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른바희 우히

松竹을 헤혀고

亭子를 언쳐시니

구름탄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나래 버렷난듯

玉泉山 龍泉山

나린 믈리

亭子압 너븐들히

올올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푸르거든 희디마나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대나무 숲 위에 자리하고 있는, 면앙정 앞에 서 있는 '면앙정 가비(俛仰亭 歌碑)'에 적힌 글이다. 면앙정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도로변에서 조금 위로 오르는 대숲을 지나 길 위에 자리하고 있다.


강호제현이 다 모여들다


면앙정은 송순(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은 정자이다. 이곳에 정자를 지은 송순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나라의 일을 논하고 학문을 논했다. 이 면앙정에 모인 문인들을 '면앙정가단'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렇게 부른 것도 이곳에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송순이 관직에 나아가 있는 50년 동안에는 4대 사화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단 1년의 유배생활을 한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교류가 좋았음을 의미한다.


'가단(歌壇)'이란 노래를 부르는 장소를 말한다. 가단은 가대(歌臺), 가소(歌所), 가당(歌堂) 등의 명칭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송순이 중심이 되는 면앙정의 '면앙정가단'과 정철이 중심이 되는 '성산가단' 등이 유명하다. 이 가단이라는 것은 문인들이 상호교류를 하면서 시가활동을 하는 특수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면앙정이 더 유명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배출해 낸 많은 인물들 때문이다.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기대승, 고경명, 임제 등이 송순이 이곳에 정자를 지은 후, 이곳을 통해 이름을 떨쳤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운데 품위를 지니다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전면과 좌우에 누마루를 깔고 중앙에는 한 칸의 방을 마련하였다.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길게 삐쳐 나온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활주가 받치고 있다. 그저 화려하지도 않고, 딴 정자에 비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건물은 송순이 지은 뒤 여러 차례 보수를 한 것이며, 1979년과 2004년에 지붕을 새로 잇고 주변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평범함 면앙정이 한국의 고전 문학사에 커다란 의미를 두는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면앙정가단 때문일 것이다. 면앙정가단의 장소답게 면앙정 여기저기 걸린 각종 글을 적은 게판들이 수없이 많다. 아마 전국의 어느 정자에도 이렇듯 많은 글이 걸린 곳은 보기가 힘들 것이다.

 

 

 


바람이 지나는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면앙정. 지금은 찾는 이조차 없는 쓸쓸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한 때 이곳은 수많은 강호를 넘나든 시인묵객들의 각축장이 아니었을까? 찜통이라고 말하는 깊은 여름의 뙤약볕을 받고 찾아간 면앙정에서 옛 소리를 듣는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누구랄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남겨놓기를 좋아한 우리 선조들이다. 그것이 임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누정 하나를 두고도 그렇게 임금들 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했다.


관동팔경.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여덟 곳을 이르는 말이다. 강원도 고성부터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볼 수 있는 관동팔경은 몇 번을 둘러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관동팔경은 강원도 통천의 총석정과 고성의 삼일포를 비롯해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일컫는 말이다. 현재는 이 관동팔경을 다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비가 오는 날 오른 망양정


정자기행을 하면서 망양정을 찾은 날은 비가 뿌리는 날이었다. 망양정에 오르니 주변에 원추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작은 능선 위에 올라앉은 망양정. 가히 관동팔경 안에 들어갈 만한 곳이다.


이 망양정은 팔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 하여,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란 현판을 하사할 정도였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가 보다. 비가 뿌리는 망양정. 그 멋스러움은 몇 해가 지났건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망양정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와 숙종의 어제시

 

망양정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와 글로는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 정철의 관동별곡 등이 전해진다. 그림으로도 정선의 백납병, 관동명승첩에 있는 망양정도 등이 유명하다. 아름다움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를 좋아했던 선조들. 그만큼 망양정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만 한 정자다.


관동별곡 중 망양정 부분을 보면 파도가 치고 포말이 일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정철이 이곳에 올랐을 때 동해에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었는 듯하다.


션사(仙사)를 띄워 내여 두우(斗牛)로 향(向)하살까.

션인(仙人)을 차자려 단혈(丹穴)의 머므살까.

텬근(天根)을 못내 보와 망양뎡(望洋亭)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늘이니 하늘 밧근 므서신고.

갓득 노(怒)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은산(銀山)을 것거 내여 뉵합(六合)의 나리는 듯

오월(五月) 댱텬(長天)의 백셜(白雪)은 므스 일고.

 


자리를 옮긴 망양정


원래 망양정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철종 11년인 186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다. 그 후 망양정은 몇 번의 수난을 당했다. 허물어져 없어졌던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며, 2005년에 완전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동팔경 중 수일루라고 일컫는 망양정. 그저 누각에 올라 동해만 바라다보아도 가슴이 트이는 듯 하다. 이런 절경에 누각을 짓고 누대에 올라 어떤 꿈을 꾸었을까?


수많은 선조들이 이곳을 거쳤을 것이다. 그 많은 선조들은 각기 가슴에 망양정이라는 절경을 품고 길을 떠났을 것이다. 정자를 찾아 길을 나설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또 어느 곳에서 아름다운 정자를 만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 정자에는 어떤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정자들을 찾아 길을 나서지만, 그 여정이 언제 끝나려는 지는 모르겠다. 그저 언젠가 아름다운 정자를 작은 책에 담아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도 누정을 찾아 길을 나서고 싶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 하고 싶다. 그 작은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고 싶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에 소재한 송강정은, 송강 정철(1536∼1593)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4년 동안 지내던 정자다. 고서면 원강리 유신교차로에서 봉산초등학교 양지분교 쪽으로 조금 가다가보면 좌측으로 주차장이 보이고, 숲 위쪽에 자리를 한 송강정이 보인다. 이 정자는 원래는 '죽록정(竹綠亭)'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송강 정철이 지냈다 하여 송강의 호를 따서 송강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송강정은 1955년에 고쳐지었는데, 송강 정철이 선조 17년인 1584년 대사헌을 지내다가, 1585년 양사의 논핵이 있자 스스로 퇴임하여 약 4년간 고향인 창평에서 은거하였다. 송강정은 정철이 이곳에 내려와 지었다고 하니, 처음 송강정을 지은 것은 벌써 4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셈이다.

 

 

소나무 향이 짙은 송강정

 

계단을 따라 오르니 솔향이 코를 간질인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걸어 올라본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 한 가득 소나무의 향이 가득 차는 듯하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 날아간다. 계단 위에 자리한 정자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다. 그저 어느 고졸한 학자 한 사람이 이곳에서 쉬어갈 만한 그러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이 그 유명한 <사미인곡>이 지어진 것이라는데 대해, 다신 한번 정자를 훑어본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명종 16년인 1561년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글을 지으며 조용히 지냈다.

 

 

 

그는 고향인 창평에 내려와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지어냈다. <사미인곡>은 조정에서 물러난 정철이, 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남편과 이별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이곳 송강정에서 정철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고졸한 송강정은 숲을 해하지 않아

 

송강정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의 규모로 꾸며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아마 송강정이라고 하기 이전에 죽록정이라고 했다고 하니, 그 이름을 잊고 싶지가 않았는가 보다. 주추를 보니 동그렇게 다듬은 돌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기둥을 올렸다. 예전에도 이랬을까? 그저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의 정면에서 보면 중앙 뒤편으로 한 칸의 중재실을 달아냈다. 아마 이곳에서 4년이란 세월을 묵으면서, 송강은 사미인곡을 집필 한 것이 아니었을까? 마루에 걸터앉아 본다. 앞으로 난 길을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들린다. 아마 예전에는 저곳으로 소를 끈 농부가 지나고, 급하게 말을 몰아 달리던 파발이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송강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임금을 더 그리워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은 울진 평해. 솔향이 짙은 해송 숲에 자리한 정자.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시 한 수가 나올듯한 곳이다. 정철의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경이라고 하는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이 되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퇴락하였던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

 

그 후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이곳 사람인 황만영, 전자문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월송에 주둔한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9년에는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2층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제일경이란 곳이기에 그만큼 많은 수난을 당했는가 보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면 안 되는지?

 

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지난 한 해, 이상하게 맑던 날이, 답사 길에 오르기만 하면 비가 뿌린다. 한번 길을 나서면 2~3일을 돌아오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계획을 세우고 떠난 길이 무색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내딛은 발길이니 다는 못 다닌다고 해도, 쉴 수는 없지 않은가?

 

월송정을 찾은 날은 딴 날마다 비가 더 내린다. 치에서 내려 한창을 망설인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그래도 입구까지 왔는데 길을 돌릴 수는 없다. 천천히 숲길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향내가 코를 간질인다. 아마 이 월송정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 소나무의 향기에 취하지는 않았을까?

 

 

 

화랑의 이야기는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해송 숲에 둘러싸인 월송정. 월송정은 신라 때 사선(四仙)이라고 하는 영랑, 술랑, 남속, 안상이라는 하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옮겨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단다. 아름다운 곳은 전설이 만들어지고, 그 전설은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것이 우리네의 조상들이었다.

 

그만큼 멋과 여유를 즐겼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보면 위에 네 화랑은 강원도로 길을 잡아 금강산까지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서 한 호수에 반했다. 그 중 한 명인 화랑 영랑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반한 호수가 바로 설악산을 품고 동해와 맞닿은 석호인 ‘영랑호’이다.

 

 

영랑은 결국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속초 보광사 뒤편의 관음바위라는 곳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도 있다. 동해 안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겨울 설화가 아름다운 곳

 

월송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이층 누각으로 된 누정답게 시야가 확 트인다. 그래서 이곳은 동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울 경치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월송정. 아마 해송에 가지에 부러지게 쌓인 겨울눈인 ‘설화(雪花)’때문이란 생각이다.

 

 

정자를 내려 소나무 숲을 걸어본다. 비가 잠시 멈춘 듯 해 우산을 접는다. 해송가지에 맺혔던 물방울이 탁탁 소리를 내며 주변에 떨어진다. 그 소리가 더욱 경쾌하다. 신라의 사선인 영랑 등이 이곳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도 다 그랬을 것이란 생각에 혼자 미소를 머금는다.

 

이곳을 찾은 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까? 그것은 여유의 차이일 듯하다. 아마 비가 오는 날 월송정을 찾았다면 누구나 다 수긍을 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비가 오는 날 그럼 험한 꼴로 정자를 누비고 다니느냐고. 글쎄다.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를 못했다. 이제 돌아본 정자가 불과 100여 개. 전국에 얼마나 많은 정자가 있는 줄 모른다. 한 고장에만도 100여개가 넘는 정자를 가진 곳도 있으니 말이다.

 

사연도 참 많다. 정자마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바람이 늘 머무는 곳이다. 그 바람들이 세상이야기를 전해주는 곳이 바로 정자이다. 그래서 난 정자를 찾을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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