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나름 정해진 바가 있다. 좋은 집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칭찬을 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낌없이 파헤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택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나만의 답사 방법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고택을 100채 이상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 살고 싶은 집이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역시 이번 답사 길에 만난 함양군의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이 고택의 사랑채는 미적 감각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게 구성을 한 안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 좋다. 이 집의 주인과 같은 분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4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고택

우선 이집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집의 구성은 길에서 들어가면 만나는 솟을대문 위로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개의 효자와 충신의 정려패가 문 위에 걸려있어, 이 집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알게 한다.

집의 구성은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 안사랑채, 중문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정작 이 집은 선생의 사후인 선조 무렵인 15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정여창 고택의 특징은 당시의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세간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깔아진 돌과 솟을 대문(가운데) 그리고 효자와 충신의 정려(아래)

뛰어난 사랑채의 멋스러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골목길의 바닥을 돌로 깔아 운치를 더했다. 이 돌길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고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놓여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중문의 담으로 연결이 된 사랑채가 보인다.

장대석을 3단으로 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 정말로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까?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부족할 듯하다. ㄱ자로 꺾인 부분에 개방된 마루를 놓아 정자로 만들고, 그 밑은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광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문채와 광채에도 이런 물건을 둘만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의 밑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동선구성을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놓았다. 꺾인부분은 판벽으로 마감을 하고 앞을 개방해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가운데), 개방마루 밑은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랑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 너머로 사랑채를 보니 커다란 노송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어찌 이런 사랑채를 꾸밀 수가 있었을까? 모든 것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일까?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는 안채의 구성

사랑채와 중문을 사이로 구별이 되는 안채는,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350년의 세월이 지난 안채는, 앞으로는 중문채를 놓고 우측으로는 아래채,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가 막고 있어 튼 ㅁ 자로 구성하였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안의 대소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넓게 구성이 되었으며, 오른편에는 며느리의 방을 따로 마련한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안주인이 맡아서 할 수 있도록 집안의 동선을 꾸며 놓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아래채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엄한 가풍을 알만하다.



안채와 뜰아래채(위), 중문채(가운데)와 안채의 정원

아랫사람을 생각한 집 구조와 동선

정여창 고택의 백미는 역시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집을 지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왜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선생을 꼽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채 앞뜰 우물곁에는 절구를 땅 속에 묻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채에서 여자들이 절구질을 할 때, 땅에 묻힌 절구가 힘을 덜 들이고도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 대신 벽에 창문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사시사철 공간이 열려있어, 한 겨울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들어와 춥다. 하지만 까치구멍이 있어야 할 곳에 창문을 내어 열고 닫음으로써,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다.


땅속에 파묻어 힘이 덜 들도록 한 절구(위)와 까치구멍 대신 창을 내어 추위를 막았다(아래)

정여창 고택만이 갖고 있는 마루측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문채 밖으로는 사랑채의 뜰로 나가는 공간이 있다. 곳간을 두고 일각문으로 향하는데, 중문채 뒤편에 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마루의 한편이 판벽으로 막혀있다. 무엇인가 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판벽 안으로는 소의 여물통을 이용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중문채는 집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면 제 시간에 소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마루측간. 이것이 바로 윗사람의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정여창 고택을 최고의 집으로 꼽는 데는 한 치의 주저함도 필요치가 않았다. 어디 이런 윗분 없을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바깥 툇마루가 있다.(위) 그 우측이 바로 마루측간이 있는 곳이다.
소의 여물통을 이용한 마루측간. 정여창 고택의 정점이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서 답사를 떠났는데,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우비를 하나 구해 입었더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바람이라고는 들어올 수 없는 비닐이고 보니, 온몸이 후끈거리고 금방이라도 몸에서 쉰내가 날 듯하다.

함양군은 정자가 많은 고장이다. 정자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 몇 곳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이곳을 둘러본 블로거 ‘바람 흔적 김천령’님이 동행을 해주는 바람에,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일두 정여창을 생각해 지은 군자정

군자정,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정자 이름이다. 군자란 일두 정여창을 말하는 것이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가 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으며, 1504년 사후에 갑자사회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광해군 10년인 1610년에는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군자정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소재한 경남 문화재자료 제380호이다. 이 정자는 정여창의 처가동네로, 이곳에 들려 유영을 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를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5세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군자정을 지었다고 하니 벌써 2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주추로 삼아 정자를 지었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군자정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아래는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기둥을 놓았다.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암반을 주추로 삼은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군자정은 아래를 조금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짧은 계단을 이용해 정자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로 다가가니 앞으로 흐르는 내는,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주변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데,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던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작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으며, 계단은 오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듯 아래쪽이 다 썩어버렸다. 기둥에는 음식물을 반입하지 말라고 적혔는데, 주변 음식점들이 이곳에서 손님을 받는다고 귀띔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정자 안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군자정은 아름답다.

문화재주변에 늘어놓은 술병 불쾌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군자정. 가까이 다가가보니 참 가관이랄 밖에.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손님이라도 받았는지, 재떨이로 썼을 그릇들이 정자 밑에 보인다. 한편에는 바위에 빈 술병을 늘어놓았다.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술병을 모아놓을 공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문화재 옆에다가 놓은 것일까?


군자정 옆에 빈 술병들이 늘어서 있어 볼썽사납다. 계단도 보수가 시급한 편이다.

문화재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한다. 꼭 담당을 하는 공무원들만이 보존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술병들이 늘어서 있다면, 어제 오늘 놓아 둔 것이 아닐 텐데 아무도 관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하루 빨리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라졌으면 한다. 말로만 하는 ‘문화대국’이나 ‘문화국민’이란 소리가 이젠 듣기조차 역겹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는 수령 500년이 지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마을을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이 소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처진 소나무로 높이는 16m이며, 둘레는 2.95m에 가지의 폭은 21m 정도이다.

이 소나무는 마치 등 굽은 사람처럼 서 있는데, 목 부분이 굽어져 가지가 마을 쪽으로 뻗쳐 처져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풍천 노씨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을 때 심었다고 전한다. 조국의 광복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 아래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비는 지신밟기를 했다고 한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수령 500년의 처진소나무

죽은 아들이 아이를 점지해준 종암우물

소나무 아래에는 마치 계란같이 생긴 바위와 우물이 있다. 이 바위를 종암이라고 부르며, 아래에 있는 우물을 종암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에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 말엽 소나무가 서있는 개평마을에는 2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금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40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



목 부분이 굽어진 처진 소나무는 노씨들이 지곡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두 부부는 귀한 아들이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에, 앞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50이 다 된 부인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병이 들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 ‘어머니 나 종암우물에 있어. 왜 데리러 안와’라고 했다. 부인은 집 가까이에 또 다른 우물이 있어, 종암우물까지는 물을 길러 가지 않았으나, 아들이 보고 싶은 생각으로 혹시나 해서 종암우물로 가서 우물주위를 돌았다. 몸이 약해진 부인은 우물을 돌다가 쓰러졌으나, 종암우물의 물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우물을 돌고는 했다.


아들을 점지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종암과 우물

먼 곳이지만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인은 날마다 종암우물을 떠다 먹으며 그 주위를 돌았다. 그런데 도저히 완쾌할 것 같지 않았던 병약한 부인이, 3개월 후에는 완쾌가 되었으며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임신이 된 선비의 부인은 49세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오직 아들을 보기를 바란 부인의 정성이 하늘을 닿아 아들을 본 것이다.

이 소문은 인근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부터 마을에는 낯선 여인들이 찾아와 종암을 안고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을 간절히 빌며 종암 주위를 돌면서, 우물 물을 마시고는 했다는 것이다.

지곡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전통마을이다.

지곡마을은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고택을 비롯한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수령 500년이 된 처진 소나무와 종암. 아마 이 외에도 이 마을을 돌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등굽은 소나무는 마을을 향해 옛날 옛적 전설이라도 들려주려는 것인지. 마을을 향한 가지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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