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대가집

한국민속촌 안에 들어가면 몇 채 안되는 와가 중 하나가 제9호 집이다. 남부지방의 대가로 불리는 이 집은,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 있던 대가집을 그대로 한국민속촌으로 이건을 한 집이다. 이 집은 가옥 전체에 누마루와 툇마루 등이 고르게 배치가 되어있어, 호남지방의 특유의 집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이 집의 전체적인 꾸밈은 튼 ㅁ 자 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ㄷ 자 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l 자형의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 문간채가 한편을 막고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큰 ㅁ 자가 된다. 이 집의 특징은 집이 상당히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돋보이는 집이다.

누마루의 여유, 대가 집의 특징

집안은 한꺼번에 다 소개한다는 것이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다. 특히 ‘고래등 같다’고 표현을 하게 되는 집들은 대개가 그 안에 이야기도 많은 법이다. 그러다 보면 몇 번으로 나누어야 그 집의 모습을 제대로 소개할 수가 있을 듯하다. 한국민속촌의 9호 집 역시 그러한 집 중 한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놓여있는 사랑채. 아마 이 집이 대개집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사랑채 한 채를 갖고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듯하다. 한편을 ㄱ 자로 달아내어 누마루를 놓았다. 누정과 같이 주추위에 기둥을 놓고 땅에서 떨어지듯 조성을 했다. 말은 사랑채의 누마루방이지만, 그대로 정자가 되는 그런 형태이다.

집안 여인들의 편의를 돕는 동선

누마루정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마루로 인해 모든 방에 연결이 되어진다.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방을 앞뒤로 나누어 들인 것도 특징이다. 누마루 정자 뒤편으로도 마루를 놓고, 그 안편으로 방을 드렸다. 두 개의 방을 이어놓았으며, 그 다음은 다시 마루를 놓고 두 개의 방을 또 앞뒤로 드렸다.




그리고 부엌은 안채쪽의 사랑채 뒤편에 드리고, 부엌을 드나드는 곳 역시 안채 쪽에 가깝게 붙여놓았다. 이렇게 안채에서 쉽게 사랑채의 부엌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안주인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랑채에 불을 떼거나 손들을 접대하기 쉽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여인들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짧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채를 보호하는 작은 배려도 돋보여

전남 무안에서 옮겨 온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왜 방을 앞뒤로 놓았을까? 외부에서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앞, 뒤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입구는 집의 주인이 주로 사용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뒤쪽에 자리한 방은 입구를 따로 꾸며 놓았을까? 별도로 방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렇게 안채를 바라보지 않도록 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집안 여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채에 외간 남정네가 묵더라도 안채의 여인들이 신경을 덜 쓰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에 딸린 부엌도 안채에서 가깝게 한 것이나, 부엌을 출입하는 별도의 길을 마련한 것들도 모두 여인들을 위한 동선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택 한 채를 돌아보는 즐거움. 그 집의 형태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모양새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그 집안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고택답사가 즐거운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 호남 대가집의 사랑채, 그동안 수많은 탈렌트들이 이곳에 발을 디뎠다.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이 집 민속촌으로 옮긴 덕에 별별 향수내를 다 맡는 듯하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전주에서 순창으로 나가는 국도(면 소재지인 원기리를 통과는 도로는 옛 길이다. 지금은 마을 뒤편으로 전용도로가 생겼다)에서 구이면 소재지 방향으로 접어들면, 좌측에 있는 원두현의 마을 안쪽에 정자 하나 자리하고 있다. 원두현은 통천 김씨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600년 정도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남계정. 남계 김진이 자시의 호를 따서 세운 정자이다. 남계정 마루에서 내다보면 앞으로 모악산이 지척에 보인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이 모악산을 바라다보면서, 남계 김진은 어떤 생각을 라며 살았을까? 벼슬도 마다한 남계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고목과 어우러진 남계정, 운치 있어

늦은 가을 날 찾은 남계정. 계단 앞에 느티나무 고목은 이미 앞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남계정 앞에 선 작은 산죽들은 푸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남계의 곧은 성격을 알려주는 듯하다. 볼품이 없다고 한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따듯한 정자이다, 남계정은 그렇게 모악을 바라다보며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다.

남계 김진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남계정이란 작은 정자를 하나를 지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직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정자는 그래서 더욱 따스함이 배어있다. 남들은 벼슬을 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벌이는데, 남계정의 주인은 초연히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이런 남계 김진이 바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깊은 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남계 김진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다. ‘남계(南溪)’는 그의 호로 자는 ‘이온(李溫)’이며, 본관은 통천이다.

김진의 검소한 성품이 보이는 정자

김진은 조선조 중종 22년인 152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했다는 김진은 25세에 초급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생원이 되었다. 선조 7년인 1574년에는 합천에서 훈도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오직 학문과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이 남계정은 김진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정자이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훈장을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남계정은 선조 13년인 1580년에 처음으로 지었다. 조선조 헌종 14년인 1673년과 1859년에 두 차례 중수를 하였다. 남계정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목을 비켜 서 계단을 오른다. 정자는 붉은 벽돌로 담을 둘러쌓고, 안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걸린 문은 잠겨 있다. 아마 후손들이 정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잠을 통을 채운 듯하다. 정자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앞쪽으로는 마루가 연결이 되어있다. 정자 안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등이 김진의 높은 덕을 기리는 글들이 걸려있다.


그저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생을 받친 남계. 벼슬길도 마다하고 이곳에 들어와 생을 마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악의 정상에 걸린 구름 한 덩이가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잎이 떨어진 고목나무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253-1 만동마을 안에는,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높이는 8m에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가 되는 나무이다. 그동안 답사를 하지 못해, 오랜만에 잠시 짬을 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라도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동마을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마을 안에 정자와 같은 것이 보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안에 정자가 있는데, 문 앞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안내판이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한 정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을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 된 듯하다.


600년 전에 자리 잡은 만동마을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마 이 소나무 한 그루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요즈음 시골의 형편이다. 이 소나무나 정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몇 분을 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수많은 시판이 걸려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 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이정표가 없는 남원, 답사 길에 어려움이 뒤따라

문화재답사를 가장 하기 힘든 곳이 남원이라고 한다. 오직 광한루와 만인의총 정도가 도로 안내판에 표기가 되어있을 뿐이다. 문화재는 큰길가서부터 안내판을 붙여 유도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남원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는 보물이나 천연기념물이 있어도 안내판 하나가 없다.

문화재 코 앞에 가야 서 있는 작은 안내판은, 글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남원의 문화재들은 그래서 서럽다. 사람들이 지나치다가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는 남원의 문화재들이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지나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정자와 소나무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찾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대구 동구 도학동 620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북지장사. 신라 소지왕 7년인 485년에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벌서 처음으로 절이 창건된 지가 1,526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북지장사는 팔공산 인근에 자리한 고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절로, 같은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동화사보다도 8년이나 앞선다.

절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은 보물 제805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조선 인조 원년인 1623년에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망자의 천도를 염원하는 극락전 또는 지장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정면 한 칸의 작은 전각

현재 대웅전은 보수 공사 중이다. 단청을 마쳤으며, 전각 안을 공사 중이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 규모이지만, 정면 한 칸 사이에 사각형의 사잇기둥을 세워, 세 칸처럼 독특한 양식을 띠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이 북지장사 대웅전은 여러 곳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전각은 우리나라 전역을 보아도 몇 채 되지 않는다. 순천 송광사의 약사전과 영산전, 그리고 여주 신륵사의 조사전 등이 이와 같은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대웅전에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러한 형태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북지장사 대웅전의 세부 처리는 조선 중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지붕 각 모서리에는 무게를 받칠 수 있는 추녀 끝에 얇은 기둥인 활주를 대었다고 하는데, 보수 공사를 하느라 활주는 임시로 제거하였다고 한다.

공포 끝에 용머리 조각이 돋보여

10월 8일 팔공산 갓바위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고 찾아간 북지장사.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대웅전이 보물이라는 말에 1.5km를 걸어 찾아들었다. 복원공사 중인 대웅전은 새 건물처럼 보인다. 이미 단청까지 마친 상태라 옛 고풍스런 멋은 사라졌으나, 말끔한 모습이 오히려 새로운 느낌이 든다.




북지장사에는 원래 대웅전이 있었으나,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이곳을 대웅전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북지장사의 대웅전은 측면도 한 칸이나 퇴칸을 달아냈다. 그리고 뒤편 퇴칸에 출입문을 낸 특이한 구성이다. 공포는 내, 외 4출목으로, 공포 위에 설치한 용머리 조각 등은 조선 후기 수법을 따르고 있다.

건물의 안쪽은 특이하게 정자에서 쓰는 건축 기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공사 중이라 안을 볼 수 없음이 아쉽다. 불전의 건축기법으로는 보기 드문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 전각은,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을 몇 바퀴를 돌아본다. 공포 끝마다 작은 용두(龍頭)를 조각한 연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 건물이 지장전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 자체를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반야용선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대웅전 앞에 놓여있는 석물은 석등의 받침돌로 보인다. 아마도 지장전 앞을 장식했던 석물이었을 것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북지장사 대웅전. 결코 아무것이나 보물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품을 지니고 있다. 작아서 더 아름다운 전각. 내년에는 안을 볼 수 있다고 하니, 봄이 되면 다시 한 번 대구 올레 길을 걸어야 할 듯하다.

수월정(水月亭)’, 이름대로라면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일 듯하다. 산청군을 답사하는 13일, 수월정을 찾아 나섰다. 이번 답사에 유일하게 찾아보고자 했던 정자이다. 내비를 이용해 주소를 입력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 444번지. 수월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5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고 한다.

수월정의 지번 앞에 도착하자, 내비가 찾는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어디에도 정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내판을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수월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곳을 지나 수월마을로 접어들었다. 마을 분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안내판이 없어 찾기가 어려웠던 수월정.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수월정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길가 쉼터에서 쉬고 계시던 어르신이, 저 아래로 내려가면 길에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길에서 보인다는 정자는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를 않는다. 444번지 앞에서 위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다. 혹시나 해서 그 길로 올라가 보았다. 중간까지 가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돌아 내려갈까 하다가, 다시 더 위로 올라가 보자고 아우를 졸랐다. 더 가파르다. 위로 올라가니 우측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수월정이 거기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런데 모든 문화재를 길거리에 안내판을 세워 놓았는데, 왜 수월정의 안내판은 없었던 것일까? 근 1시간 이상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수월하게 찾을 줄 알았던 수월정은 그렇게 애를 쓴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수월정의 측면과 나뭇가지로 막혀버린 입구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 수월정

수월정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가운데에 방 두 칸을 두고, 그 앞쪽으로 툇마루를 깔았다. 정면을 마주하고 가운데 방을 둔 좌측에는, 뒤편으로 밀어 한 칸의 방을 두고 우측으로는 누마루를 깔았다. 마루 앞에는 양편 모두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다. 기둥은 외진주는 원형이며, 내진주는 사각형이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올린 정자. 앞으로는 나무가 들어차 정면에서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측면에서 비스듬히 사진에 담아냈다. 수월정은 1915년에 석초 권두희가 김재 권습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대개 마루를 중심으로 구성을 하지만, 이 정자는 추운 겨울을 맞이하는 산청지방에서 용이하게 사용하기 위해, 온돌방을 중심으로 구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천정에 달린 말벌집과 시멘트로 발라 놓은 기둥 아랫부분. 그리고 떨어져 나가버린 판문

문화재 관리의 허점을 보다

산청군은 비교적 문화재 관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월정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생각이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주추위에 세운 기둥에 시멘으로 발라 놓았다. 아마도 기둥이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가 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흉하게 만들어 놓다니. 아마 시멘트가 마르면, 이것을 주추처럼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지.

마루 위로 올라가 본다. 누마루 끝에 판문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천정에는 커다란 말벌 집이 달려있다. 벽은 무너져 마루에 떨어져 있다. 도대체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렇게 관리를 했다니.


벽과 찬정에서 떨어져 내린 흙더미

이 수월정을 가파른 길을 오르기 전에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가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고, 부수어져 가고 있는 수월정. 그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관리를 했더라면, 아마도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을 정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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