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물레방아라고 하면, 무엇인가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대목쯤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레방아는 우리의 재래농기구 중 탈곡이나 정미 또는 제분 등에 이용되었던 도구이다. 물레방아는 돌확이나 맷돌, 절구,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과 함께 사용이 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늦게 생겼다고 본다. 또한 물레방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마을을 흐르는 하천 등의 옆에 자리하게 된다.

 

물레방아는 바퀴를 가로지르는 방아굴대 양쪽에 있는 눌림대가, 바퀴가 물의 힘으로 돌아갈 때 살개목을 눌러 방아공이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 찧는 것이다. 대개 물레방아의 양편에 방아공이를 연결하기 때문에, 두 개의 방아공이가 번갈아가면서 방아를 찧게 된다.

 

 

너와로 꾸민 신리 물레방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3호인 신리 너와집이 있다. 이 집을 찾아 들어가다가 오른쪽에 길 밑으로 보면, 냇가에 너와지붕을 올린 물레방아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물레방아는 방아의 기능을 갖고 있지만, 신리 물레방아는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작은 공간과 외양간, 그리고 물레방아와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하천 쪽으로 내려가면 방앗간을 들어가는 문이 있고, 우측으로는 외양간이 마련되어 있다. 문의 좌측으로는 반 칸 정도의 작은 방이 하나 딸려있으며, 이곳의 앞부분만 흙벽으로 바르고, 나머지는 모두 판자로 벽을 처리하였다. 두 개의 방아공이가 방앗간 안에 놓여 있는 신리물레방아. 뒤편으로 돌아가면 수차가 있고, 위에는 말라버린 물길이 나 있다. 물레방아 뒤편에 내를 건너는 쇠다리가 놓여있으며, 물은 한참 위편에서 끌어들인 듯 하다.

 

 

 

사람이 살았던 물레방아

 

신리 물레방아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서, 주변을 살피는데 마을 주민 한 분이 밭을 갈고 계시다. 물레방아에 대해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잠시 곡괭이질을 멈춘 마을 분은 물레방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여기 물레방아가 멈춘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한 15년 전만 해도 물레방아를 사용을 했죠.”

“그런데 요즈음은 사용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어르신 한 분이 사셨는데, 연세가 들고 힘이 벅차니까 그만 두신 것 같아요. 그 어르신도 10여 년 전에 돌아 가셨구요.”

“그 이후에는 사용을 하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그 어르신이 생활을 하시는 것이 힘이 드셨으니까요. 원래는 어르신이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는데, 물레방아를 만든 것이니까 마을 사람들도 사용을 했죠.”

“물이 다 말라버렸네요”

“물길을 막아놓아서 그래요. 물길만 터놓으면 지금도 물리 흘러들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레방아를 본 적은 많지만, 이렇게 사람이 기거하는 물레방아는 보지 못한 것 같다. 이곳에서 혼자 사셨다는 어르신의 생활이 그리 편치 않았다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알만하다. 좁은 방은 어른 한 사람이 발을 펴고 눕기도 버거울 듯하다.

 

물레방아를 여기저기 살펴보면서 생각을 한다. 보수를 한다고 해도 이대로 놓아두면 물레방아의 기능도 사라질 판이란 생각이다. 물길을 다시 열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정겨운 소리를 들을 수는 없을까? 그저 형태만 보여주는 많은 민속자료들. 그러나 신리 물레방아는, 어느 물레방아도 따를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물레방아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물길을 방아로 보내는 수로를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도 특이하다.

 

 

평생을 물레방아 간에서 혼자 외롭게 보내신 어른의 체취가 묻어있는 신리 물레방아. 너와집으로 꾸몄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물레방앗간 안에 생활공간이 있었다는 점이 더욱 특이하다. 신리 물레방아를 그냥 마른 채 보존할 것이 아니라, 물을 다시 흘려 정겨운 방앗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도로변에 서 있는 석장승 한 쌍. 중요민속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장승은, 동문리 국민건강보험공단 앞에 마주하고 서 있다. 이곳은 옛 부안 읍성의 동문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동문 안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동문 안 장승은 성문과 성문 안에 있는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고, 재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세워진 것이다.

 

숙종 조에 세워진 동문 안 장승

 

이 동문 안 장승은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진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장승을 ‘벅수’라고 부르는데, 마을의 화재도 예방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풍물과 줄다리기, 당산제로 이어지는 마을의 축제가 열린다. 원래 이곳에는 커다란 당산나무와 마을사람들의 쉼터인 모정이 있었으나 지금의 도로가 뚫리면서 없어졌고, 문지기장군이라 불리는 한 쌍의 장승도 조금씩 뒤로 옮겨졌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한 쌍의 석장승은 벙거지를 쓰고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승이 남장승이다. 이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이라고 불렀으며,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 부른다.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장승은 여장승으로 ‘하원당장군’이라 부르고 있다. 자리를 옮겼다는 한 쌍의 장승은 도로변 작은 소공원에 자리를 하고 있다.

 

험상궂은 얼굴 안에 새겨진 미소

 

길을 등지고 서 있는 여장승은 정형화되지 않은 긴 화강암 돌에 면상을 새겨 넣었다. 이마는 밑으로 내려가면서 조금 넓어졌으며, 이마는 불거져 있다. 그 밑으로는 눈썹을 새겼는데, 중앙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눈은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 작은 눈동자를 만들었다. 코는 삐뚤어진 주먹코에 입은 위아래 이빨이 험상궂게 새겨져 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이라고 썼는데, 풍화에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복판 위에는 손을 만들어 놓았는데, 팔은 없고 손만 흐릿하게 보인다.

 

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장승은 머리 위에 끝이 둥근 벙거지를 쓰고 있다. 얼굴은 여장승보다 갸름하며 눈썹 사이에는 백호를 새겨 넣었다. 코는 뭉툭하니 주먹코에 길이가 짧다. 입은 송곳니를 표현한 듯한데, 양 볼이 튀어나왔다. 팔은 형상만 있으며 상원주장군이라 쓴 복판의 글씨는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은 전체적으로 오른팔 쪽으로 약간 굽어져 있다. 두 기의 장승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두려운 존재, 그러나 그 안에 편안함이 있어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과 잡귀잡신을 막는 역할을 하는 장승. 장승의 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경계 장승이다. 이 경계 장승은 사찰의 입구 등에 세워, 그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준다. 둘째는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수호 장승이다. 수호 장승은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소멸시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셋째는 로표 장승이다. 로표 장승은 길가에 세워, 방위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띠우기도 한다. 수호 장승과 로표 장승, 혹은 경계 장승과 로표 장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안읍 동문 안 장승은 수호 장승이다. 험상궂은 얼굴로 길을 보면서 마을로 들어오는 재액을 방비한다. 그 험상궂은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무한한 해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못생기고 추한 모습이지만, 우리네가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도깨비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입구에 험상궂은 장승을 세우고, 그 장승의 뒤에서 재액이 소멸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밖으로는 험하고 안으로는 편안한 모습. 그 안에 해학적인 모습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신격화시키고, 스스로를 위하였는가도 모르겠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다. 눈은 왕방울 눈에 툭 튀어나오고, 양편의 송곳니가 밖으로 삐죽이 솟아있다. 길가에 서서 이런 해괴한 모습으로 서 있는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비보(裨補)의 역할을 한다. 경남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가에 서 있는 통영 문화동 벅수의 모습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벅수는, 고종 10년인 1906년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벅수의 옆에 서 있는 비석에는 이 벅수가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해 세웠으며,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웠다는 것이다.

 

 

장승의 기능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광주 엄미리의 장승은 마을의 비보장승이면서, 로표장승의 역할도 함께 한다. 목장승의 밑에는 광주 ○○리, 이천 ○○리 등을 적어 놓아 행로의 안내를 하고 있다. 비보장승의 마을의 안녕을 구가하는 장승으로, 모든 장승들은 이러한 비보적 성격을 함께 띠우고 있다.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은,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마을의 허한 곳을 보충하는 토지대장군

 

흔히 마을입구나 사찰 입구 등에 세우는 장승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게 불린다. 흔히 장승, 장생, 장성, 벅수 등으로 불리며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 통영에서는 ‘벅수’라고 한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한다.

 

문화동 벅수는 남녀 한 쌍이 짝을 이루어 서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장승은 하나만 있는 독장승이다. 이 문화동 세병관 부근의 위치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로 기(氣)를 보강해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머리 위에는 벙거지를 쓰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었다. 벅수의 앞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는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광무십년병오팔월일동낙동 입(光武十年丙午八月日同樂洞 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독벅수는 익살스러운 민간 특유의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벅수에 반해 걸음을 떼지 못하다.

 

통영 문화동 벅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채색을 한 벅수이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벅수는 U자 형으로 벌린 입과 큼직한 이빨, 그리고 솟아난 송곳니가 비보장승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벅수의 높이 198cm, 둘레는 160cm인 문화동 벅수. 그 모습에 반해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한다.

 

벅수 하나만으로도 중요민속문화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벅수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10월 13일, 통영답사 2일차에 찾아간 세병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우르르 벅수 앞으로 몰려온다. 그리고 벅수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어대더니, 다시 동피랑 벽화마을로 향한다. 하지만 난 쉽게 동피랑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다. 벅수의 기운을 좀 더 받아가기 위해, 한참이나 손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는 안식처,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집은 사실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이웃과 소통이 막혀버린 꽁꽁 싸맨 그런 집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택’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00여 채가 넘는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카메라에 신경이 자꾸 쓰인다. 연신 뿌리는 빗방울을 닦아내도 금방 뿌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수원광주이씨월곡댁'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은 '파장동 이병원가옥'이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면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옛 이름을 갖고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월곡댁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데서 더 의미를 두는 집이다. 안채의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조 고종 25년인 1888년(광서(光緖) 14년 견자(犬子) 3월 18일 유시(酉時))에 건축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초가 한 채

 

이 집은 수원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들려보았던 집이다. 초가를 올린 집이라 지붕을 보수하고 있을 때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있다. 집은 안채를 둘러싼 담 밖으로 ― 자형의 헛간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파장동 월곡댁에 도착해 보니 도심 어디나 그러하듯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이리저리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할 수 없이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망설이야. 사람은 비를 맞아도 카메라만 맞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를 맞고 월곡댁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채와 바깥마당을 조금 떨어진 헛간채의 사이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도 차를 대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차를 비켜서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사방이 트여있는 ― 자형의 헛간채

 

안채와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월곡댁은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헛간채 남쪽으로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를 내었다. 헛간채는 넓은 5칸 정도로 꾸며졌다. 그 맨 끝에는 방으로 놓아 안채와 별도로 이곳에서 헛간채를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헛간채 앞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헛간채는 방과 광 등으로 꾸며졌는데, 광문의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아마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 듯하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담 안에 꾸며진 안채와 바깥채

 

원래 이 월곡댁의 집 뒤로는 낮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답답할 정도로 들어차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초가 한 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깥채에 달아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사진을 좀 찍겠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평범한 ㄱ 자형으로 부엌과 대청,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의 초가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안채의 구성은 동편의 끝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대청을 두고 있는 건넌방은 문밖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집은 그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안마당으로 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아 안방과의 연결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건넌방도 위아래 칸으로 나누어졌으며, 앞쪽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마 이렇게 부엌과 건넌방을 돌출시켜, 서해안에서 안채로 불어오는 바람을 최대한 막아낸 듯하다.

 

사랑채로 사용한 바깥채

 

월곡댁은 지정 당시 명칭이 '파장동이병원가옥'이었던 것이 바뀐 이유는, 소유자 이병원의 모친인 성주 도씨가 과거 안산군 월곡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지은 가옥으로, '월곡댁'으로 불린 것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2007년 1월 29일자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바깥채는 사랑채의 용도로 쓰였다. ㄴ 자형의 바깥채는 꺾인 부분에 중문을 두고,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광과 방이 있다. 이 바깥채는 조금은 옛 모습에서 달라진 듯하다. 사랑채는 위아래 방을 안채와 직각이 되게 배치를 하고, 중문이 부엌을 향하게 하였으며, 마당 앞에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집을 지은 년대가 남아 있는 수원광주이씨월곡댁.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월곡댁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다. 정작 집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비가와도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맙기 한이 없는 소중한 집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1호로 지정이 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29에 소재한 ‘엄찬 고택’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알려진 집이다. 원래 이 집은 문간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문간채는 사라지고, 사랑채와 중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광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의 집을 구성하고 있다.

 

 

 

사랑채와 사랑마루

 

넓은 마루가 시원한 사랑채

 

밖에서 본 엄찬 고택은 한 마디로 멋진 집이다. 녹음이 우거진 짙은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담장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하다. 현재 엄찬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된 중문을 사이로 출입이 가능하다. 사랑채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칸은 넓은 툇마루를 놓아 시원한 느낌이 든다.

 

사랑마루에서 벗들과 앉아 술이라도 한 잔 햇다면, 세상 모든 정취가 시 한수로 대신했을 것만 같다. 이 집을 지었다는 성삼문의 외손 엄찬도, 예전에는 이 사랑마루에서 앞의 경치를 바라보며 글을 읽고는 했을 것이다. 중간에 한 칸은 좁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어진 부분은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부엌이다.

 

밖에서 본 행랑채

 

마구간도 있었을 줄행랑

 

중문 밖으로는 한 칸의 행랑방과 광이 마련되어 있다. 이 광은 집의 구조로 보아 마구간으로 사용된 듯하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자형의 광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광채는 행랑방을 합하여 모두 여덟 칸으로 마련이 되었는데, 그 중 좌측 세 칸은 문을 달아 놓았다.

 

ㄷ 자형의 안채는 겹 마루를 놓아

 

전체적으로 대지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사용한 엄찬 고택은, 남쪽으로 중문을 두고 동쪽으로 본채를 두었는데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우진각으로 꾸몄다. 이 엄찬 고택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마루다. 모두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대청은 겹 마루를 놓았다. 중간에 기둥을 두고, 그 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형태이다.

 

 

안채의 마루는 기둥밖으로 또 마루를 덧낸 겹마루이다.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렸는데, 대청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부엌과 다락, 그리고 연이어 방을 세 개를 놓았다. 안방과 윗방으로 구분이 되는 이 방은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 안채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사랑채와 이어지는 부엌이다. 이 부엌은 중문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궁이가 이단으로 되어 있다. 즉 경사가 진 대지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보니, 아궁이가 깊어서 아래쪽은 가마솥에 불을 때는 아궁이로 하고, 그 위에 방을 데우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이중으로 난 아궁이. 비탈이 진 비형을 그대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의 아궁이를 층이지게 조성하였다. 위는 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

 

그림 같은 고택의 아름다움, 보존에 신경 써야

 

성삼문의 외손집이라고 해서 그 집이 잘 보존이 되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엄찬 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만큼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집이다. 엄찬 고택을 찾았을 때 집이 퇴락해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이 아프다. 마당에는 잡풀이 그득하고 주변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을 밑에서 바라보는 엄찬 고택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행랑채 앞에 자리를 하고 있어,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두 여덟 칸으로 되어있는 광채는 한 눈에 보아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안으로 들어가 살펴본 집은 여기저기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보인다.

 

 

 

1670년대에 지어졌다는 엄찬 고택. 그저 성삼문의 외손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장황하게 안내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을 했으면, 잘 보존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 앉아 불볕 햇볕을 피해본다. 예전에는 꽤나 행세를 했을법한 집안인데, 손길 사라진 집에서 느끼는 한기가 불볕더위마저 서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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