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3m 정도에, 길이는 10m. 그 위에서 20여분을 줄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줄광대는, 온갖 묘기를 다부린다. 줄 위를 바라보며 목을 있는 대로 뺀 구경꾼들은, 자칫 광대가 줄 위에서 발이라도 삐끗할작시면 바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악사들은 장단을 덩덕쿵~ 치면서 흥을 고조시킨다.

 

줄타기는 승도(繩度), 주색(走索), 색상재(索上才), 답색희(沓索戱), 고무항(高舞恒), 희승(戱繩), 항희(恒戱)등의 어려운 명칭을 갖고 있다. 남사당패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흥겨운 판이 바로 줄타기이다. 줄타기는 대개 관아의 뜰이나 대갓집의 마당, 놀이판이나 장거리 등에서 많이 연희가 되었다.

 

 

가끔은 절 마당에서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절 걸립을 시작하거나 마쳤을 경우에 펼쳐진다. 줄을 타는 줄광대를 어름산이라고 부른다. ‘산이란 경기도 지역에서 전문적인 연희 꾼을 일컫는 말이다. ‘어름이란 줄 위에 올라가 줄을 어른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속설에는 얼음판처럼 위험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즉 어름산이는 얼음산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줄타기는 항상 생명을 걸어놓고 위험한 연희를 하게 된다.

 

판줄과 토막줄로 구분되는 줄타기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대령광대(待令廣大)계열인 나례도감에 소속된 줄광대는 유한계층을 대상으로 연행하는 재인청 '광대줄타기'가 있다. 또한 유랑예인계열의 서민 계층을 대상으로 순연하는 남사당 여섯 마당 중 하나인 '얼음줄타기'가 있다.

 

줄타기를 할 때는 줄광대인 어름산이와 재담을 맞받아주는 어릿광대
,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가 함께 한다. 어릿광대가 없을 때는 악사 중에 한 사람이 재담을 받아주기도 한다.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악사 등을 두루 갖추고, 줄 위에서 재담과 춤, 그리고 줄 위에서 하는 40여 종의 잔놀음과 살판까지 하면 판줄이라고 부른다.

 

어릿광대 없이 줄광대 혼자 재담과 잔놀음을 간단하게 노는 것을 토막줄이라고 한다. 하지만 줄을 타는 어름산이에게는 판줄이나 토막줄이나, 그 위험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하기에 줄 위에 오르고 나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된다.

 

어째 춘향이는 하나도 보이지 않소

 

국가지정 명승인 남원 광한루원 안에 자리한 놀이마당. 14일과 15일 오후에 놀이마당 주변에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사람들 틈 사이로 흰 등걸잠방이를 입은 사람 하나가 널을 뛰듯 위로 솟구친다. 줄광대가 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서로가 가까운 곳에서 묘기를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 있는 줄광대 중에서는 그래도 인물이 나만한 사람이 드믈지. 이나저나 춘향제에 와서 춘향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려고 했더니 어째 춘향이는 하나도 없는 것인지 모르겠소.”

 

 

줄 위에 올라앉아 구경꾼들을 보고 하는 소리다. “어디 춘향이 없소?”하고 소리치니, 구경꾼들 틈에서 한 여인이 손을 든다. “아줌마가 무슨 춘향이요, 월매구만구경꾼들이 소리를 내며 웃는다, 줄 위에 올라 선 광재는 연신 재담을 섞어가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든다. 이런 재담은 주로 민초들을 대상으로 하는 남사당패의 어름줄타기에서 많이 나타난다.

 

양반가의 마당 등에서 연희를 하는 광대줄타기는 재담이 없이 단순히 줄만 타고 내려온다. 광대줄을 타는 어름산이들은 그 기능이 어름줄타기를 하는 줄광대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아무래도 양반을 상대로 농지거리를 할 수 없으니 기능이 더 뛰어나야 박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여 분 줄 위에서 갖은 기능과 재담을 섞어가면서 줄을 나는 줄광대는 마지막으로 줄 위에서 솟구쳐 오르면서 몸을 180도 회전시킨다. 보는 사람들은 절로 탄성을 지른다. 20여분의 주라기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는 줄광대의 옷은 더운 날씨에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몸에 붙어있다. 이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줄광대지만 그 기능은 어느 누구 못지않은 듯하다. 이름이라도 알아보려는데 어느새 옷을 훌훌 벗고 있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줄을 탔으니 오죽하랴.

 

 

나라사랑 음악회. 수원시와 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에서 주최를 한 ‘호국보훈의 달 나라사랑 음악회’가, 6월 18일(화) 오후 7시 비가내리는 가운데도 1,000여명이 모인가운데 수원제1야외음악당에서 열렸다. 이 음악회에는 제3군야전군사령부와 제51보병사단의 장병들도 함께 참여를 해 음악회가 더욱 알차게 진행이 되었다.

 

“2013년은 동족 간의 이념대립으로 인하여 서로 총구를 겨누었던 6.25 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 나라사랑 음악회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 보훈가족의 생활안정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오늘 나라사랑 음악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주신 염태영 수원시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테이 등 장병가수들도 참여한 음악회

 

인사말에서 이상준 수원보훈지청장은 염태영 시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이 날 음악회에는 제3군야전군사령부와 제51보병사단 군악대가 음악을 맡았으며, 현역장병인 우정훈, 김호경(테이), 민경훈 등이 출연을 했다. 이 외에도 가수 린과 박상민이 무대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수원은 보훈지청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잊으며 안됩니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을 호국의 제단에 바치고, 어려웠던 세월을 의연하게 헤쳐오신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비가 오는 가운데도 이렇게 많이 참석을 해주신 수원시민 여러분들과 학생들, 군 장병들과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 미군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했다.

 

이어 “이 나라사랑 음악회는 순국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호국영령 및 유가족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회입니다. 또한 115만 수원시민과 학생들을 위한 음악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도.

 

 

줄타기 등 다양한 무대 선보여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유미지와 일병 우정훈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음악회는 제1부는 월남전 수원지회 민요예술단의 태평가, 뱃노래 등을 불렀으며, 이어서 객석 뒤편에 줄을 매고 현역인 김인주의 줄타기로 이어졌다. 비에 젖은 줄을 탄다는 것은 상당히 미끄럽고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담꾼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묘기를 보여주었다.

 

제2부에서는 이희경 소령과 김은지 대위의 지휘로 군악대와 의장대의 연주와 의장대 시범으로 이어졌다. 이날 무대에 오른 가수 김호경(테이)와 민경훈, 외에도 가수 린, 박상민, 빅스 등이 출연을 해 관람석을 채운 청중으로 부터 박수를 받았다.

 

 

매탄동에서 가족과 함께 음악회 관람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성아무개(남, 45세)씨는

“오늘 이렇게 좋은 음악회를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거기다가 군에 가 있어 소식이 궁금하던 가수들까지 보게 되니 아이들도 즐거워하고요. 줄타기 등은 정말 보기 어려운 기예인데 이렇게 좋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무대와 청중이 하나가 된 나라사랑음악회.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성황리에 진행이 된 음악회에 참가를 한 여학생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우리들은 6,25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저 남과 북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슬프고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역사의 아픔이라는 것 밖에는요. 앞으로는 유가족 여러분께 정말 갚은 감사를 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줄광대는 줄 위에서 갖은 묘기를 부린다. 줄 위를 바라보며 목을 있는 대로 뺀 구경꾼들은, 발이라도 삐끗할작시면 바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밑에서는 어릿광대가 관객들과 줄광대 사이를 부추기며 돌아다닌다. 악사들은 장단을 덩덕쿵~ 치면서 흥을 고조시킨다. 높이 3m 정도에, 길이는 10m. 그 위에서 20여분을 줄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줄광대는, 온갖 묘기를 다부린다.

 

승도(繩度), 주색(走索), 색상재(索上才), 답색희(沓索戱), 고무항(高舞恒), 희승(戱繩), 항희(恒戱)등의 어려운 명칭을 갖고 있는 줄타기는, 남사당패의 놀이 중에서도 가장 흥겨운 판이다. 줄타기는 대개 관아의 뜰이나 대갓집의 마당, 놀이판이나 장거리 등에서 많이 연희가 되었다. 가끔은 절 마당에서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절 걸립을 시작하거나 마쳤을 경우에 펼쳐진다.

 

 

외줄에 목숨을 걸다

 

줄을 타는 줄광대를 어름산이라고 부른다. ‘산이란 경기도 지역에서 전문적인 연희꾼을 일컫는 말이다. ‘어름이란 줄 위에 올라가 줄을 어른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 하나의 속설에는 얼음판처럼 위험하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즉 어름산이는 얼음산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줄타기는 항상 생명을 걸어놓고 연희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줄타기는 대령광대(待令廣大)계열인 나례도감에 소속된 줄광대가는 유한계층을 대상으로 연행하는 재인청 '광대줄타기', 유랑예인계열의 서민 계층을 대상으로 순연하는 남사당 여섯마당 중 하나인 '얼음줄타기'가 있다.

 

 

줄타기를 할 때는 줄광대인 어름산이와 재담을 맞받아주는 어릿광대,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가 함께 한다. 어릿광대가 없을 때는 악사 중에 한 사람이 재담을 받아주기도 한다. 줄광대가 어릿광대와 악사 등을 두루 갖추고, 줄 위에서 재담과 춤, 그리고 줄 위에서 하는 40여 종의 잔놀음과 살판까지 하면 판줄이라고 부른다.

 

어릿광대 없이 줄광대 혼자 재담과 잔놀음을 간단하게 노는 것을 토막줄이라 부른다. 하지만 줄을 타는 어름산이에게는 판줄이나 토막줄이나, 그 위험은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하기에 줄 위에 오르고 나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된다.

 

 

인간문화재의 줄타기

 

24()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 줄이 걸렸다. 한 해 동안 이곳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시작하는 날에, 그 끝에 줄타기가 선을 보인 것이다. 올해 줄을 타는 줄광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58호인 줄타기의 기예능보유자인 김대균이다. 인간문화재가 줄을 타는 것은 상당히 보기 드문 구경거리이다.

 

경기도 연천에는 재인폭포가 있다. 옛날에 문선준이라는 줄광대가 이 재인폭포를 건너 줄을 매고, 그 폭포 앞으로 줄타기를 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줄광대들은 나름대로의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는가 보다. 지금은 줄타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기예능보유자였던 고 김영철(1988년 작고)의 기능은, 현 보유자인 김대균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를 비롯해 몇 명의 줄광대가 놀이판을 펼치고 있다.

 

줄타기의 보유자인 김대균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에 입문하여 김영철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198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전수조교로 선정되었으며, 200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 줄타기 예능보유자로 인증을 받았다.

 

 

불이 벌건 화로를 들고 줄 위에 오르다

 

흔히 줄타기의 마지막은 살판을 한다고 한다. 이 살판이란 잘하면 살고, 못하는 죽는다.’는 소리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살판은 남사당패의 연희 중에서 땅재주를 말한다. 텀블링과 같은 재주 등 갖가지 묘기를 선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살판이라고 그 이름을 붙인 것일까?

 

말 그대로 살판이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전하는 말대로라면 불이 벌겋게 붙은 화로를 안고 땅재주를 넘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칫 실수라고 할양이면, 불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그 살판 중에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줄 위에서 했다고 하니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흔히 남사당패에 의해 연희가 되는 줄을 어름줄타기라고 한다. 이는 줄 위에서 갖은 재담과 춤, 줄놀음 등을 섞어서 연희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줄만 타는 것은 광대줄타기라고 불렀다. 이 광대줄타기는 양반들을 위한 줄타기로, 줄을 타는 기능은 어름줄타기를 하는 줄광대보다 뛰어났다는 평이다.

 

하지만 민초들을 상대로 하는 어름줄타기는 재담이 해학적이다. 줄 위에서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파계승에 대한 풍자 등을 재담으로 엮어나간다. 그래서 억눌린 민초들의 분풀이를 하는 데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줄타기를 마칠 때가 되면, 박수를 치면서 앙코르를 외친다. 그래서 줄광대는 외롭지가 않은가보다. 떠날 듯한 함성이 항상 같이하기 때문에.  (사진 수원시청 정책홍보담당관실 이용창)

재인청에 대해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는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던지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한 때는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집단

 

재인청은 무부(巫夫)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재인청의 수장은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의 선출은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사진 / 고 이동안 선생. 구글검색 자료 인용)

 

 

까다로운 규제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제 속에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끊임없는 학습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경기도 화성은 수많은 전통 예인들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 중에서 재인청을 기반으로 한 많은 예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해 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인간문화재이셨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14세 때 남사당패들을 따라서 부모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가출을 강행했다. 그런 가출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춤과 발탈로 한 생애를 보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학습을 한 예인이며, 다양한 끼와 재주를 발산한 스승이셨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서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글공부 마다하고 광대의 길로

 

12살 때까지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통감을 4권까지 배웠다. 아버지가 시키는 글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공부보다도 할아버지가 부는 피리나 젓대를 몰래 가지고 놀거나 어름타기(줄타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에 더 재미가 팔려 있었다.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그는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이동안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그는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14세의 어린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광대 수업을 받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됐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30여 종에 이른다.

 

(주) 살풀이 춤의 사진지료는 어려서 부터 이동안 선생에게서 직접 재인청 춤을 사사한 고성주와 문하생들

 

고 이동안 선생의 춤은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내노라하는 무용인들에게 전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동안 선생이 발탈로 지정을 받게 되자 많은 춤꾼들은 이동안 선생의 춤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운학 이동안 선생의 춤.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생애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그의 춤은 이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안의 재인청 살풀이

 

운학 고 이동안 선생에게서 옥당 정경파 선생에게 전승이 된 살풀이는 현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이다.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 경기살풀이는 두개의 수건을 이용해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승무와 함께 지정된 살풀이춤은 무속 음악 가운데 살풀이라는 무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경기도 재인청의 무부들은 원래 도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도살풀이를 추어왔다. 그러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처음에는 긴 천을 갖고 추었으나, 후에 그것을 반으로 갈라 두 개의 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원래 무당들이 신내기리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춤인데, 후에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 예술로 발전하여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살풀이춤은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복장에다 흰 수건을 가지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