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있는 도화리 고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고가는 조선 말기의 목조 기와집이다. 전체적으로 ㄷ자형의 이 도화리 고가는 청풍면 도화리에 있는 집을 1985년 수몰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도화리 현장에 있을 때에는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가 있었고, 뒤뜰과 옆 마당에 밭이 있었던 집이었지만, 현재는 집만 옮겨온 상태이다. 이 집은 냇돌로 기단을 쌓은 집으로 왼쪽으로는 방, 부엌, 방이 배치가 되고,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방 두 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왼쪽의 방은 사랑방으로의 기능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방은 이 집의 사랑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툇마루를 놓기 마련인데, 도화리 고가의 왼편 방은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툇마루는 앞쪽과 집 뒤편까지 이어져 있다.

 

  
▲ 사랑방 툇마루가 달린 이 방은 사랑방으로 싸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랑방 툇마루가 놓인 곳에도 문을 내고 앞 뒤에도 각각 문을 내었다. 툇마루는 집 뒤편까지 이어진다.


문 앞 사랑방을 지나면 부엌이 있는 것도 이 방을 사랑방으로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즉 안방과 구별을 두기 위해 중간에 부엌을 두었다는 점이다. 사랑방은 툇마루에 문을 두고, 양편으로도 문을 내었다. 문을 모두 개방하면 삼면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이 되었다. 충실한 사랑방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는 셈이다.

 

판자벽으로 된 부엌

 

사랑방과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대청 건너의 두 칸의 방과 연결된 부엌이 있다. 그런데 이 부엌은 앞뒤 벽을 판자로 막았다. 이 지역에서 보이는 많은 고가 중에서, 이렇게 판자벽을 사용한 집은 오직 도화리 고가뿐이다. 이 부엌은 앞뒤로 나 있는 문을 중심으로 대청 쪽은 일반 담벼락을 사용했지만, 문에서 바깥 부분은 모두 판자벽으로 조성했다.

 

  
▲ 부엌 판자벽으로 꾸민 부엌. 앞 뒤가 다 판자벽이다.

  
▲ 부엌의 뒤편 부엌의 뒤편 판자벽에는 구멍이 나 있다. 까치구멍도 충실히 만들어 놓았다.


앞쪽의 부엌 문 위는 개방을 하였고, 뒤편의 판자벽은 이단으로 나누어 문 위로는 짧은 판자를 사용했고. 그 밑으로는 긴 판자를 사용했다. 이 부엌의 담도 문 쪽의 바람이 마주치는 담에는 심벽(心壁)으로 꾸몄다. 바람이 들어올 정도로 틈새가 벌어진 부엌에 심벽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모습이 오히려 이집의 멋으로 보인다. 이 판자벽을 막은 판자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다.

 

도화리 고가에는 두 곳의 부엌이 있는데, 모두 양편으로 문을 내고 까치구멍도 충실하게 아래편으로 두었다. 사랑방 쪽의 까치구멍은 바깥쪽으로는 이층으로 내어 환기가 빠르게 만들었다. 이 부엌에는 아궁이 반대편에 판자로 만든 마루를 중간에 놓아 그릇 등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 부엌마루 부엌에는 중간에 마루를 놓아 그릇이나 상 등을 올려놓고 아래는 장작을 쌓아둔다.

  
▲ 까치구멍 도화리 고가의 안방에 붙은 부엌에는 이층으로 된 까치구멍이 있다.


대청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선조들

 

고가를 돌다가 보면 대청 위에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지른 것을 볼 수 있다. 그 두 개의 가로지른 나무는 때로는 끈으로 묶어 놓은 것도 있고, 아주 고정을 시켜 놓은 것도 있다. 세 칸이나 되는 도화리 고가에도 양편에 이렇게 가로지른 나무가 있다. 그 가로대 위에는 멍석이나 상 등을 올려놓았다. 넓지 않은 집에서 대청의 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이런 지혜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 대청 대청을 적절히 이용한 도화리 고가

  
▲ 대청 가로지른 나무 위에 갖가지 물건을 올려놓았다. 좁은 집을 적절히 사용한 지혜다.


아름다움과 보온, 일석이조인 심벽

 

고가들을 돌면서 보면 아름다운 심벽들이 있다. 이 심벽은 돌과 백회 등을 이용해 조성을 한다. 도화리 고가의 심벽이 남다른 것은 바로 냇돌로 심벽을 쌓았다는 것이다. 일반 돌이 아닌 냇돌로 심벽을 쌓기는 더욱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정성을 드린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야기다. 이 심벽은 벽의 두께가 두꺼워져 보온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보온과 아름다운 집을 꾸밀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 심벽 도화리 고가의 심벽은 냇돌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그 심벽이 아름답기도 하고, 보온의 효과도 높인다. 또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것을 막기도 했단다


도화리 고가를 돌아보면 평범한 가운데 재미가 있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것 하나에도 선조들의 지혜가 보이기 때문이다. 도화리 고가의 특이함은 바로 냇돌로 기단과 심벽을 치장한 집이라는 점이다. 

고택 답사를 하기 위해서 3일에 한번 씩은 답사를 나간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집의 구조를 찍고, 전체적인 정경을 촬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답사를 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졌다.

 

하나하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조금만 특이한 것이 있으면 몇 장이고 담아온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답사의 형태가 달라지고 나름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은 고가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중전리. 이 고가를 찾기 위해서 애를 먹었다. 번지가 나오지 않고 중전리라고만 소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큰 길에서 찾아 들어간 중전리.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마을 분들에게 이곳에 고택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몇 바퀴를 돌아보았지만, 고택 같은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다보니 좌측으로 중정리라는 이정표가 또 보인다. 그 길로 따라 들어갔지만, 길은 구불거리고 마을에 집이라고는 몇 채 되지 않는다. 차를 돌리려는데, 저 안쪽 산 밑에 초가가 보인다. 중전리가 지역적으로 넓어, 처음 찾아간 중전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니 큰 마을에서는 모를 수밖에.

 

 

중전리 고가는 한 마디로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신다. 집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대문채의 우측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대문의 좌측은 판자벽으로 막은 두 칸의 외양간과 헛간이다.

 

사랑채는 대문에서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그 끝에 터진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의 두 칸 방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다. 주위에 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터진 대청에서 주위의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대문채에 지붕은 이어지고 벽이 없이 꺾어진 방들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ㄴ 자형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채에 살림방을 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가 있는 대문채는 ㄴ 자로 꺾여있다. 그런데 대문 옆에 있는 헛간과 이어지는 부분은 지붕만 있고, 한 칸 정도가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한데 아궁이가 있으며, 두 칸의 방이 있다. 그리고 까치구멍을 낸 광이 있고,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는 안채의 건넌방과 마주하고 있는데, 현재 이 집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의 이야기로는 이 사랑채에 연결된 방이 살림방이라는 것이다.

 

집의 구조로 보면 행랑채에 해당하는 형태로 되어있지만, 이 방이 살림방이라는 말에, 안채에서는 살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채는 사람이 살았지만, 안주인이 이 사랑채의 꺾인 방에서 살림을 했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 안채로 가려면 판자로 막은 바람벽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대문을 열어도 직접적으로 안채를 볼 수는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되어있어, 중전리 고가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 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의 건넌방에서 살림방으로 연결이 되다

 

중전리 고가의 집의 구조는 남다르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는  마당 안쪽으로 방문이 나 있는데 비해, 이 안채의 건넌방은 안마당 쪽으로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그리고 사랑채의 꺾인 날개채의 끝에 달린 마루와 이어지는 곳에 방문이 나 있다. 즉 안채의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건넌방에서 이 살림채로 동선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꺾이는 부분에 안방과 있고, 다락을 둔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6칸의 집이지만, 방은 건넌방과 두 칸인 큰 안방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청 끝 안방의 앞부터 부엌의 까치구멍까지 이어서 툇마루를 놓은 것도 특이한 구성 형태다. 부엌에서 뒷문을 통해 안채의 뒤편에 있는 장독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중전리 고가의 색다른 형태이다. 대청의 안방 앞에는 대나무로 시렁을 놓아 병풍을 올려두었다. 우리의 고택 중에는 대나무 시렁을 둔 집이 상당수 있다.

 

 

방앗간이 있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는 외딴집이다. 금성면 중전리의 큰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래서인가 이 고가의 안채와 꺾은 날개채의 터진 부문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초가로 지은 방앗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채는 디딜방아를 놓은 곳과, 곡식을 쌓아두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었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중전리 고가는 안채의 뒤편에 돌로 축대를 쌓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다.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는 원래 초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기와집으로 꾸며졌다. 또 하나 이 중전리 고가에는 외곽담장을 두르고, 그 안으로 대문을 낸 것도 색다르다. 아마 이 곳에 사랑채를 두었기 때문에, 외곽담장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외곽담장은 안채의 부엌 끝과 맞물려 있어, 사랑채에서는 안채의 뒤편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현재 중전리 고가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의 구조는 특이하지만, 원형이 바뀐 것이 중요민속자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응청각은 원래부터 청풍 한벽루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도 제천청풍문화재단지 안 한벽루의 좌측에 예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응청각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응청각이 한벽루 옆의 있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응청각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관수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일반적으로 당이라고 하면 누정의 효과를 나타내는, 관아 안의 건물 등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수당(觀水堂)은 아마 당시에도 이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관수당의 당호가 주는 의미

 

관수당이라고 전각의 뒤편에 붙인 현판으로 보아, 이 건물은 관아의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형태를 보면 누(樓), 정(亭), 대(臺), 당(堂), 제(齊), 헌(軒)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들어서 이 이름이 모두 혼용이 되어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명칭에 따라 용도가 다 다르다.

 

우선 '누'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층의 전각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정'이란 공간이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는 경우이다. 간혹 주추를 높여 밑으로 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 '대'란 관아에 속해있는 정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제'는 향교나 서원 등의 기숙을 할 수 있는 집이며, '헌'은 원래 왕실의 가족들이 묵는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외에도 '합(閤)'과 '각(閣)'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여러 사람이 집회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흔히 '서당'이란 배우는 학동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용도로 볼 때 '관수당'이란 물가에 서 있는 청풍현의 관아 중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묵을 수도 있는 정자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층을 벽으로 막은 응청각

 

응청각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아래층을 석축벽으로 막았다. 토석을 섞어 아래를 둘렀으며, 한편은 트여놓았다. 아마 그곳은 기물 등을 둘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층은 나무로 만든 목조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층의 둘레는 난간을 둘렀다. 응청각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조 초에 이황(1501 ~ 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으로 보면 응청각은 500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응청각. 이층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마루방이고, 문을 지나면 온돌로 놓여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기둥을 세우고 그 틈을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 발랐는데, 중간부분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위로 비스듬히 뚫려있다. 아마 이곳이 방에 창불을 때는 곳은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전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어진 응청각.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의아한 곳이 많은 집이다. 그래서 이런 집을 돌아볼 때는,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 즐겁지만.

 

문경 동로면에서 충북 단양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도로변에,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무송대(舞松臺)’라고 부른다. 춤을 추는 소나무가 서 있다는 곳이다.

 

이 춤추는 소나무를 보면 어떻게 소나무가 저렇게 자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지들이 마치 사람의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이리저리 휘어진 가지들이 춤을 추는 동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춤추는 소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는가 보다.

 

 

 

말무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무송대 한편에는 말무덤(=馬塚)이라고 작은 돌 비석을 세워놓았다. 그리고 작은 봉분이 하나있다. 이 말무덤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을 따라 왔다가, 우리나라로 귀환한 명 지관인 두사충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두사충은 조선조의 문신인 약포 정탁대감에게 큰 은혜를 입어, 그 보답으로 정탁대감의 신후지지를 보아두었다. 신후지지(身後之地)란 살아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를 말한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산줄기가 문경지방에 와서 황장산(1,077m)을 비롯한 무수한 명산을 잉태한다.

 

 

 

그리고 이 동로면의 적성마을은 묘터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옥관자 서 말, 금관자 서 말이 나온다는 연주패옥(連珠佩玉)의 명당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 들린 두사충은 명당 터를 잡아놓고 그 위치를 구종에게 알려놓았다고 한다. 얼마 후 정대감의 아들과 함께 온 구종이 묘 자리를 알려주자, 말이 뒷발질을 해 구종이 죽고 말았다.

 

아직도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져

 

정대감의 아들은 화가 난 말을 죽여 이곳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연주패옥의 명당은 다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더욱 아직도 이 일대에는 명당을 찾는 지관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니, 죽음 후에도 자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가보다.

 

 

무송대의 춤추는 소나무와 말무덤. 길가에 서 있는 이러한 나무 한 그루에도 우리들은 수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길을 가다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릴 수도 있는 춤추는 소나무. 그 가지 하나하나의 모습이 멋이 깃들어 있다.

돌 하나하나를 다듬어 칠층 높이의 땀을 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일까? 보물 제459호인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제천시 장락동 현 장락사 앞에 서 있는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 몇 기 안 되는 모전석탑 중 하나이다. 회흑색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된 이 모전석탑은 현재 높이가 9.1m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 모전석탑을 조성하는데 쓰인 점판암은 장력강도와 내구력이 큰 얇은 판으로, 쉽게 쪼개지는 세립의 점토질 변성암이다. 점판암은 검은색·파란색·보라색·붉은색·녹색·회색 등을 띤다. 점판암의 어두운 색은 탄질물이나 미세한 황화철에 의한 것이며, 붉은색과 보라색은 산화철인 적철석에 의한 것이고, 녹색은 녹색의 운모질 점토광물인 녹니석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판암으로 조성한 칠층석탑

 

점판암은 채석된 원석으로부터 약 7.5㎝ 두께로 쪼개진다. 정을 원석의 가장자리에 대고 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리면 벽개면을 따라 틈이 생기게 되는데, 정이 지렛대 역할을 하여 원석이 매끈한 표면을 가진 2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 원석이 16~18개의 조각이 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 후, 손 작업이나 회전절삭기를 이용해 적정한 크기로 다듬는다.

 

이러한 점팜암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현재는 탑이 서있던 절터 주변이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뒤편으로는 장락사라는 새로 지은 절이 있다.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장락동 모전석탑.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는 탑의 위용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천년 세월 버텨낸 칠층석탑

 

탑을 받치는 기단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1단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탑 전체의 조형을 단단하게 하였으며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 면에는 사리를 두는 감실(龕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던 것을 새롭게 조성해 달아놓았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처럼 만든 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만이 남아 있다.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상륜부에는 청동으로 머리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

 

 

 

 

오랜 세월 한 장 한 장 땀 흘려 쌓은 흔적이 보이는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보물로 지정이 되었기에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 한 장 한 장을 오랜 시간을 일일이 쪼개고 다듬어서 쌓은 노력을 행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하나의 탑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노력을 했을까? 그리고 이 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성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하나의 문화재를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문화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숭고한 우리 선조들의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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