에 한 번씩 하게 되는 굿이다. 또한 이 진적굿은 무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정성을 드려 제물을 차리고,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써서 펼치는 굿판이다.

 

 

 

 

우리는 흔히 ‘굿은 굿(Good)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굿판은 열린 축제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올 수가 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보낸다. 굿판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많다는 것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이런 굿판은 많은 것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나누고 복도 나눈다. 나누어 주는 문화, 그것이 바로 굿문화이다.

 

그런 굿판이 요즈음은 자꾸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밤새 즐기던 굿은, 이제는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고가 들어간다. 한 낮에도 조금만 시끄러우면 신고를 해댄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던 한 마당인 굿이, 자꾸만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유이다.

 

그 선생에 그 제자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용궁아씨 정현옥을 만났다. 내린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물었더니, 이제 4년이란다. 4년 밖에 안 된 애동(내린지 얼마 되지 않는 무녀들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이 천궁맞이 한 석을 이렇게 걸판지게 해 낼 수 있다니, 그도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스승 승경숙을 말한다. 승경숙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이수자이다)에게서 제대로 학습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제나 정말 열심히 학습을 시키시기 때문에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속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굿은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다. 내림을 받았다고 해서 굿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굿은 선대의 무녀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굿을 배울 때는 상 차리는 법, 옷 입는 법, 지화 만드는 법 등 많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을 다 배우려면 적어도 10년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정현옥은 그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내리고 난 뒤 올해 세 번째 맞이굿인가 보네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작게나마 신령님들을 위하는 굿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처음에 신병이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웠죠. 재물은 재물대로 손해를 보고,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요. 눈만 감으면 환청이 들리고,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고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내림을 받지 않고 있으니, 동생들과 내가 교대로 신병을 앓았고요. 할 수 없이 제가 내림을 받았습니다.”

 

무녀들이 신병을 앓을 때는 대개 세 가지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정신적인 것이다. 남들은 듣고 볼 수 없는 것을 본인은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아도 아무런 증세가 없다. 다음은 물질적인 신병이다. 재산이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사고가 나거나 해서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병은 육체적인 신병이다. 대개는 중병에 걸리는데도 이들은 죽지를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내림을 거부하면 가장 무섭다는 ‘인다리( =人橋)’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사람씩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무녀 중에서는 가족 5명을 보내고 난 뒤, 내림을 받은 사람도 있다.

 

“힘든 것은 말도 못하죠.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제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어쩌겠어요. 지금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골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죠. 학습에도 더 열심을 내야 하고요”

 

긴 시간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많은 제차를 다 하려면 시간이 바쁘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걸어야만 하는 무녀의 길. 이제 이들이 하는 굿 행위도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서 창출된 문화로 인정을 해야만 한다. 굿은 총체적인 예술이다. 흔히 악가무희(樂歌舞戱)가 그 안에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굿은 우리 전통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제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하기에 ‘신들린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는, 우리의 한 문화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설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얼마 뒤 더 많은 재주를 배운 정현옥의 굿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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