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총림 백양사는 1,400여 년 전 백제 때 지어진 고찰이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에 자리하고 있는 백양사는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백양사의 경내에는 쌍계루가 있고, 그 앞에 물을 막아 연못처럼 조성을 하였다. 이 연못가에는 하얗게 탐스런 꽃을 피운 이팝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팝나무는 5월경에 꽃을 하얗게 피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쌀밥을 소담스럽게 담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서 이팝나무라고 부른다. 이팝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서식을 하며 병충해에 강하고 높이는 20m 정도에 달하며, 우리나라에는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 진해 평지리의 이팝나무, 김해 주촌면의 이팝나무,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 양산 신전리의 이팝나무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각진국사가 꽂은 지팡이가 변하다

 

각진국사는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에 태어나 공민왕 4년인 1355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고성이고 성은 이씨이며 호는 무능수라 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왕명을 받아 비문을 지은 이달충은  「각진스님은 사람됨이 맑고 순박하며, 단아한 것이 평화스럽다. 그 마음은 곧고 깨끗하며 정성스러웠다. 멀리서 바라보면 깨끗하기가 신선과 같고, 가까이 나아가면 온화하기가 부모와 같았다. 이는 그 생김새가 이마는 푸르고 눈썹은 반백이고, 입술은 붉고 이는 희기 때문이다. 입으로 말을 하면 남의 선악을 구별치 아니하고, 마음으로는 공경함을 지니고 있었다. 평생을 방장으로 지냈으나 단 한 개의 재물도 갖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각진스님은 10세 때에 조계산의 천영스님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스승인 천영이 입적하자, 수선사 제12세 자각국사인 도영을 좇아 공부하였다. 고려 충정왕의 왕사가 되어 '각엄존자'라는 호를 받았고, 공민왕 1년인 1352년에는 공민왕으로 부터 왕사의 책을 받았다. 영광군 불갑사에 머무르다가 1355년 백양사로 거처를 옮겼다. 백양사로 거처를 옮긴 1355년 7월 27일에 입적하였다.

 

5월 경이 되면 하얗게 꽃을 피운다.

꽃이 피면 마치 쌀밥을 수북히 다아 놓은 듯 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각진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은 1355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팡이가 살아나 이팝나무로 변해 살아난 것은 벌써 655년이나 된다. 이 지팡이가 당시에 바로 자란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꽃을 피웠는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각진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변했다고 하니 그 햇수가 오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난히 많은 지팡이 설화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은 지팡이에 대한 설화가 전한다. 수령이 1,100년이 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마의태자가 심었다고도 하고, 의상대의 지팡이가 변해 자랐다고도 한다. 여주 남한강 가의 벽절 신륵사에도 수령이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고려 말의 혜근 나옹스님이 꽂아놓은 지팡이라고 한다. 또한 정암사 적멸보궁 앞에 있는 주목은 자장율사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쌍계루에서 본 이팝나무. 설화에 의하면 수령이 650년이 지났다

 

이렇듯 전국에 나타나고 있는 지팡이 설화는 어쩌면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법력이 있었음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하얗게 꽃을 피운 백양사의 이팝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그 나무와 연못, 그리고 쌍계루가 정말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만일 쌍계루가 없었다고 해도, 이러한 설화가 생겨났을까? 쌍계루 위에 올라 바라다보는 이팝나무에는 그보다 더한 설화 하나쯤 더 전할 것만 같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계리 은행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을엔 주변이 온통 노랑색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이 나무를 즐겨 찾는 이유는 땅위로 솟아나온 나무의 뿌리 때문이다. 밑동을 둘러 쌓고 있는 돌출된 뿌리들을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하다.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용 몇 마리가 서로 은행나무를 차지하려고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뭇잎이 무성할 때가 되면 모든 일을 마다하고 반계리로 달려간다.

 

 

 

어깨를 펴고 하는 자랑. “나 천연기념물이야”

 

멀리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가 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 위용이야 어디로 갈까? 나무 밑으로 들어가 위를 쳐다보니, 세상에 정말 아름답다. 나무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하나가 된 은행잎들이 몽환적이다. 그 너머 아직도 초록빛을 띤 은행잎들도 함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밑에서 올려다 본 은행나무. '아~' 하고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직은 노랑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햇볕사이로 보이는 초록색의 조화가 만들어진 멋진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이곳을 지나 가던 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 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랜 성상의 흔적, 나무 혹

 

이 반계리 은행나무를 살펴보면 여기저기 혹 같은 것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만큼 오랜 성상을 살아왔다는 징표인가 보다. 나무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전하는 전설마저 신비하다. 그래도 아직 생육상태가 좋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가을 단풍이 들 때쯤 찾아간다면, 정말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되면 사진깨나 찍는다는 분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두 모여 든다. 시간을 내어 달려올 수 있도록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한 그루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그냥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아무 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는 것이 아니여."

눈을 감은 맹인이 산통 대신 손에 대추알을 잡고 흔든다. 점을 보아준다는 것이다. 굿판에 아닌 대문간에 앉아 장고잽이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재담이 일품이다. 그것 하나만 갖고도 책 한권은 넉넉히 나올 것만 같다.

“이보 오늘 점이나 한 번 보시려우”
“점은 머 할라고 봐요. 눈도 못 보는 양반이 점인들 잘 볼 수 있겠수”
“이보셔, 내가 이래도 장안에 제일가는 점바치여“
“그걸 누가 안답디까?”


경기도 안택굿의 뒷전은 해학의 극치

경기도 안택굿에서 뒷전은 재담의 극치를 보인다. 뒷전은 굿판에 모여든 각종 잡귀들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굿거리이다. 굿판에는 항상 무속신을 따라 다니는 많은 잡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잡귀들은 신령들을 다 돌려보낸 후에도 굿청에 남아 집안을 소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 뒷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많은 잡귀들을 한바탕 흥겹게 놀고 보내지 않으면 집안에 탈이 난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의 '뒷전거리'는 타 지역의 굿에서는 볼 수 없는 재담과 해학이 넘친다. 무격이 지팡이를 들고 온다. 맹인굿을 하는 광경이다.


과거에는 밤새 굿을 하고나면 뒷전무당이 아침에 장고재이를 데리고 굿판에 나타난다. 뒷전무당은 각 거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뒷전만 맡아하기 때문이다. 이 뒷전무당의 존재는 그 굿판을 좌우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사람들은 일부러 뒷전무당에게 줄 돈을 쓰지 않고 간수를 할 정도였다고 하니, 뒷전 무당의 입담이 얼마나 좋은지 알만하다. 뒷전무당은 굿청이 아닌 대문간에 마련한 뒷전 상 앞에서 굿을 한다. 평복에 지팡이를 들고 하기도 하고, 고작해야 무구라는 것은 부채와 방울을 사용 할뿐이다. 뒷전무당이 맹인 굿을 할 때쯤 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뒷전을 하는 곳으로 몰려든다. 맹인 굿에서 산통 대신 성냥 통을 흔들어대며 주는 점사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담이 뛰어난 안택굿판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안택굿판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가 있고,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점 한 자리 봐 주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뒷전을 하는 무격을 바라보다가 배를 잡는다. 하는 표정과 재담이 어느 코미디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굿판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더하다보니 사람들이 발길을 떼지 못한다.

“나도 점 한 자리 봐 주소”

굿판 구경을 하던 구경꾼이 한 수 거둔다.

“점은 무엇하러 보시려고 하슈. 봐 봤자 뻔한 것을”
“무엇이 뻔하다는 것이요”
‘뻔하잖우. 당신이 남자인데 그걸 제대로 하겠수, 아니면 돈을 잘 벌어다 주겠수. 그저 이것도 저것도 다 부족한데 점괘라고 잘 나오겠수“
“아니 내가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우”
“떡 하면 삼천리라고, 복채도 안내고 점을 보자는 양반인데 먼 재주가 있겠우”


맹인 굿을 하는 고성주씨가 산통 대신 대추를 손에 잡고 흔들며 점을 본다.(위) 맹인 굿을 마치고 난 뒤 끝으로 수비영산을 노는 모습. 수비 영산은 못 먹고 헐벗은 잡귀들이다.


사람들이 ‘맞다’를 연발하면서 웃는다. 점을 보아 다라라는 사람도 떠날 갈 듯 웃어댄다. 그저 재미로 하는 농지꺼리들이다. 이렇게 밤을 새운 굿판이다. 밤새 웃고, 떠들고, 마시고, 소리하고. 그런 굿판을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다. 그래서 굿판을 ‘열린 축제의 장’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뒷전거리’ 하나만 갖고도 예술적인 가치를 보이는 경기도 안택굿판. 언제쯤 다시 볼 수가 있으려는지.

합천 해인사. ‘법보종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으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고 한다.

이 해인사 한편에는 ‘학사대’라는 곳이 있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은거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서에 몰입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경청을 했다고 한다.



학사대에 서 있는 기이한 전나무

이 학사대에는 기이하게 자라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가지를 아래로 내린 듯하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이 전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전설로 미루어보면 이 나무의 수령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인 85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으로 유학을 가, 다시 신라로 돌아온 것이 885년이다. 그 뒤 897년에 효공왕의 ‘사사위표’를 찬술하였고, 효공왕 8년인 904년 무렵에는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다. 908년에는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고 난 후,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이 곳 학사대에 머물렀던 것은 9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고 해도 이 전나무의 수령이 1,100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가지가 아래로 처진 전나무

전나무는 대개가 굵은 한 줄기가 곧바로 자라난다. 하지만 학사대에 있는 전나무는 어느 정도 원 줄기가 위로 오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나무의 높이도 상당하다. 대충 눈대중으로 따져보아도 25m 이상이 될 것만 같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그만큼 이 전나무는 위로 까맣게 솟아 있듯 보인다. 나무줄기가 갈라진 곳에는 풀씨가 떨어져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보듬은 최치원의 마음인가 보다.

그 아래로 가지가 부러져 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부러진 모습이 어느 쪽에서 보면 용머리 같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 보면 늑대의 머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연히 부러진 가지가 남은 모습이지만, 해괴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학사대에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 등이 보인다. 그만큼 이 곳이 원시림이었을 것이다.


그곳 학사대에서 은거를 했던 최치원. 가야금을 벗 삼아 세월을 유유자적하던 최치원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높다랗게 위로 솟은 줄기와 아래로 고개를 떨군 가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싶었던 최치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7월 26일, 해인사에서 만난 학사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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