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이웅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패드2’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6월 7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찾아간 집이다.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이며 마을의 전주이씨 향조이기도 한, 춘성전 이담손(1490년생)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이 집을 지은 것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지었으니, 벌써 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고택이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방형으로 구성된 대지는 북에서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군데군데에 축대를 동남향으로 쌓고 그 기단 위에 집을 앉혔다.


대문과 효자정려. 이 사진은 모두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하였다.

대문 위에 걸린 효자 정문

밖에서 보기에도 집은 넓지 않은 터에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삼문으로 구성된 대문은 이 집의 품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가의 일면을 알아 볼 수 있는 이웅재 고가는, 대문 위에 효자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이문주에게 내려진 이 현판에는, 「有明朝 孝子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之閭」라고 적혀있다.

문간채도 이 무렵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며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집안은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있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대문을 들어서면 5단의 장대석 축대 위에 올린 사랑채가 보인다.




 

안 행랑채 동편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1864년에 세워졌다. 기록에는 고종 1년인 1864년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사랑채는 동편으로 두 칸 마루를 놓고, 서쪽으로는 두 칸 방을 드렸다.

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빼 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있게 지어진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안담으로 연결이 되어있으며, 뒤편으로는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을 내어 놓았다. 그 뒤편으로는 높게 축대를 쌓고 지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높임마루를 놓아 책방을 꾸민 안 행랑채가 자리한다.



양편에 날개를 단 안채 공루가 특이 해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동서 양측에 날개를 달아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기단을 높이고 그 위에 앉혔으며, 날개채는 단을 낮게 놓았다. 하기에 날개채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보다 낮게 조성이 되었다. 안채는 큰방의 동측에 머리방 대신 도장을 설치하고, 도장 남측에 마루를 두고 이어서 방을 드렸다.

안채 대청을 바라보면서 우측날개에도 방을 따로 두고 있다. 상부는 외부를 판벽으로 두른 공루이고, 하부는 아궁이를 둔 공간을 배치하였다. 큰방의 서쪽에는 찬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현재는 실내의 공간은 조금 바뀐 듯하다. 이러한 가옥의 배치나 구성은 딴 집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이다.




안채 전면에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가 날개를 벌려 안채를 감싸고 있다. 이는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방아실과 안광이나 책방 등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의 배치는 풍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채로 불어드는 바람을 막지 않기 위함인가 보다. 방아실의 벽을 타고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게 조성하였다.

넓지 않은 대지를 이용해 건물배치를 한 이웅재 고가. 나름대로 건물배치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산란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가옥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제대로 된 답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한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일제의 만행에 앞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들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런 고귀한 죽음을 아직도 망령된 일제의 잔재들이 더럽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가끔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젠 그도 세월이라는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순창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순창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6.25때도 불타지 않고 잘 보존된 중요 유적지며 사적지다. 순창객사는 조선조 영조 35년인 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이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순창객사와 망궐례를 행하던 정당(가운데, 아래)

서대청이 사라져 버린 순창객사

순창객사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다. 정당이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하 만만세’라고 새긴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일이 있을 때도 궁궐을 향하여 절을 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중앙의 관리가 이 고을에 찾아 왔을 때는 이곳에서 묵었던 곳이다. 객사는 공무로 일을 보는 관리들의 숙박 장소였던 곳이다.




순창객사의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안의 바닥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은 모두 살창으로 막아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는 공적인 궝례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란 생각이다.

방이 없는 동대청

원래 객사를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기 때문에 객방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런데 이곳 동대청이 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대청에 방이 있었는가 보다. 동대청은 시원하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주변에는 오래 묵은 고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객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동대청은 1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올렸다. 그리고 원형의 기둥을 세워놓았다. 대청의 누마루 위에는 가운데 기둥을 세웠으며, 천정 위에는 신서도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교한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이 객사는, 한말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구국열기가 뜨겁던 곳

순창객사는 단순히 객사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던 곳이 아니다. 순창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읍의 무성서원에 모였던 의병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잔주에서 급파된 병사들에 쌓여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결국은 숫자열세에 밀려 패퇴를 하고 말았고, 최익현은 순창객사에서 일본군에게 생포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가 되었다.



관원들의 공무길에 묵을 수 있었던 객사. 언제 서대청이 소실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정당과 동대청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자리하고 있어, 객사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 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건물 앞에 서 있는 순창객사는, 역사의 산 증거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의외의 모습에 가끔은 놀랄 때가 생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국보나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자리한 송광사. 송광사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이 있다. 한 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지금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으로 번성하였다.


십자각으로 지어진 특별한 종루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이 전각은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여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2월 23일,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송광사로 달려갔다. 수차례나 찾아간 송광사지만, 늘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송광사로 달려간 것은 종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송광사에 있는 소조사천왕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조사천왕상은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십자각이 눈에 걸리는 것인지. 일몰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바쁜데도, 종각에서 발길이 멈추고 말았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누마루 밑의 기둥이 자연일세.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을 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을 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란한 조각이 돋보이는 종각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상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일깨운 종각의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문화재 답사.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시간을 정할 수가 없다.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을 떠갈 때마다, 조금 일찍 시작하지 못했음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계절이 따로 없는 정자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이러한 조삼선생이 노후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찾아오는 동료들과 강론을 하고자 지은 정자무진정. 무진정을 찾아갔을 때는 앞으로 조성한 연못의 바닥을 고르기 위해, 몇 대의 중장비들이 연못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는 적은 섬을 만들어 ‘영송루’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으로 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연못에 걸린 다리를 지나, 잠시 ‘영송루(迎送樓)’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라면 이곳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또한 달밤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송루를 지나 커다란 고목을 끼고, 돌아 오르는 다리를 마저 건넌다.

‘정말 절경이다’ 감탄이 절로 나와

무진정을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예전에야 상당한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오르는 계단 주위로는, 푸른 대가 아직은 찬바람을 맞아 잎이 부딪쳐 바스락거린다. 작은 일각문 하나가 손을 맞이한다. ‘동정문(動靜門)’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문이란다.




마치 선 문답을 하듯 한참이나 속으로 그 뜻을 되뇌어 본다. 무슨 뜻으로 이런 일각문을 달아놓았을까?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무진정은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앞에서 보니 정자 가운데에 방을 드렸는데,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이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고, 정면을 뺀 삼면에는 창호를 달아냈다.

무진정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창호들이다. 삼면의 창호를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고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문을 모두 닫아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날이 좋으면 모든 창호를 위로 열어. 바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정자

정자의 기둥 위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다. 축대를 쌓은 돌도 장대석이 아닌 자연적인 돌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인 정자들이 보이는 양반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로 올라본다. 조금은 찬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정자 가운데 있는 방의 문도 좌우 문을 위로 달아 놓게 되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정자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생전 선생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하지를 않았을까? 그저 모든 일에 답답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들고 온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과연 무엇일꼬?’


우리 고택을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은 비밀스런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비밀스런 곳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다. 대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어가려면 중문을 이용하게 된다. 중문을 이용하지 않고 안채로 가는 길은, 그 중간에 쪽문인 일각문을 두어 출입을 한다.

그러나 고택 중에는 그런 쪽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한 곳도 있다. 그런 집들을 보면 괜히 즐거워지는 지는 힘든 답사 길에서 가끔은 혼자 멋대로의 상상을 즐겨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샛길의 용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샛길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거창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소재한 정온선생 생가는, 처음 지은 지가 500여 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정온선생의 생가였고 종택이었다는 하는 이 집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선생의 생몰연대가 조선조 때인 1569~1641년임을 감안한다면, 줄잡아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순조 20년인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을 한 후로 줄곧 자리를 지켜 온 집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사대부가나 그러하듯 하나 정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정온선생의 생가는 지역의 기후에 맞게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결집형태와, 남부지방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조화를 시키고 있다.



남부지방 사랑채의 전형을 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주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과 광채

정온선생은 조선조에서 충절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이 되었다. 선생은 함양 남계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배향이 되었다.

높임마루를 놓은 안채의 여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채를 막는 바람벽 등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대신 안채를 조금 비켜서 구성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중문 앞으로는 길게 광채를 놓고, 그 옆으로 - 자 형으로 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두 칸의 부엌에 이어 방과 대청, 그리고 맨 끝에는 한 칸의 높임마루를 둔 방이 있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높임마루는 남부지방의 특징이다.

앞으로는 사랑채의 뒤편이 보이게 지어진 이 안채는 대청을 지나 구성된 건넌방의 툇마루를 높이고, 그 앞을 난간을 둘렀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임마루의 형태로 꾸며진 것이다. 이러한 집의 구성이 색다른 정온선생의 생가는 북부와 남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집의 꾸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은밀한 동선인가? 사랑채 뒤편 터진 담

그런데 안채에서 사랑채 쪽으로 보니 담장이 트여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사랑채와 연결을 할 때는 일각문을 두는 법인데, 그대로 담장의 한 편 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채 방 뒤편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동선은 대개 어른들이 기거를 하는 사랑에서, 집안의 젊은 남정네들이 안채에 있는 젊은 새댁을 보러가기 편하게 꾸미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사랑채 뒤편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동선이 있다.
 
더구나 안방에 안주인이 기거를 한다면, 건넌방을 새댁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중문채에 기거하는 식솔들을 피해, 바로 안채 건넌방으로 갈 수가 있다. 옛 사대부가에 보면 가끔 이런 동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뒤편으로 난 방문에서 댓돌을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은밀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