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드는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바위를 바라보고 좌측에는 크게 부처를 새기고, 우측으로 작은 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찾아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든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중앙에는 부처를 새기고 양 옆에 협시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을 집으로 삼아 사셨다니...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 한 칸마다 좁디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대가 놓여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대선을 위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닮지 못했을 것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집들을 보아왔다. 말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본 적이 없다. 비록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안에는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난리를 치시는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님처럼,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가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단순히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마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전설 속의 실체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평시내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사곡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사곡2리 사청마을이 나온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마을 안 길가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다.

 

 

1456년에 판 사곡리의 우물 '영천(靈泉)'

 

우물에 다가가니 우물 옆 집 벽쪽에 커다랗게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라는 돌로 만든 안내판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니 우물의 깊이는 5.4m인데, 수심이 2.8m 정도 된다는 것이다. 조선 제7대 왕인 세조(1455∼1468)가 조카인 단종(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후 나라에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장삼을 길게 늘어트린 한 노승이 지나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 한 집에 들려 물을 한 그릇 마실 수 없느냐고 청을 넣었다.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이 없으니, 툇마루에서 좀 기다리시면 마실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그릇을 들고 집을 나선 아낙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승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낙네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낙네는 물을 떠 노승에게 건넸다. 노승이 물을 마신 후 늦은 사연을 물으니, 아낙네는 20여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는 것이다.

 

 

 

노승이 잡아 준 우물터, 말세를 예고한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낙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 노승은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쳤다.

 

"허허, 이곳 땅은 층층이 암반이로다. 초목인들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인들이 터를 잘못 잡았도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이 나지 않아 지금도 마을장정들이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이 나는 곳을 알려드리리다. 자, 여기를 어서 파시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솟을 것이고, 여름이면 찬 물을 얻을 것이오. 여기 우물을 파기만 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외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두드려보던 노승이 정해준 곳은 큰 고목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승은 마을을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 우물을 파면 넘치거나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꼭 세 번 넘칠 날이 있을 것이오.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고, 세 번째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는 지체 없이 이 마을을 떠나시오."

 

 

말을 마친 후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목을 베어내고 그곳을 팠는데,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이 넘치면 세상에 말세가 온다는 노승의 말이 있어 주민들은 이 우물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 영천, 벌써 두 번 넘쳐

 

이 사곡리의 우물은 사람이 물에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긷다가 몇 명이 빠졌으나, 그대로 다 물에 떠 있어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우물 옆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장옥분(당시 16세 부인), 연기남(13세, 소녀), 연규인(14세, 소녀), 연경세(11세, 소녀) 등 4명이다. 그러나 1947년 음력 2월 경 우물 하부 석축이 우그러들어 재공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려서 명샘에 고사도 못 올리고 지내던 중, 연규성씨 딸 10세 소녀가 물을 긷다가 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용왕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경악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가호호 촛불을 밝히고 무녀를 들여 굿을 하였다.

 

이러한 우물이 벌써 두 번이 넘쳤다고 한다. 이제 한 번 더 넘치게 되면 말세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넘치던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고 한다.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러간 한 아낙이 우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마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문은 인근에도 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던 며칠 후, 왜병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노승의 말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쳤다.

 

 

두 번째로 우물이 넘친 것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때의 일이다. 그 후 6·25 때는 우물이 지면 1m 내·외로 불어나 전쟁발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우물을 시멘트로 바꿔 간이 상수도로 사용했으나, 마을에 액운이 잦아 원상복구를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에는 2 ∼ 3일간 우물이 불어났다 줄었다 하기도 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물을 퍼내 청소를 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세를 알려주는 우물, 벌써 500년 가까이 마을사람들이 '영천'이라고 생각하는 이 우물은 이제 두 번이 넘쳐나고, 마지막 한 번이 남았다고 한다. 우물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에도 어르신 한 분은 곁에서 떠나시지 않는다. 행여 우물에 나쁜 짓이라도 할까보아 걱정이신지. 우물을 뒤로하면서 속으로 기원을 한다. 세 번째로 넘쳐나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증평읍에서 청원군 초정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남하2리 둔덕마을이나 조금 더 지나 남하1리 솔모루 마을에서 미륵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이곳은 증평에서 유명한 두레마을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며, 매년 두레에 관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 133 - 5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세구의 석불입상이 서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인 석조미륵보살입상

 

이 중에서 가장 큰 석불입상은 미륵보살입상으로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작은 석불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을 미륵당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구의 석불은 모두 마을 쪽을 바라보고 서 있으며, 석불입상을 바라보고 왼쪽에는 미륵보살입상이 서 있고, 중간과 좌측에는 작은 석불입상이 두 기가 서 있다.

 

 

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랫부분은 아직도 땅 밑에 파묻혀 있어서 정확한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땅 위로 솟은 부분은 3,5m 정도로 석불입상치고는 큰 편에 속한다. 이 석불입상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다. 충청지역에서 보이는 거대석불의 일종으로 보인다.

 

팔찌를 끼고 있는 특별한 석불입상

 

이 미륵보살입상은 얼굴 전체에 가득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이 되어 있다. 이 미륵입상은 양쪽의 팔목에 팔찌를 끼고 있어 특이하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펴 배위에 붙이고, 왼손은 연꽃을 들고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팔로 흘러내림 표현을 했고, 배 아래에는 활모양의 주름이 조각되어 있다.

 

 

법의나 기타 여러 가지 모습의 형태로 보아 10세기인 고려 초기에 조성한 석불로 보인다. 아마 이곳에 있었던 절터에 모셔 놓았던 석조보살입상으로 보이는데, 눈과 코 입 등이 아직도 원형보존이 잘 되어 있어, 선명하게 얼굴 표현을 알 수 있다. 안면에 비해서는 어깨 폭이 좁은 편인 이 석조보살입상은 전체적으로 보아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부처님도 양약수술 하셨나요?

 

석조보살입상을 바라보면서 그 우측으로는 두 기의 석불이 서 있다. 높이는 각각 1.3~1.5m의 석불들로, 이 석불입상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두 기의 석불이 제작연대가 다르고, 그 위치도 이곳에서 조성된 것은 아닌 듯하다. 아마 딴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듯한데, 그 원래의 자리를 알 수가 없다.

 

 

 

 

이 두기의 작은 석불은 한 마디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맨 우측에 있는 석불의 얼굴은 시멘트로 얼굴과 팔을 발라놓았다. 얼굴은 눈과 코, 입을 조성했는데 우스꽝스럽다. 팔도 시멘트로 발라 놓았는데, 그 역시 조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

 

시멘트 칠이 오히려 원형을 훼손해

 

중앙에 있는 작은 석불은 안면과 목 부위를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얼굴의 안면이 훼손이 된 것을 보수를 한 것인 듯도 하다. 그런데 눈을 너무 밑으로 처지게 그려 놓은 모습이, 자칫 원형을 훼손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는 주먹코로 갖다가 붙이고 입 역시 조그맣게 선을 그어놓았다.

 

 

 

 

증평읍 남하리 두레마을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존입상들. 작은 두 기의 석불은 언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 모르지만, 자칫 보수를 한다고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더 훼손을 시킨 결과가 되었다. 함께 답사를 한 분이 하는 이야기. "부처님이 언제 저렇게 성형을 하셨는지. 돌팔이 의사가 마구잡이도 고치셨네."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만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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